▲영화 <럭키, 아파트>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3.
이 영화의 또 다른 층위는 젠더와 공간에 대한 사유다. 이 문제는 '누가 이 아파트에 살아도 괜찮은 것인가?' 혹은 '누가 내 이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단순한 담론을 뛰어넘는다. 여성 동성 커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 관계를 '특별한 것'으로 바라보지는 않는 까닭이다. 오히려 이들이 경험하게 되는 감정은 보편성을 갖는다. 다만 이 관계가 외부로 드러나는 순간 작동되는 사회적 움직임은 혐오의 형태로 다가온다. 이러한 구조가 실제만큼이나 현실적이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감독이 이를 적극적인 형태의 갈등이나 분노가 아니라 미세한 침묵과 냉소, 불편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해내고 있어서다.
극중 선우와 희서는 그렇게 사회의 '정상적인 구조'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하나가 더 있다. 홀로 세상을 떠난 노인, 고양이를 돌보는 이웃, 경비원, 그리고 혼자인 아이까지. 모두가 이 공간에 함께 존재하지만 환영받지는 못하는 이들이다. 아파트는 모두가 함께 거주할 수 있는 구조물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어떤 존재를 쉽게 지워낼 수 있는 물리적 장치가 된다. 동일하게 구획된 각 호실의 형태와 크기만큼이나 모든 구성원의 목소리 또한 같은 크기를 갖고 있는 것처럼 믿게 되지만, 어떤 목소리들은 쉽게 묵살당하고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두 인물의 아래층에 살던 1310호 할머니의 고독사는 단순한 이웃의 부재로 읽힐 수 없다. 이는 명백한 공동체의 윤리적 붕괴, 돌봄의 고리가 망가져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선우는 이러한 변화를 자신 안으로 끌어들이며 자책과 분노를 '대신' 경험하는 인물이며, 그를 통해 우리 모두는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배척, 서로를 끌어안을 수 없는 상태로의 변화가 어떤 형태로 시각화될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단지 한 사람의 쓸쓸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가진 초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04.
"우리 같이 사는 집이잖아. 나한테 상의해 주면 안 돼?"
우리 사회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여러 논의에 대해 담아내고자 하는 작품이지만, 오랜 연인인 희서와 선우 두 사람을 오롯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내부로부터 여러 의미 있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만든다. 일단, 영화는 선우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순간이 더 많다. 보다 적극적인 인물이며, 외부의 자극에 훨씬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희서가 있다. 선우가 고립감을 호소할 때 그 곁에 존재했고, 세상과 단절되려는 순간에는 자신을 지우면서까지 나선다.
어떻게 보면 희서는 극중 인물 가운데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 표면 아래에 수많은 균열을 끌어안고 있다. 연인과의 관계, 아파트라는 공간, 사회적 시선, 소수자로서의 위치, 회사 내에서의 존재감,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박. 그는 영화 속에서 누구보다 조용히, 그러나 가장 깊이 흔들리는 존재로 그려진다. 직접적으로 분노하거나 울부짖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 훨씬 더 복잡한 감정의 층위를 쌓아가는 것이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이 관계가 사랑이 아닌 돌봄의 영역으로 접어들 때쯤, 감정이 아닌 책임의 감각으로 전환될 때 일어나는 균열을 드러내는 강유가람 감독의 선택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계 외부로부터 쏟아지는 피로와 내부에서 시작되는 갈등의 균열을 드러내는 데 있어 그는 직접적인 충돌 대신 반복되는 일상의 미묘한 어긋남을 활용하고 있다. 두 사람이 9년이란 시간을 만나온 연인이라는 설정도 분명히 여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갖고 있는 행동 패턴 속에서 관계의 믿음과 안정을 느끼고, 반대의 경우에 불안과 의심을 경험하게 된다. 말없이 핸드폰을 확인하는 장면, 서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공간을 이탈하는 행위 등의 사소하게 어긋난 일상이 쌓이는 순간들이 이 영화의 발화점이 된다.
▲영화 <럭키, 아파트>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5.
"사실 조금 무서웠던 것 같아."
영화 <럭키, 아파트>는 공동체의 사회적 가능성을 절하하거나 온전한 절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완성되지 않았다. 영화는 고립과 편견 속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연대의 가능성을 놓지 않고 있다. 이미지적으로는 두 사람이 마지막에 심는,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동산 위의 해바라기 한 송이가 그런 의미가 된다. 영화의 모든 자리를 갈무리하기에 적합한 엔딩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은 장면 하나로 영화는 고발이 아닌 회복을 향하는 이야기가 되며, 어떤 세상 속에서도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그 공간을 다시 삶의 터전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놓을 수 있게 된다.
잊지 말아야 할 시도가 또 하나 있다. 후반부에서야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는 또 다른 동성 커플의 이야기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 시간 속에서, 심지어 선우와 희서의 이야기 너머의 먼 곳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비슷한 고민을 하고, 아파하며 사랑했던 이들. 영화는 이 순간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와 이제 다가올 미래를 연결하며 현재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두 사람, 선우와 희서의 존재감을 강하게 역설한다. 이들이 걷고 있는 길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 그 길의 끝에 아직 사랑을 간직한 채로 살아 숨쉬고 있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다. 이 영화 <럭키, 아파트>의 '럭키'는 모든 공간에서 역설적이지만, 단 한 자리 여기에서만큼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강유가람 감독은 극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또 한 번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인가.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이웃이 될 것인가. 이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꺼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감각들이 있다. 어떤 누구의 존재도 부정하지 않을 단단한 태도. 낯선 냄새도 받아들일 수 있는 다정한 마음. 마지막으로 타인의 슬픔에 다가갈 수 있는 용기와 생동한 감각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삶의 끝에서, 내일을 다시 비춰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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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