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환 연출가는 “기후 위기가 심해지면 생태의 다양성이 사라질 텐데, 그때 과연 극장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세트보관실이 아니라 씨앗창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를 말이다. 김동인의 <감자> 같은 작품조차 모르는 세대가 나타났을 때, 극장이 그것을 재현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텃밭과 씨앗을 보관하고 싶었다. 기후와 텃밭, 극장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필립리
텃밭의 시작은 단순했다. 지난해 아르코예술극장 앞에 작은 흙바닥을 일구었고, 그 위에 첫 씨앗을 심었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올해 시민과 함께 예술행동으로 번졌다. '극장농부'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은 공연을 보기 위해, 혹은 공연이 없는 날에도 스스로 무대를 가꿨다. 밭을 일구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는 과정은 공동체의 시간이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극장 농부들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모여 텃밭을 관리한다. 처음에는 이들이 배우인지, 스태프인지, 관객인지 헷갈릴 정도였지만, 이내 흙 묻은 손과 지친 얼굴을 보며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모였지만, 그들이 흙을 가꾸는 방식에는 일정한 리듬이 생겼다.
이러한 감정은 단지 텃밭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기후위기'가 아니라 '기후살이'를 이야기한다. 기후는 뉴스 속 문장이 아니라, 손끝에서 감각되는 생물학적 현상이다. 뙤약볕 아래 말라가는 작물에 긴장하고, 장맛비에 휩쓸린 밭을 걱정한다. 그리고 그 감각은 점점 몸의 언어가 된다.
앤드씨어터의 텃밭 실천 외에도 균넥팀의 '균발견_극장균', 박쥐구실팀의 '배트 스테이지 투'가 참여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후 감각을 무대화했다. 이 세 팀의 작업은 오는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리는 통합공연
<해피퓨네랄>로 대중에게 공개된다. 무대 위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생태적 삶의 리듬과 죽음 이후의 감각까지 포괄하는 기후극장의 실험으로 완성된 것이다.
극장, 그 탐험의 시작에서 만난 감각들
공연에 참여한 날, 나는 티켓 부스 앞 긴 줄에 합류했다. 관객들은 순서를 기다리며 로비 곳곳에 전시된 포스터와 전시물을 살펴보았고, 창가 너머로 텃밭을 구경했다. 표를 받은 뒤, 곧이어 이동형 영상장치를 건네받았다. 여기에는 영상과 오디오가 담겨 있었고, 그것이 관객을 '극장 탐험'으로 이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관객이 아니라 무대의 '참여자'로 개입됐다.
이 공연은 연극, 설치예술, 워크숍의 경계를 넘나든다. 조명 대신 햇빛이, 음향 대신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무대를 채운다. 배우는 없지만, 극장 전체가 무대가 되고, 텃밭이 무대장치가 된다. 후미진 복도, 계단으로 이어진 야외, 무대 뒤편의 문 하나까지도 모두 공연의 일부다.
극장 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텃밭. 그리고 무대 뒤에서 다시 태어나는 생명까지. 참여자들은 아이폰을 손에 쥔 채, 장면마다 주어진 시간과 시점을 따라가며 극장을 탐험한다.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해서는 옛 서울대학교 모형이 놓인 장소에서 이 터의 역사와 극장이 시민의 삶의 무게를 되새겨 본다.
씨앗에 대한 이야기 역시 깊다. 마트에서 파는 개량종 씨앗이 아니라 순환이 가능한 토종 씨앗을 중심으로 관객은 '씨앗의 저작권'이라는 낯선 개념까지 접한다. 씨앗을 심고, 다시 수확하고, 그걸 다시 심는 순환의 리듬. 극장 앞 텃밭은 여러 사람의 손으로 가꿔지고, 또 다른 텃밭으로 이어진다. 영상 속 화면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관객의 발걸음이 어느덧 하나의 생태적 선순환이 된다.
여기에 하이라이트는 따로 없다. 흙을 만지고, 채소를 나누고, 햇볕에 땀을 흘리는 과정 자체가 서사였다. 누군가는 고추 모종을 심으며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꺼냈고, 지난주에 심긴 무 씨앗이 싹을 틔운 자리를 보고 어떤 이는 눈시울을 붉혔다.
평소에도 대학로에서 공연을 즐겨본다는 안수연(42)씨는 아들 홍찬슬(10)군과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이번 프로그램이 주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들려줬다.
"극장이 우주 같이 느겨졌어요. 우리 같은 일반 관객은 무대를 오롯이 경험하기는 힘들잖아요? 배우와 스태프들이 활동하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직접 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천장의 조명이 무대 아래로 내려오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이 공연은 생태적 경험이자 공동체적 현상이다. 무대를 사유하는 방식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되묻는다. 이들은 실제로 '씨앗보관소'를 만들 계획이다. 사라져가는 토종작물의 씨앗을 저장하고, 그 생태적 시간에 맞춰 예술을 재구성하는 실험. 그것이 바로 기후위기 시대에 극장이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가 아닐까. 그리고 이곳에서 흙을 일구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작은 텃밭은 우리가 살아갈 방법을 연습하는 무대입니다. 예술이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한다면, 바로 이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