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 잭의 집' 스틸사진
(주)엣나인필름
과거 반유대주의가 유럽에서 보편적이긴 했다. 현대의 반유대주의는 인종주의 개념보다는 문명사적 충돌과 국제정치와 관련돼 주로 이스라엘을 지목한다. 트리에 감독이 '실언'하며 반유대주의 뉘앙스를 풍겼는데,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며 이스라엘의 폭력을 비난하는 세계 진보 진영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여기서 트리에 출생의 비밀을 살펴보아야 한다. 트리에 어머니는 덴마크계 비유대인이고 아버지는 유대계였다. 아버지 쪽이 확고한 유대인 집안이어서 트리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대인으로 받아들인다. 본래 유대인 결정은 모계를 따르지만,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규정 또한 중요하기에 트리에가 자신을 유대인으로 믿은 게 이상하지는 않다. 트리에는,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독일인이라는 충격적 고백을 임종하는 어머니한테서 듣는다. 33세까지 유대인으로 살다가 갑자기 독일계가 돼 버린 어이없는 상황이 어떤 식으로든 그의 정체성 형성과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쳤을 법하다. 그것도 스웨덴인에서 노르웨이인이 된 게 아니라, 유대인에서 독일인이 됐으니 만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잭이 나치나 히틀러를 상징했다고 보면 비교적 작품을 이해하기 쉽지만, 만일 잭의 정체성에 트리에 감독을 투사해 유사 나치와 거짓 유대인 사이의 분열을 투입하면 간명한 그림은 아니다. 인생 마지막에 벙커로 내려간 히틀러와 달리 그림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피해자 진영에 속했다가 가해자의 일원이 된 상황은 양쪽으로부터 배제됨을 뜻한다. 그가 끊임없이 짓는 집이 종국에 피살자로 쌓아 올린 괴물의 집이 된 결말은 정체성의 파괴와 실존의 붕괴를 뜻한다. 나치의 악을 내면화한 존재이며, 동시에 그것을 응시하며 파멸하는, 분열된 자아로 형상화한다.
'잭이 지은 집(The House That Jack Built)'은 영국의 전래 동요로 맥아, 쥐, 고양이, 개, 소, 처녀, 누더기 입은 사내, 삭발한 신부, 수탉, 농부 등이 차례로 등장하여 각 요소가 이전 것과 연결되는 구조를 취한다. 변용이 이루어지기도 해 맥아 대신 치즈를 넣고 치즈를 쥐가 먹고 고양이가 쥐를 먹고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생각하면 영국 전래 동요지만 우리도 아는 내용이다.
'카드 가드야(Chad Gadya, 히브리어로 "한 마리의 새끼 염소")'는 유대교 동요로, 유월절 예전(禮典)에 포함된 노래다. '카드 가드야' 또한 염소를 시작으로 고양이, 개, 막대기, 불, 물, 소, 도살자, 죽음의 천사, 그리고 신까지 등장하여 각 요소가 이전 것을 극복하는 구조를 취하는 누적형 노래여서, 두 노래 사이에 연관을 지적하기도 한다. 트리에가 어릴 때 유대교 문화에서 성장했음을 감안하면 그가 이 연관을 알았을 확률이 높다.
<살인마 잭의 집>이란 한국 영화 제목의 원제는 '잭이 지은 집'이다. 한국어 어순이 어려워 표시나지 않지만 '집'이 더 강조된다. 연쇄와 누적의 구조를 통해, 영국 전래 동요를 거쳐 유대교 유월절과 연관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유월절의 핵심은 출애굽, 즉 해방이다. 영화는 반대로 누적적 구조로 추락을 도출한다.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마지막에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말하는 천국 '엘리시온'을 바라보며 잭이 눈물을 떨구고, 그 엘리시온이 어릴 적 본 풀 베는 들판이었다는 처리는, 죽음의 맥락에서 파악한 흥미로운 존재의 배제와 텍스트 간의 감각적인 연관을 보여준다.
누적형 구조의 영국 전래 동요가 영화 제목으로 사용되었고, 그 전래 동요는 유대인의 해방과 관련한 유대 동요와 연결된다. 아주 독특한 의미로 트리에가 유대인에서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업의 사슬을 탈출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잭의 집'이 허구였고, 잭은 자신의 집을 짓지만 '잭이 지은 집'은 잭 자신의 떠남을 의도한 집이었다는 함의를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
33살이라는 상징적인 나이에 유대인에서 독일인으로 '강등'된 트리에에게 반유대주의가 있었을까. 반이스라엘주의 정도가 아니었을까. 유대인이었던 자신에 대한 혐오나 반감과 같은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반유대주의가 있었을 개연성은 있다. 반감과 혐오는 출생과 관련되고 모성과 성장기의 부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렇다면 유방이 포유류에게 대표적인 모성 기관인 만큼 유방 절개와 유아를 포함한 모자 살해는 일반적 의미가 아닌 트리에만의 독특한 관점의 '반유대주의'에서 설득력 있는 영화적 전개가 된다. 일반 관객에게도 설득력이 있을까? 관객 나름일 테니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잭 대 잭
도입부에 이어진 영화 시작은 잭이 연쇄살인범으로 입문하는 모습을 다룬 '사건 1'이다. 거만하고 예의 없는 우마 서먼이라는 여자가 등장해 잭의 본능을 끄집어낸다. 중의적 대사가 향후 전개를 거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잭이 고장난 차 앞의 우마 서먼에게 묻는다.
"왜 잭을 들고 여기 서 있어요?"
철수란 사람이 있어서 "왜 철수를 들고 서 있어요?"하고 묻는 모습을 떠올리니 좀 우습다. 잭이 고장 났기에, 잭에게 잭을 빌려달라고 하지만, 잭은 잭이 없어서 잭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한다. 누구나 잭이 있지 않냐고 묻자 "나는 없다(I don't.)"라고 대답한다. 누구에게나 있는 잭이 잭에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잭을 고치러 철공소에 간다. 부서진 잭을 고쳐서 자동차를 들어 올리던 중에 잭이 다시 부서진다.
결국 차 안에서 잭이 잭을 들어 옆의 여자 면상을 후려치는 것으로 첫 사건이 완성된다. 나를 '나'이게끔 하는 게 잭에겐 연쇄살인이었다는 셈인데, 현실이 아닌 예술 창작의 범주에서는 허용되는 상상일까. '잭 대 잭'의 구도는 감독 개인의 배경과 무관하게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이야기이나, 너무 과격해서 여기서 실존적 메시지를 끌어내기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전언이나 영화적 형식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관객 개인마다 다를 텐데, 아무런 근거 없이 막무가내로 잔혹한 폭력을 사용했다는 혐의는 이 영화에서 거두어도 좋겠다.
안치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