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우승을 이끌었던 이광환 전 감독(KBO 원로자문)이 2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77세, 이 감독은 최근까지 페섬유종으로 투병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감독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야구계와 팬들 사이에서는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1948년생인 이광환 감독은 중앙고와 고려대를 졸업하고 한일은행과 육군 경리단에서 선수 생활을 보냈다. 은퇴 후 1977년 중앙고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OB 베어스(현 두산) 타격 코치로 합류했고, 이후 2군 감독을 거쳐 1989년 OB 사령탑에 오르며 첫 1군 감독이 됐다.

이 감독은 LG의 사령탑을 두 차례 역임한 것을 비롯하여 OB, 한화 이글스, 우리 히어로즈(현 키움)의 지휘봉을 잡았다. KBO의 규칙위원과 육성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행정분야에서도 활약했다.

역시 이광환 감독의 야구인생에서 최고의 화양연화를 꼽으라면 단연 LG 1기 시절을 빼놓을 수 없다. 1992년 백인천 감독의 후임으로 LG의 지휘봉을 잡은 이 감독은 3년 차인 1994년 압도적인 성적으로 팀의 2번째 정규리그-한국시리즈 통합우승을 이끌며 지도자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야구계에 센세이션 일으킨 이광환 감독

 1994년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지휘한 이광환 KBO 원로자문이 2일 별세했다.
1994년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지휘한 이광환 KBO 원로자문이 2일 별세했다.연합뉴스

이 시기에 이광환 감독은 단지 성적만이 아니라 '자율야구'·'신바람야구'·'스타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자신만의 야구철학을 정립해 야구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LG는 류지현·김재현·서용빈 등 신예들과 한대화·노찬엽 등 베테랑의 조화, 이상훈·김태원·정삼흠·김용수 등 강력한 투수진까지 모두 갖춘 한국야구사상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꼽힌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야구는 일본야구의 잔재로 인하여 감독들의 권위적인 리더십에 기반한 지옥훈련과 혹사, 주먹구구식 경기 운영 등이 아직 만연했던 시절이었다. 지도자로서 일본 세이부, 미국 세인트루이스 등에서 연수를 거쳐 선진 야구 시스템을 접한 이 감독은, 지도자의 상명하복대로 움직이는 데만 익숙한 한국야구 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수 중심의 야구'와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광환 감독이 주창한 자율야구란 단순히 선수들이 알아서 해도록 내버려 두는 '방임'과는 달랐다. 이 감독은 당시만 해도 한국야구에서 보기 드물던 '투수 분업화'를 본격적으로 도입해 선발했다. 로테이션, 셋업맨, 롱릴리프, 마무리 등의 보직 구분을 명확히 하며 에이스 한두 명에게 모든 짐을 지우던 혹사의 관행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또한 체계적인 선수단 관리를 위해 1·2군의 운영을 분리하여 1군은 성적, 2군은 육성이라는 이원화 시스템의 기틀을 마련했다. 트레이너, 전력분석, 스카우트 등 선수단을 지원해야 할 스태프들의 파트별 전문성을 인정하고 지위를 격상시키기 시작한 것도 이광환 감독 때 부터였다.

이 감독은 체계적인 시스템과 인프라 구축을 통하여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프로야구 조직 체제의 근본적인 혁신을 이끌었다. 선수들이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알아서 스스로 더 노력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바로 이광환식 자율야구의 본질이었다.

이는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생소하던 '메이저리그식 시스템'을 한국야구에 이식하려는 거대한 개혁이기도 했다. 마침 메이저리그식 시스템에 관심이 많았고, 개성 강한 스타들이 넘쳐났던 당시 LG는 이러한 이광환 감독의 철학을 구현하기에 최적의 팀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나 투수분업화, 육성시스템 도입 등을 놓고 한국야구 현실에는 맞지 않는 이상론이라고 비웃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현재는 모든 야구계와 팬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이 됐다.

아쉬운 것은 감독으로서의 전성기가 짧았다는 것이다. 이 감독은 통합우승 이후 이듬해인 1995년에도 선두경쟁을 펼치며 2연패에 도전했으나, 김인식 감독이 이끄는 OB 베어스의 돌풍에 밀려 역대급 순위싸움끝에 막판에 추락하며 2위로 밀려났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롯데 자이언츠에게 업셋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한국시리즈 진출조차 실패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6년에는 성적 부진으로 하위권까지 추락하며 경질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이 감독은 한화의 사령탑을 맡아 김태균, 이범호(현 KIA 타이거즈 감독) 같은 젊은 재능을 발굴하는 성과를 냈고, 2003년에는 LG 사령탑으로 다시 복귀했다. 2008년에는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을 인수하여 재창단한 히어로즈의 초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LG 1기 시절 같은 성과는 다시 재현하지 못했다. 이 감독은 특유의 자율야구 철학을 고수했지만, 1990년대 황금기 시절의 LG와는 달리 당시의 한화, LG 2기, 히어로즈는 전력 자체가 약했고 팀 내부적으로도 각종 문제가 많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LG 2기 시절에는 근무 태만 논란 등에 휩싸이며 이후 10년간 포스트시즌 탈락으로 이어지는 LG 암흑기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혹평까지 받아야했다

현대야구의 트렌드가 또다시 변화하던 시기였음에도 어느덧 노장이 된 이 감독은 시대의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서서히 뒤처지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광환 감독이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통산 608승(639패 3무)으로 동시대를 풍미한 김응용, 김인식, 김성근 등 다른 명장들에 비하면 누적 승수가 적었던 이유다.

이 감독은 히어로즈 사령탑을 끝으로 프로야구 감독직을 완전히 떠난 이후에도 야구사랑은 계속됐다. 2010년부터 서울대 야구부를 10년간 맡으며 무보수로 아마추어 학생 선수들을 지도했다. 당시 서울대 야구부는 교내 동아리팀보다도 전력이 약할만큼 매번 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약체중의 최약체였다. 하지만 이 감독은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도자 인생 동안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서울대 야구부 감독 시절을 꼽을 정도로 애착을 드러냈다.

"야구 기술보다는 인성을 배워야 한다. 공부로 1등만 해오던 학생들이 야구부에 와서 실패를 경험하며 희생과 협동의 멤버십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게 이 감독이 밝힌 소신이었다. 프로 야구인에서 일반 학생에 이르기까지, 지도를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광환 감독을 '인생의 은사'로 존경하는 이유다.

이 밖에도 이 감독은 유소년와 여자야구 육성, 사비로 제주도 야구박물관을 건립하는데도 앞장섰다. 베이스볼 아카데미의 원장으로 재임하여 후배 지도자 양성에 기여했고, LG가 후원하는 WBSC 2016 기장 여자야구월드컵 감독을 맡는 등 말년까지 국내 야구 발전을 위한 각종 활동을 계속해 왔다. 또한 프로 현장을 떠난 후에도 자신의 우승을 이끌던 LG의 경기는 늘 챙겨볼 정도로 관심을 놓지 않았으며, 2023년 LG가 자신의 재임 기간 이후 무려 29년 만에 무관의 한을 풀고 다시 우승을 차지하자 진심으로 축하를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폐 건강 문제로 서울대 야구부 사령탑 자리에서 물러난 후 활동을 중단하며 치료에 전념해 왔다. 지난 3월 22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경기에서 시구자로 나서며 오랜만에 팬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만 해도 거동이 불편해 보이지 않았으나 안타깝게도 이 장면은 이 감독이 공식 석상에 참석한 마지막 순간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 만에 이 감독은 세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됐다.

이 감독은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각 팀마다 저마다의 확실한 철학과 팀 컬러가 있었으면 좋겠다. 가게나 집집마다 디자인이 다르고 개성이 있어야 고객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 처럼, 야구도 컬러풀해야한다. 각자 지향하는 다양한 방향이 있어야한다"며 한국야구와 후배 지도자를 위한 고언을 전하기도 했다.

이제 '신바람 야구'의 선구자는 돌아올수 없는 영면에 들었다. 그러나 자율과 시스템, 그리고 사람됨을 중시했던 그의 철학은 여전히 KBO 리그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선수만큼이나 올바른 지도자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역설했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야구인 이광환 감독의 이름은 빛과 그림자를 모두 끌어안은, 한국 야구의 영원한 전설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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