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여전히 많은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은퇴할 계획은 전혀 없어요."

194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여든을 코앞에 뒀다. 본인 말처럼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인 여전한 현역이다. 외신에 따르면, 스필버그 감독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 LA 유니버설 스튜디오 내 본인의 이름을 딴 극장의 헌장 행사에 참석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오랜 시간 스필버그 감독과 협업해 온 유니버설 픽처스는 <쥬라기 공원>과 <쥬라기 월드> 프랜차이즈를 소유한 제작배급사다.

그 스필버그가 제작총괄로 이름을 올린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이 화제 속에 개봉했다. <쥬라기 월드> 시리즈 3편이 모두 전 세계 흥행 수익 10억 달러를 돌파했으니 화제작 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 각본가 데이빗 코엡이다. 1963년생으로 환갑을 넘긴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다.

데이빗 코엡은 <죽어야 사는 여자>, <칼리토>, <미션 임파서블>, <우주전쟁> 등 전성기 시절 그야말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감독들과 걸작을 다수 함께했고, 최근까지 스필버그 감독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과 또 다른 '스티븐'인 스티브 소더버그 감독 <블랙백>을 작업했다. 영화 연출 빼곤 다 잘 쓰는 백전노장 각본가라 할 수 있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오프닝 크레딧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곤 추억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이 프랜차이즈의 전설이 시작된 1993년 <쥬라기 공원>의 각본을 원작자인 마이클 클레이튼과 함께 쓰고, 1997년 2편 <쥬라기 공원 2 - 잃어버린 세계>까지 작업한 인물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각본가는 시작부터 아예 대놓고 "32년 전에 공룡들이 처음 출현해..."와 같은 설명 중에 꼭 짚어 '32년' 강조하는 여유를 부렸다. 그럴 법 하다. 스필버그 감독은 <쥬라기 월드> 시리즈를 부활시키며 이 백전노장 글쟁이이자 영화쟁이에게 각본을 의뢰했다고 한다.

이 노장의 귀환, 의미심장하고 시의적절하며 그럴싸해 보인다. 공룡들 즐기기에 여념이 없을 꼬마 관객들은 크게 관계가 없겠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그간 전작들인 <쥬라기 월드> 시리즈가 보여준 서사적 궤적을 고려하면 전 세계인들을 열광하게 만든 이 역대급 프렌차이즈도 각본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또 한 명의 주목해야 할 인물이 바로 배우 스칼렛 요한슨이다.

32년 만의 귀환, 그리고 스칼렛 요한슨

 <쥬라기 월드:새로운 시작> 스틸
<쥬라기 월드:새로운 시작> 스틸유니버셜코리아

그 32년 간 제작된 실사 영화만 7편이다. 짧고 굵게 복기해 보자. <쥬라기 공원>은 우아하고 장엄했다. 카오스 이론과 유전공학에 대한 나름의 통찰과 철학이 확고했다. 공포 스릴러로서의 측면은 더 할 나위 없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출세작은 <조스>다. 다 떠나서 공룡을 스크린에 완벽하게 부활시킨 것 하나만으로 걸작의 반열에 오를만 했고, 흥행 성적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 이후론 내리막이었다. 4년 뒤 나온 속편은 크게 흠잡을데는 없었지만 동어반복에 가까웠다. 스필버그가 연출직을 내려놓은 3편은 익룡이나 두 거대 공룡의 결투라는 새로운 볼거리를 제외하곤 평범한 액션 영화에 가까웠다. 그게 2001년이었다.

그로부터 리부트되기까지는 무려 14년이란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 좋은 각본이 없었다. 그러자 스필버그의 영혼의 단짝인 제작사 엠블린 엔터테인먼트 캐슬린 케네디도 프로젝트에서 손을 뗐다. 스필버그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함께하고 <본> 시리즈를 창조해낸 프랭크 마샬 프로듀서가 합류하면서 <쥬라기 월드> 시리즈가 2015년 본 궤도에 올랐다.

아예 완성된 테마 파크에 공룡들을 풀어 놓은 아이디어는 대성공이었다. 랩터와의 소통이란 주제도 신선했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로 막 뜬 크리스 프랫과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의 조합도 매끄러웠다. 무엇보다 공룡 시리즈의 부활 자체에 전 세계 관객들이 열광했다. <쥬라기 월드>는 1억 5천만 달러 제작비의 열 배가 넘는 16억 7천만 달러에 달하는 흥행 수익을 거뒀다.

거칠 게 없었다. 빠르게 속편이 제작됐다. 그런데 점차 길을 잃어갔다. 서구 평론가들 사이에서 혹평이 쏟아졌다. 공룡들을 세상에 풀어 놓더니 자꾸 공존을 시도하다 못해 변종 메뚜기까지 등장시켰다. 영화 속 유전공학은 공룡 유전자를 변형하다 못해 인간 소녀까지 창조해냈다.

공포와 스릴은 여전하지만 서사가 자꾸 힘이 빠지고 설득력을 잃어갔다. 2022년 <쥬라기 월드:도미니언>은 샘 닐부터 로라 던, 제프 골드브럼까지 <쥬라기 공원> 시리즈에 출연한 역전의 용사들을 총출동시켰지만 서사의 생기를 불어 넣기엔 역부족이었다.

다행인 것은 지치질 모르는 공룡을 향한 관객들의 팬심이었다랄까. <쥬라기 월드> 시리즈는 세 편 모두 전 세계 10억 달러를 넘기는 흥행 수익을 거둬들였다.

자 이제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을 얘기할 때가 됐다. 'Rebirth'란 부제에 걸맞게 신작은 공룡들을 격리한 적도의 섬으로 향한다. 전작으로부터 5년 후, 공룡들을 세상에 풀어 놓고 카오스가 된 암울한 세상을 그렸던 전작과 달리 육식 공룡들은 대부분 정리가 된 상태다. "기존 시리즈를 계승하면서도 새 출발처럼 느껴지게 하고 싶었다"는 제작진과 데이빗 코엡이 마련한한 차별점은 여기서 출발한다.

신약 개발을 위한 거대 공룡 DNA를 추출하라. 다시 말해 인간들이 공룡에게 쫓겨야 할 숙명은 매한가지지만 어쨌든 인간들이 공룡을 추격하는 서사는 신선하다 할 만하다. 게다가 이 공룡들은 <쥬라기 월드> 시리즈를 뛰어넘는 유전공학이 탄생시킨 변종들이다. 이 익숙함과 차별점의 변주에 앞장 선 이가 바로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특수요원 조라다.

이 새로운 공룡 영화 시리즈가 입증하는 것

 영화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스틸컷
영화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스틸컷유니버설 픽처스

최근 내한한 스칼렛 요한슨은 액션 연기에 대해 묻는 질문에 "싸우기 보다 공룡을 피해 달아나는 연기가 주를 이뤘다"고 답했다. 우문현답이 아닐 수 없다. 또 스칼렛 요한슨은 로맨스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배역이라 만족했다는 답도 내놨다. 조라의 성격을 파악할 단서 중 하나다.

이 단서들에 더해 팀을 이끄는 책임감과 직업적 능력, 사람과 동료에 대한 연민이란 키워드를 새겨 넣은 것이 바로 조라다. 전 세계 관객들이 잊지 못할 마블 블랙 위도우의 따뜻한 버전이라고 보면 맞을 텐데 <블랙 위도우> 속 동생과 가족과 만난 나타샤가 보여준 인간적인 면모를 떠올려 보시길. 그렇게 스칼렛 요한슨은 32년 전 <쥬라기 공원> 속 '그랜트 박사' 샘 닐이 보여준 안정감을 과시한다. 극이 무게 중심을 잡은 이가 그녀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은 이렇게 잘 할 수 있는 것과 새로운 것을 적절히 버무린 기획의 산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창조해냈고 이 시리즈가 가장 잘하는 것은 공룡과 인간들을 한정된 공간에 몰아 넣을 때 발휘되는 공포와 긴장, 그리고 액션이다. 거기에 유전공학을 위시한 과학 맹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장착한 채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끼얹는다.

<쥬라기 월드> 2편과 3편이 삐걱댄 부분이 이 기본 구조를 넘어 공룡들을 세상에 풀어 놓고 공존을 강조하면서부터다. 공룡 영화는 공룡 영화라는 이야기다. 이 주제를 철학적으로 가장 잘 구현한 영화는 이미 32년 전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들어냈다.

데이빗 코엡과 <고질라>로 유명한 가렛 에드워즈 감독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주인공들은 한정된 공간과 제한된 시간 안에 각기 다른 세 거대 공룡의 DNA를 채취해야 한다는 임무에 충실하기도 바쁘다. 혹시 이 정도론 심심할지 몰라 섬 가까운 바다에서 만난 델가도(마누엘 가르시아룰포) 가족의 생존기를 서브 플롯으로 심어 넣었다.

이 3년 만의 신작이 본질에 충실한 건 또 있다. 동이 틀 무렵까지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주인공들이 가진 한계와 제한에서 오는 갈등은 끊임없는 긴장을 유발한다. 즉 <쥬라기 월드> 전작들보다 더한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는 것. 거기에 유전자 변형을 일으킨 공룡들의 향상된 외향과 능력치도 그 공포감에 일조한다.

<쥬라기 월드>는 <쥬라기 월드>다. 32년 차 공룡 영화 시리즈에 관객들이 원하는 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체험으로써, 경이로서의 영화면 족하다. 거대 초식 공룡 무리를 보며 감탄하고 감동하는 헨리 박사(조나단 베일리)처럼 말이다.

확실한 건 또 있다. 스필버그가, 데이빗 코엡이 현역으로 활동하는 한, <쥬라기 월드>의 공룡들이 스크린에서 은퇴할 일은 절대 없지 않을까. 이를 방증하듯, <쥬라기 월드:새로운 시작>은 어제 우리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쥬라기 월드>는 <쥬라기 월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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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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