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영연방의 일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자 작은 대륙'으로 불린다. 흔히 천혜의 자연환경과 자원강국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의외로 '부자들의 천국'으로도 유명하다. 호주는 1991년 이후 30년간 경기침체가 없었고, 2024년 기준 1인당 GDP 6만 5966달러의 경제력을 갖췄다.
이렇게 화려한 호주의 기원은 '영국 죄수들의 유배지'로 시작됐다. 호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딛고 지금의 부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7월 1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죄수지옥, 호주는 어떻게 부의 천국이 됐나'편을 통하여 호주의 역사를 조명했다.
호주의 영문명인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는 라틴어로 '남쪽'을 뜻하는 단어에서 기원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 당시, 유럽인들에게 호주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신비의 땅이었다. 호주의 면적은 대한민국 영토의 77배에 이르지만, 인구는 2700만명으로 한국(5100만명)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접근하기 어려운 땅
▲벌거벗은세계사호주tvN
사실 호주 내륙은 본래 인간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땅이었다. 호주 대륙은 길이가 무려 3500킬로미터에 이르는 그레이트 디바이딩 산맥이 대륙을 동서로 나누고 있고, 강과 비옥한 땅이 있는 동쪽에 비해 서쪽은 황량한 사막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호주 내륙의 척박한 오지에서 유래한 유명한 표현이 바로 '아웃백'이었다.
이러한 미지의 땅 호주에 유럽의 함선들이 도착하기 시작한 것은 약 17세기부터다. 1606년 네덜란드 함선이 가장 처음 호주를 발견했지만, 당시만 해도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만 여겨져 주목받지 못했다.
1770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이 지금의 시드니 일대에 상륙하며 유럽인 최초로 호주의 남동부 해안에 도착한다. 쿡은 원주민들의 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동물과 지형을 탐사한 후, 호주를 영국의 식민지로 삼았다. 같은해 8월 22일, 상륙 지역에 영국 국기가 세워지고 '뉴 사우스 웨일스'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이 무렵, 본국인 영국은 급격한 산업혁명과 인클로저 운동의 여파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도시에서는 빈민과 노동자가 급증하며 사회분위기가 흉흉해지자 범죄율이 크게 악화된다.하지만 영국은 당시 전쟁과 재정난 때문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죄수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감옥 시설을 짓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사회적 골칫거리가 된 죄수문제 해결을 위하여 영국이 찾아낸 꼼수는 유배형이었다. 영국은 죄수들을 해외 식민지로 유배보내며 관리 비용도 줄이고 가혹한 형벌에 대한 비난 여론도 피할 수 있었다. 1787년 5월, 11척의 배에 수용된 500여명이 죄수들은 약 8개월간의 기나긴 항해 끝에 이듬해 1월, 시드니의 잭슨항에 도착한다.
죄수들은 호주에서 식민지 개척을 위한 노동력으로 투입됐다. 사실 범죄자라고 해도 이들 중에는 중한 죄를 지은 사람들도 있는 반면, 가벼운 경범죄나 생계형 범죄를 짓고 끌려온 사람들도 많았다. 의료와 식량지원이 부족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많은 죄수들이 학대 당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견디다 못해 도망을 시도했던 죄수들이 붙잡히면 더욱 가혹한 체벌을 당하고 독방에 수감됐다.
이처럼 많은 죄수들의 피땀어린 희생과 눈물 통하여 호주에게는 각종 건물과 도로가 지어지고 도시 인프라가 하나둘씩 갖춰졌다. 지금은 호주의 관광명소가 된 하이드 파크 수용소(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더 록스 등은 모두 죄수들의 손으로 지어낸 대표적인 시설들이다.
호주 유배 정책
영국은 호주를 식민지로 유지하기 위하여 일정한 인구를 확보해야 했다. 영국 정부는 형기가 끝난 죄수들에게 일자리와 토지를 제공하고 자유민 지위를 보장하는 당근 정책을 제시했다. 약 93%에 이르는 죄수들이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호주에 정착했다.
1788년부터 1868년까지 약 80년간 영국 죄수들의 호주 유배 정책은 계속됐고, 이는 영국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 3명중 1명꼴에 해당했다. 이렇게 호주로 건너온 영국인들의 숫자는 약 16만명에 이르렀고, 정착민들은 첫 개척지인 해안가를 넘어 점차 내륙으로 이동하며 영역을 확장했다. 오늘날의 호주가 '죄수들이 세운 나라'라는 별명이 생긴 이유다.
1851년, 호주의 운명을 바꾸게 되는 또 하나의 '대발견'이 일어난다. 호주 오피르 지역에서 대규모의 금맥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세계에서 호주로 금을 찾아 건너오는 '골드러시'가 일어난다.
1851년까지 약 43만에 불과하던 호주 인구는 골드러시 이후 불과 20년만인 1871년에는 무려 170만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또한 골드러시로 인하여 금 이외에도 높은 가치를 지닌 광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납, 구리, 주석, 은 등 다양한 광물이 발견되자 호주는 이제 변방의 황무지에서 자원강국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진다.
이때부터 광산업이 호주의 핵심산업으로 떠오르고, 금광개발로 10년간 호주에 유입된 자금은 약 30조원에 이르렀다. 골드러시는 오늘날 호주가 부국으로 올라설수 있었던 경제성장의 전환점으로 평가 받는다.
한편으로 호주의 광물 가치가 높아지면서 영국의 식민지 수탈과 부작용에 대한 저항 여론도 눈을 뜨기 시작된다. 영국이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호주에 유입한 소와 말, 양, 토끼 등이 땅을 헤집고 번식하며 토양침식과 사막화를 초래하면서 호주 생태계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유레카 반란은 1851년부터 3년간 영국의 식민지 권위에 저항한 빅토리아주의 금광 노동자들이 유레카 지역에서 일으킨 반란이었다. 영국은 반란을 무력 진압하는데 성공하지만, 미국 독립의 선례를 교훈 삼아 유화정책으로 선회하며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노력했다. 19세기부터 영국은 호주인들에게 선거권과 자치권을 부여했다. 유레카 반란은 실패했지만 '호주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린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9세기 후반 이후 골드러시와 광물개발로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 호주는 기존의 백인 중심 사회에서 다문화 사회로 변모한다. 자연히 영국의 영향력에 벗어나 독립을 요구하는 호주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1901년, 호주는 영국의 승인하에 6개의 식민지가 통합되어 호주 연방이 처음으로 출범하게 되고 자치권을 보장 받았다. 제국이 거대화되면서 운영 비용에 부담을 느낀 영국 역시 영연방의 틀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호주의 자치를 인정했다.
하지만 호주가 사실상의 독립 이후에도 오늘날의 대표적인 다문화 국가로 자리잡기까지는 많은 진통을 거쳐야 했다. 호주는 자치 정부 수립 이후 약 50여년간 비유럽계 이민자와 원주민에 대한 국가적인 차별이 성행했다. 호주 정부는 백호주의(백인 우선주의 인종차별 정책)를 표방하여 당시 호주로 유입되던 중국인들을 비롯한 유색인종의 이민을 제한하는 차별 정책을 펼쳤다.
또한 호주 정부는 1915년부터 무러 54년간 원주민 보호법을 제정하여 원주민의 자녀들을 약탈하여 백인 가정에 입양시키는 강제 동화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명백한 국가에 의한 납치이자 범죄행위였다. 이 당시 강제로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던 원주민 출신 세대는 스스로를 '도둑맞은 세대'라고 부르며, 지금까지도 호주의 가슴 아픈 흑역사로 꼽힌다.
이러한 호주의 인종차별 정책에 경종을 울리게 된 건 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호주는 노동력의 부족으로 파괴된 인프라 재건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호주 정부는 '인구를 늘릴 것인가, 멸망할 것인가(Populate ro Perish)'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내걸고 대규모 이민 수용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호주는 전설의 '10파운드 이민 정책'을 통해 원래 120파운드였던 호주행 선박 운임료를 92%나 할인하고 각종 파격적인 복지혜택을 보장하는 등, 이민자를 차별하던 과거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1973년에는 악명높던 백호주의 정책이 폐지되고, 1975년에는 인종차별 금지법이 제정되면서 베트남 난민 등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급증한다. 또한 이후에는 생계형 이민만이 아니라 부자들을 겨냥하여 1979년 상속세 폐지 등을 결정하면서, 많은 자산가들이 호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된다. 오늘날의 호주는 이제 유럽과 아시아 등 전세계의 자산가들이 사랑하는 '이민자의 천국'다.
1986년 3월, 호주는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평화적인 독립을 이뤄낸다. 다만 호주는 독립후에도 영연방에 남으며 당시 영국 국왕이던 엘리자베스 2세를 국가원수로 유지하며 실리를 택했다. 자원강국으로 자리매김한 호주는 30년간 경기침체가 단 한 번도 없는 나라라는 기록을 세우며 경제적인 번영에 성공한다. 또한 20세기 중반부터 동아시아 3국인 중국, 일본, 한국과의 무역 교류를 높이며 '아시아 친화정책'을 펼친 것도 신의 한 수였다는 평가다.
척박한 황무지에서 죄인들의 유배지로 출발했던 호주는 자원과 이민, 해외자본을 활용하여 당당한 부의 천국으로 성장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원주민 탄압과 아시아계 차별이라는 어두운 역사도 있었지만, 과거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하면서 성공적인 다문화 사회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했다. 한 나라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어떻게 선진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지 호주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