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무엇일까. 구속되지 않는 것, 할 수 있는 모두를 하는 것, 그런 것만이 자유일까. 체코 출신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제 책 <몸짓들>에서 자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유롭다는 것은 바로 의미를 갖고, 의미를 주고, 세계를 변화시키고 타인을 위해 거기 있는 것, 한 마디로, 참으로 사는 것이다. 참으로 거기 있다는 것이다."
자유란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갖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의미를 주는 것이다. 내가 가진 의미를 남에게 주고, 그로써 영향을 미쳐 변화시키는 것이다. 나에서 그치지 않고 타인에게 도달하는 것, 심지어는 타인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플루서는 이를 참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거기 있다는 건 의미를 갖고 타인에게 다가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빌렘 플루서가 말하는 자유다.
플루서는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 더 큰 자유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자유는 유동적이며 흐르고 표출되는 것으로써, 삶을 삶답게 만드는 것이다.
아직도 배우는 87세 할머니 '안나'
▲안나의 몸짓들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여기 이와 뜻을 같이 하는 작품이 있다. 제3회 반짝다큐페스티발 상영작 <안나의 몸짓들>이다. 13분의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 다큐멘터리는 안나라 불리는 학생과 그녀를 돌보는 이들의 이야기다. 흥미로운 건 안나는 1938년생, 올해로 87세의 노인이고, 가르치는 이들은 비교적 젊은이들이라는 점이다. 심찬미 감독은 연출의도를 통해 빌렘 플루서의 자유론을 전한다. 자유롭다는 것과 타인을 위하는 일 사이의 관련을 말한다. 이로부터 이 영화 <안나의 몸짓들>이 출발한다.
영화는 안나라 불리는 할머니가 그리고 색칠하고 쓰는 모습을 담는다. 사인펜으로 난을 치듯 식물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정말이지 한참동안이나 가만히 보여준다. 그 곁에서 활동가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가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할지를 조언하는 모습도 함께 담긴다. 안나와 같은 이들이 그동안 그린 것이 그대로 달력 위 그림이 되고, 다시 그 그림을 따라 색을 칠하는 모습이 또 한참 계속된다.
안나가 활동가들과 담소를 나누고 카메라로 영상을 찍는 방법을 배우는 모습, 그렇게 찍은 장면이 그대로 영화 안에 담기는 순간도 이어진다. 특별할 것 없는 순간들의 연속 뒤로 '안나의 몸짓은 변화하고 있다'는 문구가 드러난다. 영화의 후반부를 채우는 건 영국 전자음악가 에이펙스 트윈의 곡 'QKThr'이 쓰이는데, 숏폼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 곡이 숏폼과는 전혀 다른 형식과 장르를 가진 호흡 긴 다큐에서 들려오는 광경이 그대로 낯선 감흥을 일으킨다.
배움, 변화, 그리고 자유로움
▲안나의 몸짓들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심찬미 감독은 영화제 측에 보내온 연출의도에서 영화가 의도한 것에 대해 요약해 정리했다. 그녀는 "안나의 몸짓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다"라며 "그 안에는 자유가 있고, 배움이 있고, 변화가 있다"고 설명했다. 심 감독은 이어 "나는 그녀의 몸짓들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면서 "이 다큐멘터리는 안나의 몸짓을 따라가는 탐구의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자유와 배움, 변화를 탐구한 기록물로써 <안나의 몸짓들>이 의미를 지닌다는 이야기다. 나를 넘어 남에게 닿는 가르침과 배움, 그것이 표상하는 자유와 그로부터 일어나는 변화, 그 모두를 탐구하고 기록하는 시각이 영화 <안나의 몸짓들>의 본질이라는 뜻이겠다.
가만히 돌아보자면 이것이 어찌 자유인가 싶을 수도 있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란 그저 속박에 반하는 것 정도일 테니 말이다. 자유로워도 세계나 타인에게 관심 없는 인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자유란 외부세계와는 관련 없는 나 자신의 상태라고 말이다.
지방 노인의 고립과 소외에 맞선다
▲안나의 몸짓들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그러나 가만 보면 나이든 노인에게 다가서 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라고, 다시 그로부터 달력을 제작하고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수고로움이 없다면 안나의 몸짓들은 오늘과 같지 않았을 테다. 빌렘 플루서의 현상학적 논의에서처럼 세계를 변화시키고 타인을 위하는 움직임이 없었다면 안나는 영화에서보다 덜 자유로웠을 게 틀림없다.
심찬미 감독은 영화 상영 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를 통하여 영화를 제작하게 된 이유를 전했다. 그녀는 "서울 등 도시에서는 노인세대 분들이 다양한 커뮤니티를 즐기고 춤도 배우러 가고 그림을 배우는 활동도 많이 하는데, 지방으로 갈수록 접근이 어려워지더라"며 "지방 노인세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던 중에 노인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알게 되었는데, 직접 지역으로 들어가 활동을 하고 좋은 선례를 남기면 지방 곳곳의 노인문제가 조금은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안나의 몸짓들>은 본래 장편으로 기획됐다. 영화는 심 감독이 언급한 지방 노인세대 문화소외 문제에 맞서는 여러 예술가들의 작업 가운데서 한 에피소드를 추려 뽑아올린 단편이다. 심 감독은 "지금 다큐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인데, 시간제한도 있어서 편집을 연습해보고 싶었다"면서 "<안나의 몸짓들>에서는 빌렘 플루서의 <몸짓들>을 보며 영감을 받은 것도 있어서 몸짓, 그러니까 그림을 통해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가 연결되고 통합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고 소개했다.
한 관객이 수많은 노인 중 안나를 택한 이유와 만남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대해 심찬미 감독은 "저희가 하는 그림그리기 교육에 특별히 열심히 참여해주시는 몇몇 어르신이 있다"면서 "안나가 그 분들 중 한분이었는데, 다 같이 안나의 집에 밥을 먹으러 놀러갔다가 갑자기 그림을 그리겠다고 해서 그림을 그리고 만든 달력을 보는 장면을 아카이빙으로 찍은 것이고, 나중에 보니 참 의미가 있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심 감독은 이어 "안나가 그림을 그릴 때 정말 재밌어하는데, 새롭게 배우는 배움이 자유롭다고 느껴졌다"며 "이 작품이 35분정도나 됐는데 좋은 몇몇 장면들이 있었지만 안나의 몸짓이 아니었기 때문에 힘들게 덜어내고 15분으로 최종본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반짝다큐페스티발포스터반짝다큐페스티발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87세 학생과 젊은 선생님, 고립된 지방 노인의 해방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