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에 빠진 아빠와 그 빚을 감당하는 엄마 사이에서, 자신만의 자리와 감정을 고민하는 딸의 이야기'
영화 <아빠는 경마꾼>의 로그라인, 즉 한 줄짜리 줄거리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리 새로울 것 없어 보인다. 여느 가족드라마, 흔한 이야기일 것만 같은 이 영화가 달리 보이는 건 한 순간이다. 바로 다큐멘터리라는 거다.
다큐가 무언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장르, 연기가 아니라 출연자의 실제 모습 그대로를 찍어 만든 영화다. 말하자면 경마에 빠진 아빠는 실제 아빠이고, 그 빚을 감당하는 엄마도 실제 엄마다. 자신만의 자리에서 고민하는 딸까지 더해졌으니 이건 그대로 어느 가정의 문제를 고스란히 담아낸 영화다. 물론 여기까지라면 요즈음 갈수록 막장화되는 TV프로그램과 얼마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정보를 더하면 어떨까. 바로 딸이 다큐를 만든 감독이라는 사실이다.
▲아빠는 경마꾼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딸이 직접 찍은 경마중독 아버지
<아빠는 경마꾼>은 제3회 반짝다큐페스티발에서 각별한 인기를 모은 다큐다. 모두 27편의 한국 작품이 출품된 가운데, 유달리 인기를 끈 몇 작품 안에 이 영화가 들었다. 취향도, 지향도 제각각인 다큐인들, 또 영화제를 찾은 영화애호가들에게 하나같이 좋은 평가를 받아든 건 영화에 그를 뛰어넘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었을 테다. 솔직함과 용기, 그리고 열정. 어느 다큐에도 중요한 그 덕목들이 <아빠는 경마꾼>에 선명히 자리하고 있다는 게 그 비결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딸 '혜진'은 아빠 '제경'이 경마에 빠져 가족을 괴롭히는 것이 싫다. 끝까지 경마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제경 때문에 더 괴로운 엄마 '옥란'. 혜진은 제경을 바라보며 '왜 가족을 힘들게 하는 사람과 우리는 같이 살고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고, 오래 전부터 꾸준히 이어오던 제경의 경마 인생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아빠는 경마꾼>의 시놉시스는 읽는 것만으로도 독자를 긴장시킨다. 가족의 문제는 명확하다. 경마에 빠져 가족을 괴롭히는 아빠다. 지난 수십 년 간 경마를 해온 아빠는 그로 인해 재정적 피해까지 상당히 일으켰으면서도 경마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 날이면 날마다 쌈짓돈을 챙겨 경마장에 가서 배팅을 하는 아빠는 딸에게도 엄마에게도 커다란 시름 덩어리다.
▲아빠는 경마꾼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제 가족의 치부 그대로 내보이는 감독의 결단
조혜진 감독은 제 가족의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한 편의 다큐로 제작했다. 22분에 이르는 단편 다큐는 그대로 가족의 치부를 드러낸다. 경마를 하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도리어 화를 내는 아빠, 가진 돈을 다 잃고서 잔뜩 기가 죽어 술에 절어드는 아빠, 그러고도 다시 돈이 생기면 경마장에 가길 반복하는 아빠. 말이 통하지 않고 삶을 죽여가기만 하는 아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며 감독이기에 앞서 딸인 조혜진이 바랐던 건 무엇일까.
영화는 조혜진 감독이 제 가족, 그중에서도 아빠에게 카메라를 들이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빠는 언제부터 경마를 했는가. 그 유구한 역사 속에서 경마를 멈추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빠에게 경마는 어떤 의미인가. 또 가족은 무엇인가. 엄마는 어째서 아빠 곁을 지키는가. 그 모든 고생을 감내하면서까지. 그와 같은 물음과 그 답은 이 영화 <아빠는 경마꾼>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영영 드러나지 않고 덮여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감독은 엄마로부터 아빠가 경마에 빠져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자연스레 그녀는 제 아빠를 무시해왔다고도 했다. 가장으로서 가계를 꾸리는 일에 책임을 지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재정적인 피해까지 입혔기 때문이겠다. 작게나마 사업체를 운영하며 한 때는 꽤나 돈을 만졌다지만, 돌아보면 그 돈이 죄다 경마에 들어갔다고 했다. 날이면 날마다 경마장을 찾은 아빠는 이제 노동으로 돈을 버는 일을 하찮게 여길 지경이다. 경마로 얻을 수 있으리란 일확천금, 좀처럼 현실화될 일 없는 그 기대를 놓지 못하여 오늘과 미래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게 영화 속 아빠의 모습이다.
▲아빠는 경마꾼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고통의 전시 너머 아빠에게 다가서는
영화는 그저 사실관계를 나열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아빠를 판단하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만약 그러했다면 저기 문제 많은 가족을 출연시켜 고통포르노 비슷하게 연출하는 TV프로그램들과 차이가 없었을 테다.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아빠를 이해하려 든다. 그저 그의 행동의 이유를 그 입을 통해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혹은 전문가를 등장시켜 쉬운 진단을 듣는 대신, 그와 동행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듣는다.
딸은 엄마의 딸이면서도 아빠의 딸이기도 하다. 아빠가 가장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할 뿐, 딸에게 인간적으로 못할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딸과 아빠의 소통이 순간순간 이뤄지는 건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딸이 아빠를 이해하는 순간이 빚어질 때면 조혜진 감독은 제 엄마에게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술회한다. 아빠의 잘못과 엄마의 감내 사이에서 딸이 취해야 하는 자세는 무엇일까. 딸은 어떻게 제 부모를 대해야 할까. <아빠는 경마꾼>은 그대로 제 가족과의 관계를 더 성숙하게 이끌고자 하는 딸의 분투기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흥미롭게 보았다는 <아빠는 경마꾼> 최대의 매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문제의 근원인 아빠, 또 아빠의 캐릭터다. 그는 어느모로 보아도 가정을 힘들게 하는 인물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엄마와 딸을 아끼는 남편이자 아버지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경마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가정을 괴롭게 하지 않을 법한 인물인데, 어찌됐든 현실은 모두를 힘들게 하는 못난 사람으로 전락해 있는 것이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를, 또 그가 벗어나려 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관객은 그로부터 생각하게 된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경마라는 종목 자체가, 그에 돈을 걸고 잃고 따도록 하는 일이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도 같다. 그렇다고 경마를 이 세상에서 뿌리 뽑는다 해도 다른 무엇이 그 자리를 채우지 않겠느냐는 물음이 바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회는 경마중독자를 적극적으로 양산하고 있는가, 그를 막으려고 충실히 노력 하고 있는가, 그와 같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반짝다큐페스티발포스터반짝다큐페스티발
고민과 우려 끝에 다다른 적절한 거리
딸은 제 아버지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그를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몰아붙이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로부터 관객에게까지 나름의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다만 영화가 철저히 개인적 차원에 맴돌며 사회적 의제로까지 나아가지 않는단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엄마의 모습 또한 인터뷰를 통해 드러날 뿐이지 일상이며 현실적 어려움으로 깊어지지 못한다. <아빠는 경마꾼>이 그 소재며 태도에 비해 충실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이는 역시는 아빠 조제경씨가 되겠다. 조혜진 감독은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를 전하는 게) 걱정이 되긴 했다"면서도 "출연동의서를 가지고 엄마랑 아빠랑 부엌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아빠가 '무조건 찍으라'고 '남는 건 영상밖에 없다'고 하셨고, 엄마는 싫어하시긴 했지만 아빠만이라도 보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찍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아빠의 적극적인 태도가 영화가 나올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영화 속 아빠의 태도가 쉽게 바뀐 것은 아니다. 감독은 "(처음 영화에 들어가며) 저는 제가 아빠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서 "성인이 되고나서야 아빠가 경마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빠를 정말 싫어했는데, 촬영도 다니고 경마장도 가보고 하면서 보니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 한가득이더라"고 털어놨다. 그녀는 이어 "촬영하며 이 영화를 어떻게 방향성을 잡고 가야하는지 감이 안 왔고 걱정이 많았다"면서 "모든 가설이 깨진 결과물"이라고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어려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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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