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것이 참 묘하다. 지나간 것의 기록이 곧 역사라면 공정해야 할 텐데, 어느 것은 널리 알려지고 다른 것은 좀처럼 돌아봐지지 않는 때문이다.

일제가 한국에 저지른 만행은 우리의 역사가 되지만, 우리가 베트남에서 자행한 민간인학살은 얼마 조명되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역사의 민낯이다. 관동대지진 뒤 일본에서 이뤄진 조선인 색출과 학살은 또한 만보산 사건 뒤 조선에서 일었던 소위 화교습격 및 학살 사건과 얼마나 닮았는가. 그러나 한국은 하나는 주요하게 다루면서 다른 하나는 애써 못본 척 하니, 눈 뜬 이들은 이를 두고 역사가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의 징표로 여기는 것이다.

어디 국경을 건너서만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까. 한 사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역사가 조명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 그러나 기억하고자 하는 것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가려 기억하려는 욕구가 공동체 안에서도 작용하는 때문이겠다. 역사를 쓰고 향유하는 방식이 이처럼 필요와 욕구에 따라 달라지는 곳이라면, 조명할 것이 조명되지 않고 비추지 않을 것이 비치는 일 또한 비일비재할 테다.

어느 날, 여름에게 스틸컷
어느 날, 여름에게스틸컷반짝다큐페스티발

한국이 기록하지 않는 역사

제3회 반짝다큐페스티발 출품작 <어느 날, 여름에게>는 한국이 애써 외면해온 한 줄기 역사를 조명하는 작품이다. 명소희 감독의 30분 남짓 단편 다큐멘터리는 감독이 '여름'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우리 사회가 기록하지도, 기억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되새긴다. 가상의 편지와 실재했던 존재의 맞물림이 자아내는 독특한 감상이 이 단편 다큐의 형식을 이루는 가운데, 한국사회가 우리 가운데 약한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왔는지를 돌아보도록 이끈다.

감독은 우연히 지난 2004년 있었던 한 여성의 사망이야기를 접한다. 감독과 나이가 같았던 여성은 2004년 당시 자신의 두 아이에게 남기는 편지를 두고서 춘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가 죽은 소양로엔 과거 장미촌이라 불리는 집창촌이 있었다 했다. 성매매 여성들이 모여 있던 이 곳에서 성매매 노동자로 일했고 마침내 스스로 죽은 이 여성의 편지가 감독으로 하여금 결코 개별적이지 않은 비극에 주목하도록 이끌었다.

유서엔 '언젠가 나와 같은 인생의 비관자가 없는 세상을 바란다'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그 죽음 뒤 20여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상은 바뀌었는가. 그녀와 같이 삶을 비관하는 이가, 또 성을 착취당하는 여성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가. 세상은 결코 그렇지 못하여서 감독은 직접 카메라를 들고 그녀와 같은 이야기를 수집해나가기 시작한다.

어느 날, 여름에게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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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을 건너 성 착취 여성들을 뒤쫓는

감독은 영화제 측에 보낸 연출의도에서 '그녀들의 역사는 시대마다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고, 대물림 되었다'며 '이 작품은 폭력의 역사 속에서 홀로 외로움을 견뎠을 여성들에 대한 애도의 이야기'라고 규정했다. 영화가 담고 있는 것이 과연 그러해서 그저 집창촌 뿐 아니라 기지촌 여성들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연까지가 한 데 묶여 풀려나오는 것이다.

영화는 죽은 성매매 여성의 마지막 편지 뒤 감독의 평온한 일상을 이어 붙인다. 감독이 어린 아들과 함께 나들이를 하고, 숙제를 돕는 풍경은 우리네 소소하고 안온한 나날과 다르지 않다. 어째서일까. 감독은 그 일상으로부터 성매매 여성이 죽은 춘천 소양로로 떠나온다.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돼 변화를 앞두고 있는 이곳의 풍경들이 차분한 시각으로 비치고 굳게 닫힌 미군기지와 일제강점기의 흔적들이 화면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소양로에서의 편지는 오키나와에서의 일기로, 일본에 강제징용 등의 책임을 묻는 집회로, 오늘 감독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서로 다른 시대, 얼마 다르지 않은 폭력을 잇는 영화의 흐름이 여름이란 계절과 맺는 특별한 관계가 민망하게 싱그럽다.

어느 날, 여름에게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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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당사자가 사라진 뒤를 고민하며

상영 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명소희 감독은 "영화를 처음 만들 때 위안부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실 때마다 '언젠가는 다 돌아가시게 될 텐데 그 다음에 우리는 할머니들의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기억해야할까'를 고민했다"면서 "모두가 다 떠나고도 지난 이야기를 다큐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나를 경유해서 다시 말하기'라는 방식을 선택했고 내 목소리를 통해서 그들을 이야기하는 게 의미 있지 않을까 결론을 내려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명 감독은 마주한 적 없는 대상을 찍는 과정의 낯섦에 대해서도 전했다. 그녀는 "그동안 제게 다큐는 어떻게 진실을 담을 것인가도 중요했지만 현실을 얼마나 왜곡하지 않아야 하는가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작업을 하면서는 '현실을 왜곡하고 왜곡하지 않고'보다도 어떻게 진실에 다가갈 것인가, 어떻게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기존의 틀을 깨나갈 것인가 이런 것들이 더 중요했다"며 "그 사람들의 삶을 한 번도 보진 않았지만 열심히 상상하려고 했다"고 전했다.

소양로와 미군 기지촌, 일본군 위안부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가 명 감독이란 매개를 통해 한 작품을 이루는 영화다. 개별적 사연을 관통하는 공통점 있는 폭력성을 드러내는 게 영화의 주요한 부분이었을 테다. 세 개의 개별적 사연을 하나로 묶어내는 힘이야말로 이 영화의 성패를 가를 지점인 이유다.

이와 관련해 명 감독은 "세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특수성에서 시작해서 영화가 끝났을 때는 서로의 이야기가 엮여 있는 게 목표였다"며 "결국에 왜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대물림하고,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흡수할 수밖에 없는가를 말하고 싶었는데 보는 입장에서 그 이야기가 섞이고 전염되었다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춘천부터 서울과 오키나와라는 서로 다른 공간에 대해서도 명 감독은 "결국 도시 공간의 구분도 나중에는 모호해져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서 "주제를 하나의 큰 문장으로 만들라고 한다면 '그래도 살아간다'는 게 남는 하나의 진실일 것 같다"고 강조했다.

반짝다큐페스티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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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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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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