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시인 폴 부르제의 유명한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한국에선 폴 발레리의 명언으로 잘못 유통되고 있다) 문장은 참으로 진실하다. 인간이 다층적 사고를 하는 수준 높은 존재인 것 같지만, 막상 뜯어보자면 저만의 철학과 사상을 단련하는 대신 하루하루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경우가 훨씬 많아서다.
물론 모든 이가 그런 건 아니다. 성실하게 사고를 단련하고 철학과 사상을 쌓아 올려 그에 맞는 선택을 내리는 이도 드물게는 있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초입이라고 굳게 믿는다. 결코 쉽지 않은 삶의 방식, 그를 알기에 폴 부르제도 저와 같이 쓴 것이었을 테다.
▲오늘도 걸어! 지구인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일상을 달리 보게 하는 의심하는 태도
의심은 생각의 비결이 된다. 왜? 어째서? 이래도 되나? 하는 물음들이 인간을 더 나은 사고로 이끈다. 일상을 달리 보고, 문제를 들추어내고, 더 나은 해법을 찾는 과정이 우리의 해묵은 문제를 해소하는 출발점이 된다.
불행히도 이는 피로한 일이다. 일상 가운데 끊임없이 의심하고 사고하는 이를 마주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그리하여 사고할 줄 아는 이들일수록, 의심하고 사고하며 적극적으로 제 사상을 단련시켜 가는 소수의 사람이 반갑다.
제3회 반짝다큐페스티발 선정작 <오늘도 걸어! 지구인>이 꼭 그런 작품이어서 반가웠다. 10분이 조금 넘는 짤막한 다큐멘터리는 애니메이션을 적극 활용한 독특한 작품으로, 우주복을 입은 행성인이 지구인을 찾아 지구에 왔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현실을 빗댄 판타지적 설정으로 제 주변의 민낯을 다큐영화로 까발리는 민감함을 일부 해소하려 드는 선택이었을 테다. 영화는 꽤나 전격적으로 감독 자신이 다니는 교회 집단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며 이야기를 펼친다.
▲오늘도 걸어! 지구인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애니와 실사, 다큐와 판타지의 결합
전혜빈 감독의 다큐는 애니와 실사를 절반쯤 뒤섞어 전개된다. 광장에서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 사이에 섞인 감독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지구인 친구를 찾아 나선 우주복 입은 행성인의 이야기를 애니로 풀어낸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며 펼쳐지는 이야기 가운데 애니가 곧 감독 자신의 이야기란 걸 모두가 짐작할 수 있지만, 영화는 그와 같은 설정을 포기하지 않고 밀어간다. 감독은 어째서 스스로를 지구인이 아닌 행성인이라 하는가, 행성인은 지구인 친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은 그대로 10분짜리 단편 전체를 휘감는 화두가 된다.
전혜빈 감독은 영화의 주제를 짤막하게 풀어낸 로그라인으로 "친구들은 어떤 지구인과는 친해지길 꺼려한다"며 "'나'는 소문의 지구인을 찾아 길을 떠난다"고 적었다. 이는 그대로 작품의 주된 설정을 드러내는데, 제 친구들이 꺼리는 지구인이 존재하며 이들이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그대로 영화의 주된 이야기임을 천명한다.
스스로가 개신교 모태신앙이라는 감독은 "성경은 서로를 사랑하라는데, 교회는 누군가를 배척했다"며 "하나님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 이리저리 떠도는 나 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담았다"고 작품의 연출의도를 소개했다. 개신교의 신,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감싸고 함께 나아가는 일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어째서 오늘의 교회는 그를 이루지 못하는가가 곧 영화 전체를 감싸는 화두가 된다.
▲오늘도 걸어! 지구인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낮은 자에게 다가선 예수의 삶처럼
영화 초반 카메라가 비추는 감독의 가방엔 온갖 장식물이 달렸다. 아이돌그룹 굿즈부터 세월호 침몰참사 유족이 직접 건넨 소품 등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감독이 그대로 표현된다. 그 모두가 그대로 관심이며 애정이 될 것인데, 그와 같은 마음이 제가 가장 가까이 두고 있는 집단 가운데서 좀처럼 어우러지지 못하다는 게 이색적이다. 모태신앙으로 몸담아온 교회 공동체가 품지 못하는, 혹은 품으려 들지 않는 존재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감독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왜 아닐까. 개신교가 신적 존재로 추앙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그러하지 않은가. 예수는 온 생애에 걸쳐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취급을 받던 이들 곁에 선 이다. 사람이 묵는 방 한 칸 구하지 못하고 외딴 외양간 말 구유에서 태어난 그는, 당대 낮은 직업 중 하나였던 목자들에게 그 탄생을 경배받는다. 당시로선 사람들이 꺼리던 세리와 창녀, 죄인과 병자들에게 다가가 신앙을 전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하는 예수의 일성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성경> 속 명문으로 남았다.
그러나 현실이 어디 그러한가. 작은 자, 못한 자, 더러운 자, 가까이하기 꺼려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곁을 내주는 이가 세상 가운데 채 한 줌이 되지 않는다. 교회라고, 신앙인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다.
편의점만큼이나 많은 교회가 번성하는 이 나라 한국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다가가지 않는 교회, 또 신앙인의 모습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이가 있는 건 당연하기까지 하다. <오늘도 걸어! 지구인>이 그리는 게 꼭 그와 같다. 감독 스스로가 그래서 전혜빈은 직접 카메라를 들고 교회 바깥으로 나아가길 선택하는 것이다. 10.27 한국교회 연합예배, 성소수자 부모모임, 광화문 복판에서 벌어지는 집회가 모두 그런 장소다. 현장에서 사람들과 만나 살아 있는 이야기를 직접 보고 들으며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되새기는 것, 그건 그대로 건강한 신앙인이 되기 위한 걸음이 된다.
▲반짝다큐페스티발포스터반짝다큐페스티발
좋은 신앙인을 넘어 좋은 지구인 되기
<오늘도 걸어! 지구인>은 그저 신앙인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구인 사이에 섞이지 못하는 행성인이 되어, 지구인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콘셉트가 판타지적 설정 아래 드러난다. 지구인의 못난 모습을 그에 어떤 감정도 갖지 않은 외부자의 시선으로 들추어내 색다른 감상을 자아낸다.
영화 상영 뒤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전혜빈 감독은 지구인과 행성인을 나눈 설정에 "제가 어느 단체에 소속감을 느끼고 오래 있던 적이 없는 것 같다"며 "친구가 해주었던 이야기 중에 이 땅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물에 사는 사람처럼 떠다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이 영화의 제목도 그래서 그렇게 됐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내가 어디에 속해야 할지 모르고 내 생각이 맞나 틀리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나는 이런 방식을 통해서 살고 있는데, 모두가 그냥 그대들의 방식대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전 감독은 이어 지구인과 행성인 사이 '외계인의 침공'이란 설정을 중간에 삽입한 이유에 대해서도 풀어놓았다. 그는 "현장에서 연행예배가 일어나는 걸 틈타 외부에서 들어오는 다른 세력이 있다는 게 확 와닿는 순간이 있었다"며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정치적이나 선동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침략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커서 이를 외계인 소행이라 표현했다"고 강조했다.
작품에서 애니를 적극 활용한 이유에 대한 언급도 나왔다. 전혜빈은 "1차 편집본에서는 저의 분노, 답답함이 속절없이 다 드러났다"며 "그런 방식이 보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 수 있고, 너무 날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되게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여러 현장에 가서 (교회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들이, 그 가설들이 깨지는 모습, 답답함을 풀어내는 장면을 교회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컸지만, 그건 저의 마음일 뿐이고 다른 사람들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사람들이 보기 쉽게 만들어보자는 마음에서 고민하던 중 애니메이션이 서로 다른 집단 간에 장벽을 좀 없애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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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모태신앙 감독이 교회 밖으로 카메라 들고 나간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