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드라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 사인 처음 해 봐."

6월 29일 방송된 tvN <미지의 서울> 마지막 회. 엄마(장영남)와 함께 전세 계약서를 작성하게 된 미지(박보영)가 살포시 웃는다. "도장을 파야겠다"는 엄마의 잔소리도 아랑곳없이 이름과 서명란에 이름을 두 번 쓰는 미지. 그녀는 아직 서명란에 적어 넣을 사인이 없다.

어떤 서른

 드라마 <미지의 서울>의 한 장면
드라마 <미지의 서울>의 한 장면tvN

서른다섯 살 배우 박보영이 동시에 연기한 쌍둥이 미지와 미래는 서른 살이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 어쩌면 가장 좋은 나이. 적당히 경험도 쌓였고, 이런저런 사람도 만나 봤으며, 개인적인 상처나 좌절도 겪어봤음 직한 나이, 서른.

다른 한편으로 꽃다운 나이라는 스물넷에서 고작 6년을 더 살은 서른. 그 정도 경험으로 세상 살기는 험난하고, 인간관계는 맺을수록 어렵고,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자꾸 되묻게 되는 나이, 서른.

그건 서울에서 대학 나와 번듯하게 직장 잘 다니는 미래나 고향에서 각종 알바하고 백수처럼 지내며 엄마와 지지고 볶는 미지 모두에게 주어진 절대적이면서 평범한 조건이다. 거칠게 한쪽은 정상성을, 다른 한쪽은 타자성을 상징한다. 이분법적으로 구분 짓기엔 머쓱하지만 어쨌든 이 쌍둥이의 처지가 '상반'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상황인 건 분명하다.

미지와 미래, 이 쌍둥이가 각자 역할을 바꿔 생활한다는 다소 독특한 설정을 내세운 <미지의 서울>이 6월 29일 종영했다. 방영 중후반 이후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댓글 상에서 '인생 드라마' 인증 릴레이가 이어졌다.

'다층적이고 놀라운 이야기에 우울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적인 묘사가 더해져 모든 캐릭터가 완벽하게 살아 숨 쉬는 드라마에요.' - cathlin-15337

'올해 최고의 한국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요(...). 훌륭한 스토리 라인도 많고, 연기도 최고예요. 재밌는 드라마와 반전으로 가득 차 있어요. 진심이 담겨 있고, 치유가 되지만, 때로는 슬프고 극적이기도 해요. 연출이나 음악에 대해서도 불평할 게 없어요. 모두 훌륭해요. 드라마에 필요한 모든 걸 다 갖췄어요.' - koelko

평점 8.5를 달리고 있는 IMDB 내 <미지의 서울> 리뷰의 일부다. K-드라마의 두터운 해외 팬층과 그들의 열정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됐다. 하지만 <미지의 서울>이 넷플릭스를 통해 '발굴'되리란 사실을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도 아니었고, 익숙한 '로코'물도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러한 예상을 비웃듯 <미지의 서울>은 공개 2주 만에 공식 집계에서 넷플릭스 글로벌(비영어) 시리즈 톱3에 안착했고, <오징어게임> 시즌3이 공개된 지금까지 OTT 순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서도 톱10을 유지 중이다. 말 그대로 '올해의 발견'이 맞다.

작품 안쪽을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 신기하다. 드라마가 뭐라고 자꾸 위로를 건네려 든다. 딱히 감정 뱀파이어 마냥 영상과 음악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쓰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된다. 그만큼 미지와 미래가 처한 상황이, 통과해 온 과정이, 이들과 이들을 둘러싼 인물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대하는 시선과 태도가 공감이 가서일 테다

미지는 미래가 어릴 때부터 아픈 게 싫었다. 딸바보였던 아빠는 일찍 돌아가셨다. 엄마는 미래만 챙겼다. 미래는 공부도 잘했다. 잘하는 게 없던 미지는 점심시간 매점으로 뛰어가다 체육선생에게 '발견'된다. 잘하는 게 생겼다. 육상 유망주가 됐지만 그것도 오래 못 갔다. 삼 년을 방안에 틀어박혔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린 할머니(강월순)가 아니었다면 방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거다. 이후 동네에서 별의별 알바 생활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서른이 됐다.

미래는 추락 일보 직전이다. 서울에서 홀로 견디던 직장 생활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버팀목이 됐던 선배는 퇴사했고, 그 선배를 도우려다 궁지에 몰렸다. 자신의 오지랖이 싫고, 회사와 끝까지 싸우지 못한 자신이 싫었다. 이런 고민은 쌍둥이 미지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간신히 떠올린 도피를 꿈꿨다. 3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입원하면 피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걸 미지가 알아채고 구해준다. 보다 못한 미지가 각자 역할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흔치 않은 드라마

 tvN <미지의 서울>
tvN <미지의 서울>tvN

할머니 강월순(차미경)는 말한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고. "오늘은 살아"라고. 할머니는 사고로 육상을 접은 손녀가 세상 끝났다는 듯이 방안에 틀어박혔을 때 끝까지 문을 두드렸던 장본인이다. 이제는 요양원 신세가 된 할머니를 지극히 보살피는 손녀는 그래서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가자"라고 주문을 건다.

이처럼 <미지의 서울>은 온통 사랑하는 이에게, 아끼는 이에게 손을 내밀라는 당부로 가득 차 있다. 내민 손을 알아채라고, 밀어내지 말라는 당부. 또 그게 버티기 힘든 일상을 살아내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어줄 거라는 도닥임.

드라마 전체가 영화 <굿윌헌팅>의 명대사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로 이뤄졌다고 할까. 그걸 <미지의 서울>은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라는 할머니의 위로로 대신한다. 값싼 위로나 동정, 혹은 위무나 자위가 아닌 삶에 대한 긍정이고 통찰이다.

물론 미지와 미래, 그리고 주변인물들의 삶이 녹록한 건 아니다. 누구나 상처와 상실을 경험하고 간직한다. 자기 때문에 아프고, 세상 사람들이 공격하며, 가족 눈치도 봐야 한다. 미지의 이웃집 첫사랑인 이호수(박진영)는 어릴 적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었고, 몸도 불편해졌다. 호수의 새엄마인 염분홍(김선영)은 그런 호수를 키우느라 정작 본인 가족과는 등을 져야 했다.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도 썩 좋은 편이 아니다. 할머니는 홀로 엄마를 엄하게 키웠고, 엄마는 그런 엄마가 야속했다. 그런 엄마는 딸들을 홀로 키워야 했고, 미래는 아팠다. 미래의 서운함이 커간 연유다. 결국 미래와 미지가 (할머니만 아는) 역할극을 벌이면서 이들은 서로의 속내를 알아가며 급기야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준다. 전작 광주 5.18을 다룬 <오월의 청춘>으로 호평받았던 이강 작가의 의도 그대로다.

"타인의 삶은 참 단순하고 쉬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저 외모였으면, 저 조건이었으면, 저 성격이었으면… 그러나 막상 누군가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아픔과 고난을 가진, 그저 행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애쓰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비로소 사랑과 연민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 이강 작가 기획의도 중

마음이 아파 본 사람들은 안다. 미지처럼 방 문을 열고 밖을 나가는 것조차 사치라는 걸. 또 미래처럼 가족에게, 쌍둥이에게조차 고민을 털어놓으려 손을 뻗치기 힘들다는 걸. 그리고 그때야 세상 사람들도 나처럼 아프고 아파봤을 것이란 상상력을 좀 더 쉽게 발휘하고 공감대를 형성한다. 손을 내미는 것도 경험해 봐야 쉬운 게 인간이다.

삼 년이나 방문 밖을 나가지 못한 등장인물들은 그처럼 어딘가 하나씩 아픈 속내를 감추고 산다. 가까운 사이여도 또 그걸 모르고 산다. 미지와 미래처럼, 고교 동창이자 라이벌이며 지금은 직장 내 상하관계로 얽힌 염분홍과 엄마 김옥희처럼.

변호사 호수와 딱 부러지는 선배 이충구도, 미래와 썸을 타게 되는 한세진(류경수)와 할아버지도, 미래로 인해 방 문밖을 나서게 되는 선배도 모두 그렇게 얽히며 살아간다. 인물들이 그런 속내를 알아가게 되는 <미지의 서울>은 그래서 자연스레 치유의 드라마가 된다. 사건의 한 축을 담당하는 시인이자 식당 주인 김로사(원미경)가 영혼의 단짝이자 파트너를 잃게 되는 과정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의 세상은 너를 만나 노래하기 시작했다. / 바람이 새를 데려가듯 너는 나를 시로 이끌었다. / 나의 노래 나의 바람/ 나의 사월"

후반부를 장식하는 이 시야말로 <미지의 서울>의 주제를 웅변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노래가, 시가 인생이고, 너와 내가 그 인생의 주인공이다.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과거 장면을 환기하는 <미지의 서울>은 갈수록 성찰의 드라마가 된다.

인물들은 반복적으로 과거 행동을, 자기 말을 곱씹는다. 내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는지, 내 말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헤아린다. 또 그걸 장면과 대사를 통해 계속해서 회고한다. 단순한 회상 장면이 아니다. 미지는 호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되묻지만 드라마가 온통 그런 정서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의 모든 서른들에게, 서른 여성들에게, 앞으로 서른을 통과하거나 이미 통과한 모두에게 그럴 수 있다고, 그러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위로와 권유. 그리하여 상대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장면이 유독 눈에 띄는, 제목 타이틀인 '미지의 서울'을 드라마 끝의 끝에서 '나의 서울'로 바꾸는 드라마. 이런 드라마 흔치 않다.

 tvN <미지의 서울> 주연 박보영 배우
tvN <미지의 서울> 주연 박보영 배우tvN


미지의서울 박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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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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