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이 지난 2024년 9월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베테랑2'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자료사진).
연합뉴스
사건을 해결하고 밤늦게 귀가한 서도철(황정민) 형사, 퉁퉁 부은 눈을 한 채로 라면을 끓여 먹는다. 이어 방을 나와 냉장고 문을 여는 아들 우진에게 도철은 "어차피 부은 얼굴이라 라면 먹고 붓는 건 티도 안 나"라며 라면을 권한다. 그 중학생 아들도 학폭과 경찰 아버지로 인해 사건에 휘말렸다 얼굴이 말이 아니다. 라면을 한 젓가락 뜬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도영은 머쓱한 듯 이런 말을 내뱉는다.
"아빠가, 생각이 짧았다."
지난해 752만을 동원한 류승완 감독 <베테랑2> 속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4분여에 달한다. 선잠이 들었던 아내(진경)까지 동참한 한밤의 가족 라면 파티 장면은 확실히 사족이 맞다. 실제 그런 평가가 적지 않았다. 그와는 별개로 과장을 좀 보태자면 이 사족은 <베테랑2>의 가장 주목할 장면 중 하나다. 작품 안팎으로 드러나는 어떤 세월의 흔적, 그리고 피로감 때문이다.
류승완의 페르소나 서도철은 피곤하다. 1편과 달리 2편은 본인으로 인해 사건이 꼬이고 또 꼬인다. 게다가 본인의 안일한 대처로 아들까지 사건에 휘말리며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첩첩산중이다. 하지만 가장이다. 일도 잘 해내야 하고 아빠로서 역할도 다 해야 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잘못을 반성까지 한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1편은 선과 악 대립구조가 명확했다. 성룡의 전성기 영화를 보는 듯한 쾌감이 만만치 않았다. 그로부터 9년이 흘렀다. 서도철은 여전히 나쁜놈들 잡는데 거침이 없지만 위치와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후배들을 챙겨야 하는 입장이고, 도무지 대화가 안 통하는 아들까지 건사해야 한다. 그렇다고 범죄자들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설상가상 경찰 후배라는 놈이 미쳐 날뛴다. 그러니 직업인이자 생활인으로서 우리네 여느 가장들처럼 심신의 피로가 누적될 수밖에.
류승완 감독도 피곤할 때가 됐다. 2000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해 장편 영화 만들기만 25년. 동세대 다른 감독들이 드라마로, 넷플릭스 시리즈로 눈길을 돌릴 때 영화라는 한 우물만 팠다. 장편 영화만 10편을 완성했다. 다양한 장르에 천착한 그 작품들은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흥행에 성공했다. 류승완만큼 장인정신을 숙성하며 소처럼 일한 감독도 드물다. 드물게 혹한 평도 받곤 했지만 그건 대중영화를 창작하는 예술가들이 끌어안아야 할 숙명일 터.
<베테랑2> 마지막 장면이 눈에 쏙 들어온 건 서도철의 그 피로감이, 직업인으로서의 프라이드가,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류승완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란 짐작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빠가 생각이 짧았다"는 반성은, '계속해서 영화를 더 잘 만들고 싶다'는 쑥스럽지만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속내의 영화적인 표현이 아닐까.
그래서 서도철의 피로감을 번역하자면 장편 데뷔 25년을 넘긴 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관록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 속내와 관록을 제대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될 예정이다. 오는 7월 3일부터 13일까지 열리는 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집행위원장 신철, 이하 BIFAN) 'B 마이 게스트: 외유내강' 섹션을 통해서다.
BIFAN에서 만나는 류승완의 관록
▲영화 <짝패> 스틸 이미지.
CJ엔터테인먼트
올해 BIFAN은 매년 관객과 특별한 소통을 시도할 수 있는 게스트를 초청하는 'B 마이 게스트'를 통해 '외유내강'이 제작한 류승완 감독의 <짝패>와 <모가디슈>, 이상근 감독의 <엑시트>를 상영한다('외유내강'은 '류'승완 감독이 부인인 제작자 '강'혜정과 이끄는 제작사다).
"앞으로 내려 올 일만 남았죠."
<짝패> 개봉 즈음 '짝패'인 정두홍 무술감독이자 주연배우와 함께 인터뷰 자리에서 만났던 류 감독. 극찬을 받았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후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 대작전>, <주먹이 운다>를 통해 액션 영화 감독으로 각인됐던 그에게 "<짝패>가 정두홍 무술 감독과의 액션 정점이 아니냐"고 묻자 돌아온 너스레였다. 진지하게 이런 말도 했다.
"저는 항상 저라는 사람을 통해서 레퍼런스(기준점)를 끄집어내려는 것 같아요. 저는 좋아하는 영화만 반복해서 보는 사람이라 영화광, 영화 키드라고 불려요. 그런 점에서 결백해요, (<짝패>는) 우리 스스로 힘에서 뭔가를 해내려는 결정체이거든요."
성룡 영화를 비롯해 레퍼런스들을 대해 묻자 돌아온 짐짓 정색하는 답이었다. 당시 류 감독은 <짝패>를 두고 "모든 지점에서 현실과 장르가 충돌"하는 영화이자 "모든 것이 담겨 있으면서 어떤 것도 아닌 영화"라고 설명했다. 자신감이 넘쳤다. "정두홍식 싸움 스타일"을 "마틴 스콜시즈의 카메라 워킹으로 포착을 해"냈고 "편집은 샘 페킨파 스타일로 했"다고 부연했다. 영화 키드다웠고, 혈기왕성했다. <짝패>라는 영화 자체가 활력이 펄펄 넘쳤다.
그로부터 15년 후, <모가디슈>를 선보인 류승완 감독의 명성은 내려올 일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 사이 액션이란 굴레를 넘어 다채로운 장르에서 장인의 면모를 뽐냈던 류 감독은 <모다디슈>를 통해 더 이상 영화 키드일 수 없는 절정의 관록과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애정, 민족과 국가, 가족을 아우르는 본인만의 철학을 영화 전편에 드리우는 연출력을 확인 받았다.
특히 <짝패>와 <모가디슈>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영화 키드임을 자임하던 류 감독이 자국민과 가족과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남북 외교 당국자들이 1991년 소말리아 내전 상황에서 생사를 건 탈주를 시도하는 서사를 완숙하게 만들었다는 상징성 측면에서 말이다. 류승완 감독의 과거 표현을 살짝 빌려오자면 <모가디슈>는 영화 키드에서 장인이, 가장이 된 어른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외유내강 20년, 류승완의 25년
▲영화 <엑시트> 스틸 이미지.CJ ENM
BIFAN과 외유내강이 세 편의 상영작 중 하나로 이상근 감독의 <엑시트>를 선정한 것도 충분히 유의미해 보인다. 2019년 여름 개봉해 930만 관객을 동원한 <엑시트>는 이상근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감독은 류 감독의 조연출 출신이다.
충청도 출신인 류 감독의 한 박자 비트는 묘한 웃음 포인트나 초기작에서 두드러졌던 마이너한 정서, 장르에 대한 이해도와 과하지 않은 이상근 감독의 연출은 외유내강이 보여준 지향점을 근사하게 닮아 있었다. 또 <엑시트> 속 조정석이 연기한 주인공이 취준생 백수라는 설정도 여름을 겨냥한 코미디 재난 영화에 그치지 않고 청년세대에 대한 응원가와 같은 의미를 부여해줬다.
장르영화를 통해 현실과 장르를 충돌시키는 류승완 감독과 강혜정 대표, 두 짝패가 후배 감독과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상의 하모니이자 결과물이었다고 할까. 마침 외유내강의 차기작은 오는 개봉을 앞둔 이상근 감독의 신작 <악마가 이사왔다>다.
섹션 명이 'B 마이 게스트'인데 외유내강 식구들이 빠질 리 없다. 류승완 감독은 오는 7월 6일 부천시청 어울마당에서 열리는 메가토크 '창립 20주년 외유내강, 그리고 지금'에 참석해 강혜정 대표는 물론 <모가디슈>를 함께한 배우 조인성과 나란히 관객들과 소통에 나선다.
외유내강의 지난 20년간의 여정을 되짚어보며 주요 작품 제작 뒷이야기와와 창작 철학,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라고 한다. 조인성, 박정민, 박해준, 신세경이 출연하며 이미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준비 중인 류승완 감독의 차기작 <휴민트>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어질 듯하다.
최근 CGV는 외유내강 창립 20주년 기획전을 진행했다. 류승완 감독 영화를 포함해 대표작 18편을 상영했다. 그러고 보니, 국내 어느 국제영화제도 류승완 감독 특별전을 '아직' 개최하지 않았다. 국내 유일의 국제 장르 영화제라 할 수 있는 BIFAN이야말로 언젠가 열릴 류승완 감독 특별전 무대로 제격일 듯 싶다. 이번 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B 마이 게스트: 외유내강' 섹션은 그 맛보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베테랑' 류승완 감독의 영화인생 25년, 그 속내가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