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절해고도>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3.
크게 두 지점으로 나눠볼 수 있는 이 작품의 전반부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각기 떨어져 있던 섬들이 존재성을 잃고 표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나마 서로가 연결되어 있던 작은 제방이 모두 무너지고 난 이후의 모습이다. '절해고도'라는 말의 본뜻이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영화의 현재를 지나가 머리를 밀고 출가하여 도맹이라는 법명을 얻은 행자가 되고 난 이후 다소간의 시점으로 읽고자 한다.) 이어지는 후반부에서는 일련의 과정을 겪은 섬들이 이전과 다른 방법을 찾는 과정이 그려진다. 감독의 말을 빌려오자면,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 길을 가는 것을 지켜보는 우리 마음'에 해당한다. 관계의 회복과 자생에 대한 최소한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일이다.
영화는 몇몇 지점에서 이야기의 일부를 등 뒤로 감추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차 안에서 죽은 듯한 모습으로 발견되는 윤철의 모습이 담긴 다음 신에서 행자가 된 지나의 모습이 바로 등장하는 장면은 그 중 하나다. 특히 이 지점의 전환 사이에서는 직전에서 설명한,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반드시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생략된다. 딸의 출가를 인정하고, 세속의 혈연관계가 아니라 불도에 따라 서로 예를 갖추고 존대하며 신뢰하는, 이전과는 다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필요했을 과정이다.
윤철이 지나의 문제로 학교에 다녀온 다음, 카페에 앉은 두 사람은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생략된 장면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주로 딸에 의해 주도되는 날 선 시간에는 두 사람이 서로 닮아 있다는 사실이 개입된다. 예술가를 꿈꿨지만 그 바람을 이룰 수 없었던 윤철과 같이 자신도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어렴풋한 의심과 두려움이다. 이혼하고 나면 전업 작가로 살겠다더니 아직까지 인테리어 업자로만 전전하는 아빠가 딸의 마음에 못마땅한 이유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지나치게 공격적인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 역시 그 좌절감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정확한 하나의 섬이 되지 못하는 것,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04.
"포기하지 않으셨잖아요. 안 버리고 지켜봐 주셔서 감사하죠."
보통 혼자가 되는 일은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오랫동안 작가로 활동하고도 업계에 아는 사람이 없다는 윤철을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부터가 그랬다. 하지만 오롯한 섬이 되는 문제는 다르다. 서로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고, 언젠가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긍정적 의미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모든 인물이, 이번에도 역시 떠나게 되지만 처음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남기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도맹을 돌보던 금우 스님(박현숙 분)이 수행을 위해 미얀마로 향하고, 재발한 암 투병으로 힘들어하던 영지도 수도원으로 떠나고, 마지막으로 도맹 역시 계를 받아 스님이 되기 위해 암자를 떠나더라도 더 이상 윤철이 머무는 섬 하나가 척박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김미영 감독 또한 그런 인물들의 변화를 프레임 속에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시간의 선형에 따라 이야기를 이어 나가지 않더라도 사건의 전후를 이해하는 데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도록 나름의 근거를 마련하는 작업. 마치 하나의 오롯한 섬처럼 영화의 중요한 장면이 다른 부수적인 움직임이나 배경으로 시선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애를 쓰는 일. 그리고 배우들의 숨소리, 작은 동선 하나에도 긴 대사로도 다하지 못할 말들을 빼곡히 심어 놓는 일 등이 여기에 속한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감독의 흔들리지 않는 의지 하나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는 뜻은 그런 것이다. 이 영화 <절해고도>가 꼭 그렇다.
▲영화 <절해고도>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5.
"어느 해에 바닷가 절벽에 올랐다. 김밥을 먹으면서 건너편 섬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러 사건이 있었고, 소설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섬이었다. 우리 둘이 함께 갈 날은 없을 것 같았다. 올 수 있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둘이 함께 그 섬을 보며 이야기하고 그날의 날씨를 감탄하고 그 절벽에 같이 올랐다가 다시 내려온 것으로 그날이 기억되었다. 섬은 눈앞에 있었지만 멀었다."
외로운 섬이 아니다. 이제 오롯한 섬이 된다는 의미는 아스라이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지만, 그 거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됨을 말한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리라는 믿음과 어디에선가 서로가 얇고 가느다란 실로 이어져 있다는 마음을 통해서다. 언젠가 함께 보낸 시간과 추억이 그 날실과 씨실이 되어 끊어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장력을 일으켜낸다. 다시 돌이켜보니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 자신만의 고민과 선택 속에서, 이 땅이 다음 계절을 향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내 안의 작은 '절해고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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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