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나의 작은 인형 상자> 발표 이후 정유미 감독은 줄곧 독립애니메이션 영역에서 분투했다. 대학에서 회화과를 전공한 것도 고등학생 때 우연히 본 퀘이 형제(Quay Brothers)의 작품 영향이었을 정도로 애니메이션에 진심이었다. 그런 그가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초청으로 신작을 들고 세계 관객들과 만났다. <먼지 아이>(2009) 이후 16년 만이다.
제78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안경>은 시력검사를 받는 한 여성이 자신의 내면을 탐험하고 바라보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영화제 상영 일정을 마친 뒤 <안경>은 정유미 감독의 7분 분량의 신작 <파라노이드 키드>와 함께 현재 메가박스에서 상영 중이다. 현재 부산에 거주 중인 정유미 감독을 24일 오후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안경 자체가 일종의 프레임"
▲애니메이션 영화 <안경>과 <파라노이드 필름>을 연출한 정유미 감독.
정유미
두 작품은 모두 피폐해진 삶을 두고 그 원인을 찾는 캐릭터들의 태도가 인상적이다. <파라노이드 키드>는 정 감독의 여타 작품과 달리 내레이션이 들어갔다. 자기감정과 현재 상황을 자조적으로 고백하는 목소리를 배우 배두나가 맡았다. 이 작품이 자기애가 결여된 자기 고백이라면 <안경>은 그것을 직시하고 극복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독립된 작품이지만, 주제 의식에서 연작인 셈. 특히 <안경>은 패션브랜드 '김해김'의 김인태 디자이너가 직접 협업을 제안해 탄생했다. 애니메이션계의 칸영화제로 불리는 자그레브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연애놀이>(2015)를 본 김 디자이너가 정유미 감독에게 직접 연락해 성사된 경우였다.
"처음엔 광고처럼 김해김에서 제시하는 이야기를 토대로 짧은 영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논의 과정에서 아예 제 작품을 하는 식으로 해달라고 하시더라. 등장하는 주인공이 김해김의 옷과 소품만 착용해도 된다기에 제가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파리에서 공부하실 때 제 작품을 우연히 보고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시더라. <연애놀이> 속 남자 주인공 캐릭터를 자기 프로필 사진에 한동안 넣고 다닐 정도였다고.
저도 이야기를 구상하면서 해당 브랜드의 이미지를 보는데 연결점이 많았다. 아시아적이면서 프랑스적인 선이 강조된 디자인이 많았는데 제 작품의 초현실적이면서 약간 과장된 면이 비슷했다. 제가 옛날 걸 좋아한다. 해외여행을 가도 빈티지 시장, 벼룩시장을 꼭 가거든. <안경>에 나오는 거리도 19세기 파리 길거리를 형상화한 거다. 옛날에 나온 물건들은 실용성보단 장식의 의미가 강했잖나. 그 목적을 알 수 없는 게 참 재밌다. 제 작품에 담긴 느낌도 그런 느낌이 담겼으면 했다."
안경점인지 제3의 장소인지 알 수 없는 상점, 그리고 시력검사대에 그려진 작은 집으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외부와 구분된 내면을 탐험하는 여정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모호성을 이미지로 나름 형상화 한 것이다. 정유미 감독은 "제가 최근에 한 작품들이 대부분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였다"며 "안경 자체가 일종의 프레임이자 대상을 보는 시각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주인공이 안경을 맞추러 가니 안경점이겠거니 싶겠지만 특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부 물건이 다 천으로 덮여있는데 주인공이 오니까 천을 걷었고, 그곳에 시력검사장치가 있었잖나. 다른 손님이 다른 목적으로 왔다면 점주는 그에 맞는 물건을 보여줬을 것이다."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애니메이션 영화 <안경>의 한 장면.정유미
<안경>을 얘기하려면 사실 <파라노이드 키드>부터 짚어야 했다. 메가박스에서 <안경>의 개봉을 결정했을 때 정유미 감독은 <파라노이드 키드>도 함께 상영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자기애와 자존감이라는 주제 면에서 서로 강하게 이어지는 데다가 시간 들여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한 작품만 보고 가는 게 면구스러운 이유도 있었다.
"<파라노이드 키드> 속 그림은 20대 중반일 때의 것이다. 제 대부분 작업들이 자기애라는 모티브에서 많이 시작되는데, 그때 당시 블로그에 끄적이며 올린 내용들이 있다. 어떡하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나 그 질문을 해왔는데 참 어렵다.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 같다. 그땐 스스로의 못난 모습을 잘 없애고 가려서 괜찮은 사람이 되자는 생각이었는데, 이젠 내 상태를 수용하고 그것대로 사랑하는 길로 가려는 편이다. 그래야지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전까진 외부 세상에서 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면 반대로 이젠 내 어둠으로, 내가 두려워하는 쪽으로 들어가서 받아들이는 쪽으로 하고 싶다.
블로그에 올렸던 그림들을 보고 출판사에서 연락을 주셔서 책으로 냈는데 막상 결과물을 보니 뭔가 아쉬웠다. 내 감정의 조각들이니까 그랬던 것 같다. 이걸 어떻게 연결해서 의미를 만들어낼지 몰랐던 것이다. 언젠가 이을 수 있는 중요한 이야기가 떠오르면 다시 그려보고 싶다고 다짐했는데 작년에 그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건 배우 배두나가 목소리 연기에 참여한 과정이었다. "성우보단 배우가 좋겠다 싶었고,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했던 배두나님과 해보고 싶었다"며 정유미 감독은 "다양한 작업에 열려 있다는 말을 믿고 연락을 드렸는데 해주신다는 답이 왔다"고 전했다.
"배두나 배우님이 가진 톤이 완전 여성적이지도 않고, 한 사람이 보이는 톤이랄까 그런 게 있었다. 제가 대사나 내레이션을 넣은 적도 없고 배우 연출도 안 해봐서 처음 녹음 때 긴장을 엄청 했다. 배우님도 수줍음이 있었는데 소탈하시기도 했다.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역시 프로는 다르구나 싶었지(웃음).
처음엔 우리 나이대인 40대로 연기를 부탁드렸는데 감정이 무겁게 다가오더라. 30대에서 20대, 10대 후반으로 어려지게 됐는데 그게 좋았다. 지금의 주인공 목소리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다. 배우님께서 해석을 정말 잘해주셨다."
"독립 애니메이션 더 어려운 게 사실"
20년 가까이 독립 애니메이션 창작자의 길을 걷고 있는 정유미 감독에게 꾸준함의 비결, 그 원동력을 물었다. 수많은 창작자들이 국내외 무대에서 빛을 내고 있지만 여전히 열악한 제반 환경인 현실이다. 거기서 버틴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존중받아야 할 일이지 않을까.
"그냥 애니메이션도 쉽지 않은데 독립 애니메이션은 더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하시는 분들이 있다. 저도 30대 중반에 고향인 부산에 내려와서 7년간은 작업을 안 한 시간이 있었다. 환경의 변화로 작업이 힘들던 때였다. 근데 결국 하는 게 좋다는 걸 깨달았다. 상업이 아닌 독립 애니는 좀 더 자유롭게 실험할 수도 있고, 제가 여전히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기도 하다. 시장 자체가 없기에 개인 작업에 가깝다. 좀 더 미술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주변에 그림 그리는 친구들도 있는데, 그런 걸 감내하면서 오랜 시간 작업해오고 있다. 좀 더 이 장르를 긍정적으로 봐주셨으면 한다.
제도 면에서도 상업 애니메이션에 비해 독립 쪽은 지원이 축소돼왔다. 실용성만 따지면 사실 할 말이 없어진다. 상업 작품만 남는 것이니 말이다. 그 상업 작품이 있게끔 하는 게 바로 독립 애니메이션의 다양성 때문이다. 그 가치를 제도적으로 지원해주길 바란다."
정유미 감독은 언젠가 적당한 때와 이야기가 나온다면 장편 애니메이션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상업 애니메이션과는 좀 거리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제 작업을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상업성을 노리고 할 순 없을 것 같다"며 "제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더욱 나아가야 하지 않나 싶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 꾸준함의 비결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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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16년 만에 칸 영화제 초청" 독립 애니메이션 지킨 감독의 뚝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