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스콰치 선셋>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인적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늘 안개가 자욱한 원시림에 4명으로 구성된 사스콰치 가족이 살고 있다. 성인 남성 2, 여성 1, 아직 어린 1로 구성된 이 가족은 매일 먹을 것을 찾고 밤이 되면 단출한 임시거처를 지어 비바람을 피하는 나날을 반복한다. 먹을 것 걱정 별로 하지 않고 비교적 평화롭게 지내는 듯하지만, 이 가족에겐 소소한 일상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영화는 이 괴짜 가족의 사계절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는다. 인간의 발길이 아직 침입하지 않은 거대한 숲에서 이들은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벌렁 드러눕는다. 성욕이 치밀면 노천 섹스를 감행한다. 그렇다고 난교를 일삼지는 않는다. 서로 애정이 있어야만 관계도 가능하다. 강제에 의한 관계는 단호히 거부한다. 성비 불균형과 맞물려 이는 가족 내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다. 정조 관념은 그들이 인간의 형상을 닮은 짐승이라기보단, 분명히 일정한 지능과 판단력을 가진 존재임을 확인시킨다.
인간이 찾지 않는 숲이기에 그들 주변엔 숲의 또 다른 구성원인 야생동물만 출몰할 뿐이다. 다른 동물들은 사스콰치 가족이 벌이는 천태만상 행각을 관전하는 구경꾼 관객 역할을 도맡는다. 뿔이 근사한 사슴, 작은 고추가 맵다는 예시를 보여주는 거북, 반려로 사랑받는 스컹크와 호저, 애완동물 되길 거부하는 오소리, 여기에 불길한 기운을 불러오는 까마귀나 체구 건장한 사스콰치에게 몇 안 되는 위협적인 존재, 퓨마 등이 가깝고 먼 이웃들이다.
인간의 친척답게 비록 그들의 의사소통을 온전하게 해석할 순 없어도 대강은 감이 잡힌다. 생존본능만 있는 게 아니라 욕망과 쾌락, 연민을 느끼는 존재라는 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환각 버섯이나 발효된 열매를 먹고 민폐 진상 노릇을 일삼기도 하고, 괜한 심술을 부려 다른 가족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낯선 물체에 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선보인다. 취하면 만용을 부리다가 봉변 당하고, 장난기가 큰 화근을 부르기도 한다. 동료의 비극에 슬퍼하고, 그들만의 리듬감으로 감정을 전하거나 멀리 있는 가족과 원거리 통신을 이어갈 수도 있다,
사스콰치 가족의 다채로운 생태가 계절의 변화와 조응하며 차례로 소개된다. 물론 야생의 삶, 은둔자의 시간이 마냥 평화롭고 순탄할 리 만무하다. 가족이 감당하기 힘든 슬픔도, 공동체의 명맥을 기약할 경사도 차례로 교차하며 그들과 보는 이 모두 들었다 놓았다 한다. 그런 가운데 오랜 세월 자신들만의 고즈넉한 종족 역사를 이어온 사스콰치에게 원하지 않은 파도가 밀려들기 시작한다. 그들로서는 이해되지도, 납득할 수도 없는 낯설고 위험한 변화 앞에서 과연 사스콰치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과 닮은 '괴물'
▲<사스콰치 선셋>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사스콰치 선셋>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관객의 예상과 기대를 무너뜨리는 영화다. 하지만 '도그마'에 갇힌 장르 영화 팬을 자처하는 이들에겐 이 작품이 선사하는 파격은 기대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당연히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사스콰치가 야밤에 튀어나와 애꿎은 여행자를 갈기갈기 찢어발겨야 한다는 닳고 닳은 설정의 사슬에 스스로 꽁꽁 매여 있다면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화면 속 세계를 창조한 감독과 소통하고 대화해 '발견'의 기쁨을 찾는 게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것'에 영화가 맞춤형이기만 요구하는 '소비자주의' 발상이 팽배하면 벌어지는 경우다.
근래에 비슷한 사례를 들자면, 21세기 좀비 장르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던 < 28일 후 > 대니 보일 감독이 20여 년 후에 선보인 속편 < 28년 후 >를 향한 국내 관객의 혹평 세례를 들 수 있겠다.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된 3부작에 관한 기대치와 반비례하는 반응은 유독 한국 관객에게서 엿보이는 특징이다. 관객은 < 28일 후 >가 선보인 '달리는 좀비'에 열광하고, 마치 1인칭 게임처럼 한때 '인간'이었던, 하지만 이젠 피에 굶주린 짐승이 된 좀비를 살육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이 쾌감을 느끼며 폭력성에 중독되길 자처한다.
그런 이들의 기대를 따르자면, 마땅히 시리즈 신작은 그런 자극을 한층 더 극대화하는 형태가 되어야만 한 것이다. 하지만 < 28년 후 >는 좀비라는 소재를 활용한 성장물이자 21세기 영국과 세계의 모순을 은유하는 거대한 세계관의 첫걸음 성격이 명확하다. 그러니 감독의 의도와 관객 상당수의 요구가 완전히 번지수가 너무 달랐다. 물론 관객 개별로 보고픈 방향을 제시할 수 있지만, 전작의 확대 복제판만 내라면 이건 '시장의 검열', '소비자의 횡포'가 될 위험을 높이는 행태다.
<사스콰치 선셋>은 통상적인 장르영화와 차별화된 접근법은 물론, 전개 형식에서도 사뭇 온도가 다르다. 근래 국내 장르물 팬에게 보증수표로 군림하는 <유전>, <미드소마>,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아리 에스터가 총괄제작, 지명도 있는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와 카일리 키오가 사스콰치 슈트에 특수분장 감수하며 출연한 사실에 혹해 극장을 찾은 이들은 무척 낯선 영화와 마주한 현실에 당황할 테다.
물론 '저세상 바이브'로 혼신의 홍보를 펼친 수입배급사 마케팅은 일정하게 영화 속 사실을 담은 게 맞다. 특유의 병맛 개그도 맛깔나게 구현된다. 그러나 해당 포인트가 <사스콰치 선셋> 제작 의도나 초점은 아니라는 확신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확연히 드러난다. 마치 BBC나 내셔널 지오그래픽 산 자연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것처럼 영화는 사스콰치가 실재한다면 어떤 일상을 보일까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를 이 영화를 통해 얻게 될 테다.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장르물 틈새를 비집고 나온 파격적 변주
▲<사스콰치 선셋> 스틸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고작 그게 대수냐? 반문할 이들에게 역으로 질문하자면, 사스콰치 혹은 빅풋이란 존재를 지금껏 대중문화가 어떻게 소모해 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미지의 존재는 유사과학과 가십 사이에서 실제로 만약 존재한다면 마땅히 가져야 할 접근법과 정반대로 안 좋은 방향으로만 다뤄진 셈이다. 실제로 인로의 조상 혹은 친척이 멸종 위기 속에서 힘겹게 파괴되는 자연 속에 명맥을 간신히 유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확한 생태와 현황은 어떤지부터 밝히는 게 우선일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온당한 방식을 채택해 여타의 조잡한 사스콰치 괴물영화와 차원이 다른 경지에 도달한다.
그런 개성 덕분에 영화는 보고 난 다음 오랫동안 몇몇 잔상이 오래도록 기억에 새겨질 법하다. 어쩌면 누군가는 유인원이 주역인 전설적 시리즈를 연상할지도 모른다. 세계 곳곳에서 사멸해가는 오지의 소수민족, 또는 '살아 있는 죽은 동물'이라 해도 무방한 지속 가능성이 붕괴한 멸종위기종에 관해 느끼는 애잔함을 우리는 이제 사스콰치에게도 동일한 감정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은 늘 틈새에서 튀어나오는 법이다.
<작품정보>
사스콰치 선셋
Sasquatch Sunset
2024|미국|코미디, 어드벤처
2025.07.02. 개봉|88분|15세 관람가
감독 데이비드 젤너, 나단 젤너
제작 아리 애스터
출연 제시 아이젠버그, 라일리 키오, 나단 젤너, 크리스토프 자야츠 데넥
수입 / 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사스콰치 선셋> 포스터㈜스튜디오 디에이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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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