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킬 미 나우> 공연 사진
연극 <킬 미 나우> 공연 사진연극열전

삶과 죽음, 장애, 돌봄, 안락사 등 묵직한 주제 의식을 이야기하는 연극 <킬 미 나우>가 지난 6일 개막해 관객과 만나고 있다. 장애를 가진 '조이'를 보살피기 위해 작가의 삶을 포기한 아버지 '제이크'를 중심으로, 조이를 함께 돌보는 제이크의 여동생 '트와일라', 제이크의 연인 '로빈', 조이의 활동을 지원하는 '라우디'가 <킬 미 나우>를 함께 완성한다.

2013년 캐나다의 극작가 브래드 프레이저가 발표한 연극으로, 한국에는 2016년 처음 소개됐다. 그 과정에서 지이선 작가가 각색을 맡았는데, 현재 국내 관객들에게 사랑 받는 여러 대사들과 '오리'라는 상징물이 모두 지이선 작가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번 공연은 2019년 삼연 이후 6년 만에 이루어졌으며, 초·재연을 진행했던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다시 공연된다.

매 시즌마다 제이크를 연기했던 이석준이 이번 공연에서도 같은 역을 맡았으며, 초연 당시 이석준과 더블 캐스팅된 배수빈이 9년 만에 제이크를 다시 연기한다. 최석진·김시유·이석준이 아들 조이를 연기하고, 전익령·이지현이 로빈을, 이진희·김지혜가 트와일라를, 허영손·곽다인이 라우디를 연기한다. 공연은 8월 17일까지 이어진다.

장애를 다루는 가족 드라마

"나한텐 심각한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어. 나한테 '나'는 없어."

제이크는 장애를 가진 아들 조이를 보살피기 위해 촉망받던 작가의 삶을 포기한다. 사고로 아내를 떠나보낸 뒤 제이크는 조이를 보살피는 데 전력을 쏟는다. 위 대사는 이런 제이크의 삶을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자조적인 대사다. 하지만 대사 중 "심각한 장애를 가진"이라는 표현을 소거하더라도 문장은 성립한다.

<킬 미 나우>가 그려내는 이야기는 비단 장애가 있는 가족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평범한 가족의 일반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이크는 자식을 위해 자기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한 부모의 전형을 보여준다. 제이크는 '제이크'로 존재한다기보다 '조이의 아버지'로 존재한다.

부모는 자신의 꿈을 접어두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 부모의 꿈은 자식의 꿈으로 대체되고, 자식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면 부모는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놓는다. 자신의 삶을 포기한 대가가 자식의 행복한 삶이라면 부모는 수긍한다.

그러나 제이크의 경우처럼 장애아를 둔 부모는 사뭇 다르다. 조이가 성장할수록 제이크는 각종 어려움에 봉착하고, 이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보통의 부모가 자식의 나은 삶으로 보상을 받는다면, 제이크는 보상은커녕 포기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킬 미 나우>를 가족 드라마로 이해함과 동시에 장애 가족의 특수성을 조명해야 하는 까닭이다.

돌봄에 관해 생각해볼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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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의 고모이자 제이크의 동생인 트와일라도 조이의 돌봄에 가담한다. 연극 중반에 이르러 제이크의 건강도 악화되는데, 이때 트와일라는 조이와 제이크를 동시에 돌봐야 하는 이중적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 필자는 트와일라를 통해 '돌봄'이라는 키워드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트와일라는 컴퓨터 회사에 다니는 번듯한 직장인이다. 직장에서 돈벌이를 위한 노동을 마쳤다고 해서 트와일라의 노동이 끝난 건 아니다. 제이크와 조이를 돌보는 또 다른 노동을 시작해야 한다. 흔히 임금을 위한 노동을 '생산 노동'이라 부르고, 임금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생산 노동을 위해 반드시 전제돼야 하는 돌봄 등의 노동을 '재생산 노동'이라고 부른다. 트와일라는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을 한꺼번에 짊어져야 하는 이중적 부담을 안고 있다.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을 모두 수행해야 하는, 쉽고 구체적으로 말해 직장에 다니면서 가사 노동도 해야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여성이다. 여성에게 편중되는 돌봄 부담 역시 <킬 미 나우> 속 트와일라를 보며 생각해볼 지점이다.

트와일라도 제이크처럼 '나'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트와일라는 오빠 제이크에게 "제이크의 삶을 살라"고 권하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도 '트와일라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러다 극의 후반에 이르러 트와일라는 조이의 활동을 지원하는 라우디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라우디는 트와일라에게 "가장 기뻤던 적이 언제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이런 질문은 트와일라로 하여금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생각해보게 한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존엄의 눈물

<킬 미 나우>는 장애라는 묵직한 소재를 다루는 가족 드라마인 동시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존엄한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제이크의 병세가 악화되는데, 이때부터 이어지는 제이크의 삶은 결코 온전한 삶이 아니다. 혼자 할 수 있는 게 점점 줄어들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버겁다. 글을 쓰지도 못한다. 극중 대사를 빌리자면 제이크는 "사라져가고 있다".

빛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제이크와 조이의 삶을 보며 온전한 삶, 존엄한 삶을 생각해보게 된다. 아버지 앞에서 조이가 거론하는 '안락사' 역시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다. 바로 이 순간, <킬 미 나우>는 또 하나의 묵직한 주제인 안락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객석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객석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킬 미 나우>는 굳이 따지자면 슬픈 이야기지만, 이때 필자와 관객들이 흘린 눈물이 슬픔의 눈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흘린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닌 존엄함 앞에 흘린 눈물이다. 존엄을 갈망하는 극중 인물들의 희망이 존엄했고, 존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들이 치는 발버둥조차도 존엄했다.

한편 작품명이기도 한 '킬 미 나우(kill me now)'는 조이가 즐기는 게임에 등장하는 말이다. 조이는 게임을 하며 이 말을 따라하곤 했는데, 어눌한 발음 탓에 아버지 제이크에겐 "힐 미 나우(heal me now)"로 들렸다. 어쩌면 '힐 미 나우'가 마음의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킬 미 나우"가 아니라 "힐 미 나우"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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