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킬 미 나우> 공연 사진
연극열전
조이의 고모이자 제이크의 동생인 트와일라도 조이의 돌봄에 가담한다. 연극 중반에 이르러 제이크의 건강도 악화되는데, 이때 트와일라는 조이와 제이크를 동시에 돌봐야 하는 이중적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 필자는 트와일라를 통해 '돌봄'이라는 키워드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트와일라는 컴퓨터 회사에 다니는 번듯한 직장인이다. 직장에서 돈벌이를 위한 노동을 마쳤다고 해서 트와일라의 노동이 끝난 건 아니다. 제이크와 조이를 돌보는 또 다른 노동을 시작해야 한다. 흔히 임금을 위한 노동을 '생산 노동'이라 부르고, 임금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생산 노동을 위해 반드시 전제돼야 하는 돌봄 등의 노동을 '재생산 노동'이라고 부른다. 트와일라는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을 한꺼번에 짊어져야 하는 이중적 부담을 안고 있다.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을 모두 수행해야 하는, 쉽고 구체적으로 말해 직장에 다니면서 가사 노동도 해야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여성이다. 여성에게 편중되는 돌봄 부담 역시 <킬 미 나우> 속 트와일라를 보며 생각해볼 지점이다.
트와일라도 제이크처럼 '나'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트와일라는 오빠 제이크에게 "제이크의 삶을 살라"고 권하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도 '트와일라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러다 극의 후반에 이르러 트와일라는 조이의 활동을 지원하는 라우디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라우디는 트와일라에게 "가장 기뻤던 적이 언제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이런 질문은 트와일라로 하여금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생각해보게 한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존엄의 눈물
<킬 미 나우>는 장애라는 묵직한 소재를 다루는 가족 드라마인 동시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존엄한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제이크의 병세가 악화되는데, 이때부터 이어지는 제이크의 삶은 결코 온전한 삶이 아니다. 혼자 할 수 있는 게 점점 줄어들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버겁다. 글을 쓰지도 못한다. 극중 대사를 빌리자면 제이크는 "사라져가고 있다".
빛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제이크와 조이의 삶을 보며 온전한 삶, 존엄한 삶을 생각해보게 된다. 아버지 앞에서 조이가 거론하는 '안락사' 역시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다. 바로 이 순간, <킬 미 나우>는 또 하나의 묵직한 주제인 안락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객석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객석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킬 미 나우>는 굳이 따지자면 슬픈 이야기지만, 이때 필자와 관객들이 흘린 눈물이 슬픔의 눈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흘린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닌 존엄함 앞에 흘린 눈물이다. 존엄을 갈망하는 극중 인물들의 희망이 존엄했고, 존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들이 치는 발버둥조차도 존엄했다.
한편 작품명이기도 한 '킬 미 나우(kill me now)'는 조이가 즐기는 게임에 등장하는 말이다. 조이는 게임을 하며 이 말을 따라하곤 했는데, 어눌한 발음 탓에 아버지 제이크에겐 "힐 미 나우(heal me now)"로 들렸다. 어쩌면 '힐 미 나우'가 마음의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킬 미 나우"가 아니라 "힐 미 나우"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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