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8년 후> 스틸컷
소니픽처스코리아
03.
이번 작품은 28년 전 생물학 무기 연구소에서 세상을 재앙으로 몰아넣은 바이러스가 유출된 후, 생존자들이 격리된 채로 살아가는 섬 '홀리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그려진다. 이는 직전 시리즈인 < 28주 후 >의 결말을 생각하더라도 별로 다르지 않다. 좀비들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장면에서 영국 섬이 영구적으로 격리되고, 다른 모든 국가는 현재 상황을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하는 상황이 다. 섬의 생존자들 역시 본토의 감염자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고 지키는 방법으로 생존을 이어간다.
스파이크(알피 윌리엄스 분)를 데리고 그의 첫 출정을 나가는 제이미의 모습은 그런 구조적 배경과 앞으로 3부작을 통해 이어질 여러 배경 설정을 관객에게 주입하는 용도로 활용된다. 관례상 14세에서 15세 정도에 처음 제방길을 건너게 되지만, 스파이크는 그보다 훨씬 이른 12살이라는 점. 어떤 상황에서도 구조대는 보내지 않는다는 것. 본토에는 '알파'라는 특별한 좀비 무리가 있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하나. 아무것도 모른 채 본토에서의 위협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던 스파이크가 고립된 섬 내부에도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는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작은 의심은 훗날 먼 곳에서 포착한 작은 불길과 정신이 나갔다고 알려진 의사 켈슨(랄프 파인즈 분)과 연결된다.
두 사람의 출정 장면에는 두 가지 눈에 띄는 편집이 놓인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때때로 치고 들어오는 흑백 푸티지와 기괴한 시 낭송이다. 이 편집은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활용되는데 극의 암울하면서도 공포스러운 환경을 조성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에 해당한다. 이 플롯에서만 등장하는 편집은 신과 신이 서로 침범하며 전후 순서의 거리 차이를 단숨에 좁혀버리는 장면이다. 아직 복귀하지 못한 두 사람과 벌써 환영회라도 열린 듯 파티를 준비하는 사람들, 이제 방조제 위를 내달리는 두 사람과 이미 귀환 영웅이 된 스파이크를 칭송하는 파티장의 모습. 다만, 좀비 무리에게 쫓기고 인육이 난도질 되던 상황에서도 하지 않던 스파이크의 구역질이 이 지점에서 쏟아져 나온다는 설정이 인상적이다. 가장 위험하다고 배워왔던 공간과 제일 안전하다고 느껴왔던 자리가 중첩되는 순간, 의심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04.
영화의 초반부에서 스파이크는 아버지를 거대하고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바라보는 듯하지만, 사실 그의 남성성은 어머니 아일라(조디 코머 분)에 대한 사랑과 헌신에서 비롯된다. 이 작품의 성장이 부자(父子)의 첫 출정이나 좀비 한두 마리를 죽이고 쫓기는 경험으로부터 시작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아직은 여물지 못한 소년의 치기와 반항, 맹목적인 사랑이 더해지며 미친 의사로 알려진 켈슨을 찾기 위해 울타리를 스스로 벗어나는 위험을 자초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이제 12살이라는 설정과 이미 섬 안의 인류는 28년이라는 시간을 갇혀 지내왔다는 사실은 스파이크라는 소년이 어머니와의 동행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세상을 처음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낸다.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부대원 에리크(에드빈 뤼딩 분)도 같은 맥락에서 의미를 가진다. 어느 한 집단에만 매몰되어 있던 소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자신과는 다른 세계, 정확히는 섬 밖에 존재하는 사람이자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지기 이전의 문명을 알고 있는 인물.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자신의 눈으로 목도하게 되는 대상으로서다. 소년이 경험하게 되는 타자의 죽음에 있어 어머니와 다른 결을 갖는다는 사실도 중요한 의미다. 두 죽음의 형태 사이에 의사 켈슨이 말하는 죽음의 형태가 존재한다. 죽음 이후의 모습에도.
▲영화 <28년 후> 스틸컷소니픽처스코리아
05.
이 영화 속에 담긴 성장과 죽음의 자리에 대해서는 그래서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이 이야기 속에는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끼워넣기가 쉬워 보인다. 성장은 도모하긴 어려우나, 말하긴 용이한 단어 가운데 하나다. 강요된 경험은 제대로 된 성장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물론 극 중에 메타포가 차고 넘친다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역시 죽음의 환기를 불러오기 위한 서장에 불과하다고 느끼게 된다. 오히려 스스로 내딛기 시작한 후반부 이후의 행동, 속편에서 이어질 이야기 속에 긍정적이고 정확한 의미의 성장이 도모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에 가장 오래 떠도는 두 장면은 마을 초입 성문 안쪽과 두개골로 쌓아 올린 추모탑이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장면이다. 한쪽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경고와 경계의 대상일 뿐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애도와 추모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살아남는 일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그것만이 추종되는 곳의 추악한 면모를 영화는 그래서 분명히 담아낸다. 마을의 젊은 여성과 바람을 피우는 아빠와 누군가를 살릴 방법이 있지만 찾으려 하지 않는 집단과 생존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눈앞에 보이는 죽음을 감내하는 성벽과 같은 것들이다.
'메멘토 모리, 죽는다는 걸 잊지 말라.'
엄마의 두개골을 첨탑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시키는 일은 그래서 중요한 행동이 된다.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항상 지켜보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행위이자 스스로 다짐하게 만드는 일이다. 극중 인물과 스크린 밖의 관객도 '죽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더 나은 방법이 분명 존재한다'라는 말을 되새기게 된다. 영화적으로는 시작점의 인물인 킬리언 머피가 새 시리즈에 복귀하는 문제, 앞으로 남은 두 작품에서 시리즈가 어떤 성취를 이뤄갈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앞으로 이 영화가 스파이크로 하여금 어떤 죽음을 향해 나아가도록 할 것인가가 유일한 호기심으로 남는다.
06.
영화의 초반부 장면 하나를 다시 생각한다. 아버지 제이미와 아들 스파이크가 처음 마을을 나서던 순간이다. 마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고양된 모습으로 두 사람의 출정을 응원하고 축복한다.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떤 누구도 두 사람을 위해 나서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면 죽음이 확실시되는 길목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아직 돌아오지도 못한 두 사람을 위한 연회를 준비한다. 약속된 제물을 제때 본토에 받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정말 다른 인류에 의해 봉쇄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자신들을 스스로 가두고 격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부자(父子)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도 준비된 연회를 벌였을 것만 같은 위화감이 내게는 척추뼈 채로 뽑히는 머리보다 더 큰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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