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에서 '분신사바', 감독의 이상한 실험

[김성호의 씨네만세 1076] 제3회 반짝다큐페스티발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

새로울 것 없는 아파트 전경을 비추는 화면 위로 인공지능인지 그보다 훨씬 단순한 기술인지 무튼 인간처럼 보이는 인간 아닌 목소리가 저마다의 사연을 읊조린다. 처음엔 동네가 구역이 된 이야기다. 뉴타운으로 지정된 어느 재개발지구, 한때 1,2,3동으로 각각 이름 붙었던 그 동네를 아이들은 2동은 언덕배기, 3동은 테두리쯤으로 기억했단다. 그랬던 이곳이 어느 새인가 몇 구역이냐로 구분되더니 다시 시공사별로 갈려서 '아이파크편'과 '래미안편'이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어딘지 인간적인 듯하면서도 인간적이지 못한 목소리가 동네에 얽힌 제 기억을 풀어내는 동안 카메라는 계속 어느 아파트 전면을 주구장창 찍어낸다. 멈춰 있는 사진 위를 찬찬히 흐르듯 움직이는 듯한 이 카메라는 거의 러닝타임 5분이 다 되었을 즈음에야 갑자기 낯선 움직임을 보이는데, 뜬금없이 줌을 잔뜩 당겨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카메라는 계속 아파트 벽면을 당기고 극단적으로 확대된 영상은 마침내 물상을 뭉개어 더는 인간의 눈으로 인식할 수 없는 무엇을 화면위에 가득히 채워낸다. 옛 비디오캠코더로 찍은 듯 보이는 영상이 실제로 캠코더로 찍은 것인지, 사진을 확대하며 그 위에 소리를 입힌 건지, 또 다른 무엇인지를 도통 확신할 수 없는 가운데 영화는 이내 다음 공간으로 넘어간다.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 스틸컷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스틸컷반짝다큐페스티발

가만히 아파트만 찍는 카메라

제3회 반짝다큐페스티발에서 상영작으로 선정된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 이야기다. 박군제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이번 영화제에선 만나보기 쉽지 않은 실험영화적 성격을 다분히 갖추었다. 무엇이 실험영화인지를 두고 영화인 및 평자며 학자들 간 통일된 정의며 합의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닐 테다.

실험이란 것이 지금은 알지 못하는 것을 미래엔 알기 위하여 불완전한 인간이 택한 방법론일 뿐이고, 그것이 영화의 영역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누구는 실험영화가 영화의 경계며 지평을 탐색한다 하고, 또 다른 이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고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이중 일부만을 이해하고 있을 따름이다.

무튼 러닝타임 22분의 결코 길지 않은 다큐는 여러 아파트로 대상을 옮겨가며 비슷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기계로 빚은 목소리가 제 기억이랄까 생각, 추억들을 꺼내는 와중에, 화면은 아파트 전경을 가만히 보여주다가는, 마침내 줌을 잔뜩 당겨 인간이 간편히 인식할 수 있는 영상을 파괴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터뷰에 충실히 응하는 듯하던 음성 또한 깨어져서 영화를 보는 이는 내가 보는 것이 내게 보여주기 위하여 잘리고 다듬어진 작품인가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 스틸컷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스틸컷반짝다큐페스티발

인공지능 목소리와 아파트의 조우

듣자하면 담긴 사연들은 마치 영화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아파트가 서기 전, 그 이전의 세계 속 기억과 추억, 얽힌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인터뷰를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때문이겠다. 영상 또한 지금 이 순간의 실존을 확신할 수 없도록 옛 질감으로 표현하니, 보는 이는 이것이 현실인지 가상인지, 실재하는 무엇인지 꾸며낸 이야기인지를 알아채기 어렵다.

박군제 감독은 반다페에 써 보낸 연출의도를 통해 "재현된 푸티지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불완전할수록 진실성에 근접한다"며 "현재의 시공간에 대한 감각과 환경에 대한 지각을 지우는 곳,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영화적 세계로의 몰입이라면, 그것을 저해하는 요소들은 오히려 완벽한 디제시스(허구적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함과 동시에 논픽션의 증명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미지의 기계적인 움직임과 전방위에서 속삭이는 소리들, 그리고 VHS화질로 재구현된 20년 전의 심상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재현의 인공성에 대해 사유하여 본다"고 하였는데, 말하자면 영화의 관심이 하고 있는 이야기 그 자체보다 형식적 실험을 통한 가능성의 탐구에 있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 스틸컷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스틸컷반짝다큐페스티발

실험 다큐와 SF장르의 기묘한 접점

영화의 시놉시스 또한 독특하다. "한 차원표류자가 평면-도트(dot)우주에 도달한다"로 시작하는 글은 "초환(招喚)을 통해 이 음성-넋의 뒤섞임이 재생되면서 세계의 부유령이 되고, 그 파형이 세계의 법칙을 비틀어 틈을 연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AI 목소리 자아'라 규정된 데이터 세계의 유령을 마주하는 디지털 우주 속을 표류하는 차원표류자, 세계의 법칙 사이에 열린 틈까지, 무엇도 직관적으로 와 닿지는 않는 이 독창적 세계가 관객 앞에 쏟아진다.

이때 영화의 제목은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선다.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란 이름에서 '도트'는 흔히 아날로그의 상징이라 표현되는 점처럼 읽힌다. 말하자면 신문에 쓰인 글자를 영화에서처럼 끝없이 확대하다보면 마주하게 되는 검고 하얀 점, 이진법의 0과 1처럼 표현을 위한 '최소한의' '유이한' 수단 같은 것이다. 도트들의 세계는 그대로 아날로그, 우리가 지나왔고 치웠으며 잃어버린 옛 세계가 될 것인데, 이는 일정부분 아파트가 세워지기 이전, 단지와 구역 이전의 동네를 떠올리게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뒤에 붙은 '분신사바' 또한 부유하는 생각을 자극한다. 초딩시절 좀 놀아본 애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분신사바란 혼령을 불러오는 주술이자 놀이가 아닌가. 여기서 부유하는 유령들을 초혼하여 그 이야기를 듣는 작업이 이 영화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가 표현하려 의도한 것일까. 무엇도 확신하기 어려운 가운데서 굳이 의미를 찾아내려 분투하는 것은 흔히 성공한 일단의 실험영화가 그러하듯 박군제의 작품 또한 보는 이의 의식을 깨우고 독자적인 사고를 자극하는 때문일 테다.

반짝다큐페스티발 포스터
반짝다큐페스티발포스터반짝다큐페스티발

건설은 정말로 긍정적인가

영화 상영 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박군제는 영화가 태어나기까지의 배경에 대해 약간의 정보를 제공했다. 박군제는 "4년 전 쯤에 <건설 유니버스의 어떤 오류>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가 그 속편"이라며 "'건설적이다'라는 단어가 이 우주에선 긍정적으로 사용되는데, 이 용어가 왜 긍정적으로 사용되는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하게 된 영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콘셉트 자체는 단순하다"면서 "SF적인 소재가 존재하고, 첫 번째는 건설 유니버스였다면 지금은 도트 유니버스가 있는데, 이런 세계에서 무언가를 표현하는 방식은 비이성적인 행동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거기서 적절하게 느껴지는 게 분신사바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이성과 지성으로 이룩했다 믿는 작금의 세계는 수많은 실패 위에 그 실패를 외면한 채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지극히 비이성적인 방식이 도리어 오늘의 실패를 효과적으로 파헤치고 직면토록 하는 도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를 이 이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건 나의 부족한 통찰과 이해 때문이겠으나, 나로서는 도저히 이 이상 나를 던져 표류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제3회 반다페에서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를 택한 건 최대한 다양한 작품을 이 시대 관객 앞에 전하겠다는 의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 영화가 그러해서 적잖은 이들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기존에 영화, 다큐멘터리, 아파트, 재개발, 심지어는 SF와 분신사바에 대해 가졌던 생각까지를 의심하고 돌아보는 계기를 가졌다. 나는 이것이 실험영화가 갖는 대표적 이로움이라 여긴다. 그렇다면 이 영화와 영화제는 이번에도 착실히 성공해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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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