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에 카자흐스탄이란 나라가 있다. 상식 있는 이라면 국명쯤은 들어봤음직한데, 한국과 따로 직접 교류하는 영역이 많지는 않은 탓으로 그 이상의 이야기는 얼마 알려지지 않았다. 세계에서 9번째로 큰 국토를 가진 나라라거나, 튀르키예처럼 영토의 서쪽이 유럽에 걸쳐 있다는 사실 등은 유명할 법도 하지만 아는 이가 드물다.
한국과는 이명박 전 대통령 집권 당시 특별한 인연을 여럿 맺었다. 당시 핵심 정책이던 자원외교의 주요 국가이기도 했거니와 소련 해체 뒤 29년을 집권한 초대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유난히 쿵짝이 잘 맞는 모습을 보였던 탓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퇴임 뒤에도 카자흐스탄이 공식 초청해 현지 한인 기업들을 돌아보는 등의 행보를 이어가기도 했다.
요즈음 카자흐스탄은 말 그대로 변화의 와중에 있다. 앞서 언급한 나자르바예프가 오랜 독재 끝에 사임하고, 2대 대통령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가 집권하며 사회 제 분야에서 변혁과 마주했다. 나자르바예프가 상왕노릇을 한다는 평가도 없지 않았으나 2022년 알마티를 중심으로 사회부조리 개혁을 외치며 일어난 소위 카자흐스탄 시위를 처리하는 와중에 권력을 공고히 했다. 대통령 권한 축소, 정당설립요건 완화 등을 골자로 한 헌법개정은 물론, 러시아의 개입을 축소하고, 카자흐어를 표기하는 공식문자 또한 키릴문자에서 라틴문자로 완전 변경하는 등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나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K-ALMA-Q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한국-카자흐 합작 다큐
제3회 반짝다큐페스티발 첫 섹션에 출품된 작품 가운데 < K-ALMA-Q >가 있다. 도대체 무얼 뜻하는지 알기 어려운 이 영화의 제목을 작품을 보고난 뒤엔 잊을 수가 없다. 감독은 안소정과 라마잔 키르기즈바예프, 좀처럼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한 편의 작품을 함께 찍어냈다.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단편 쇼케이스에서 한 차례 소개된 바 있는 30분이 채 안 되는 단편은 두 감독의 심상이 그대로 담긴 내레이션을 따라 카자흐스탄의 도시 알마티에서의 이야기로 관객을 끌어간다.
시작은 사과다. 알마티에는 사과 동상이 흔히 보이는데, 그건 이 도시가 사과로 특별히 유명한 때문이다. 아포르트 사과란 이름의 품종이 이 일대 특산품이었다는데, 막상 그를 찾아 시장을 다녀볼라치면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알마티란 이름부터가 '사과의 아버지'라는 뜻이라는데, 그 중심에 있어야 할 아포르트 사과는 어째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
시장엔 온통 중국이며 우크라이나 산 사과들이 가득하고, 그나마 아포르트란 이름을 붙인 사과는 너무 비싸 찾는 이가 없다. 황당한 건 카자흐스탄 사람들조차 아포르트 사과가 진짜 아포르트 사과는 아니라고 여긴다는 거다. 그들이 기억하는 옛 아포르트 사과는 이제 어디서도 볼 수 없다며, 그 특징들을 하나씩 더듬어 이야기한다.
▲K-ALMA-Q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왜 사과인가
사과는 이내 카자흐스탄이 처한 산업, 정치상황으로 보는 이를 인도한다. 시장에 사과가 없는 이유, 카자흐스탄 사과가 경쟁력을 잃고 주변 농업강국의 사과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과정, 그 아래 깔린 산업과 정치의 맥락이 차분히 소개된다. 29년을 집권한 독재자 나자르바예프와 2022년 짓밟힌 시위, 그 중심지였던 알마티의 상황이 소상히 언급될 때, 저기 카자흐스탄과 여기 한국 사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공통점과 연결의 지점들이 있단 걸 깨닫는다.
카자흐스탄 출신의 감독 키르기즈바예프는 한국에서 온 안소정에게 제 나라를 잘 소개해 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깨닫는 것이 한국과의 격차다. 한국은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과 철강 등 굵직한 산업을 가진 선진국이지만 카자흐스탄엔 오로지 농산물, 그것도 경쟁력을 잃어가는 것뿐이란 현실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카자흐스탄은 다른 무엇보다 원유와 천연가스 같은 에너지가 경제의 기반을 받치고 있지만, 그 개발이권을 미국 기업이 쥐고 있는 상황 또한 언급된다.
자연히 그 아래 깔린 문제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 이 영화 < K-ALMA-Q >의 흐름이다. 국가는 산업을 국민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육성하지 못하였다. 제조업은커녕 농업마저 과거에 비해 그 경쟁력을 잃었다. 소련 해체 뒤 29년을 독재한 나자르바예프가 다른 누구보다 책임이 클 밖에 없다. 또 오늘의 지도자 토카예프라 해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K-ALMA-Q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한국과 남다른 인연 가진 나라
한국에도 두 지도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서두에 언급했듯 나자르바예프는 이명박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토카예프 또한 문재인 대통령과 연을 맺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국에 국빈 방문한 첫 해외 국가지도자가 토카예프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때 카자흐스탄에 묻혀 있던 홍범도 장군 유해를 봉환해 대전 현충원에 안장한 사실은 한국 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토카예프는 카자흐스탄을 개혁하고 더 나은 미래를 열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그가 추진해온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독립적이며 보다 선진적인 개혁방안에도 불구하고, 토카예프의 발목을 잡을 불안요소가 분명하단 건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2022년 카자흐스탄 시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토카예프는 시위가 크게 일어나자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군대는 그대로 알마티에 진입했다. 돌아보면 러우 전쟁 불과 한 달 전, 러시아군은 작정한 양 강경하게 시위대를 진압했다. 알마티에서만 시민 209명이 죽는 참극이 일어났다. 반정부 시위는 그대로 마무리 됐다. 2022년 대선 당시, 토카예프가 무려 80%가 넘는 지지를 받았음에도 알마티에선 투표율이 고작 20%대에 불과했던 게 이 같은 상황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사라진 사과 아포르트로부터 출발해 오늘날 카자흐스탄이 처한 정치적, 산업적, 문화적 상황을 자연스레 소개한다. 그로부터 오늘의 문제를 향한 감독의 진단, 즉 '질문이 없어서'란 답에 이른다. 어째서 카자흐스탄은 발전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시위는 실패했나. 어째서 시민들은 정치에 깊이 개입하지 못하는가.
▲반짝다큐페스티발포스터반짝다큐페스티발
'콰'자흐스탄이 가진 의미
영화의 독특한 제목은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의미를 발한다. 사과를 뜻하는 'ALMA' 사이에 K와 Q를 둔 것이 그러하다. 표준문자를 키릴문자에서 라틴문자로 변경함에 따라, 'Kazakh' 민족은 'Qazaq' 민족이 된다. 카자흐스탄도 'Qazaqstan'이 된다. 라마잔 키르기즈바예프는 "내 친구들은 새로운 카자흐스탄을 원할 때 의지적으로 Q를 쓴다"고 말한다. K(카자흐스탄)에서 Q(콰자흐스탄)로 나아가는 건 그래서 진보다. 발전이다. 변화다.
그 착상부터 전개, 결말까지가 한국에선 이색적인 작품이다. 그에 따른 설명을 감독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을 밖에 없다. 영화 상영이 끝난 자리,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안소정 감독은 "(작품은) 한국과 카자흐스탄 다큐 프로젝트로 제작하게 됐다"며 "서로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다보니까 영화 초반에도 말했듯이 각자의 나라, 살고 있는 도시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서로의 집 근처에서 잊히고 있는 것이 있는지 질문을 주고 받다가 사과 이야기가 나오고 그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다"고 그 출발을 설명했다.
안 감독은 이어 "그렇게 구성이 결정됐는데, 카자흐스탄에서 사라지고 있는 걸 제가 이방인으로서 카자흐스탄에 가서 목격한다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며 "몰랐던 나라일지라도 가서 여행자로만 남는 게 아니라 각자의 나라에 구멍을 내면서 서로의 자리를 만들고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작업했다"고 부연했다.
시위장면을 영화에 상영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고민이 따랐다. 카자흐스탄이 여전히 지난 독재, 또 권위주의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할 수가 없는 때문이다. 안 감독은 "시위장면으로 인해 카자흐스탄 내부에서는 상영이 어려운 상황이다"라며 "시위장면을 구성할 때도 어떤 방식으로 써야지 이 친구들(카자흐스탄 감독과 스태프)한테 피해가 가지 않을지를 우선적으로 고민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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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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