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내 이슬라믹지하드 등 무장조직을 상대로 한 가자지구 공세가 어느덧 600일을 넘어 이어지고 있다.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호언장담했던 휴전은 연장은커녕 심지어 이란과의 확전으로 이어졌다. 지난 3월 중순 재개된 공격 뒤에만 팔레스타인인 4000명 가량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 발발한 전쟁 총 사망자는 5만 명을 훌쩍 넘긴다.
주지하다시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은 뿌리 깊다. 오늘의 이스라엘, 유대민족의 염원이던 제 조상의 땅에 저들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이른바 '시오니즘' 운동이 현실화되며 팔레스타인인들이 살던 땅에 유대인들이 집단 이주하고 유대공동체들을 건설한 게 그 시작이다.
좁은 땅에 급격한 이주가, 그것도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이주가 집중적으로 이뤄지며 민족 간, 종교 간 갈등이 폭발했다. 2차대전 나치에 의해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민족의 단결, 또 이 일대를 통치하던 영국 식민당국의 무책임한 태도의 결과로써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분쟁이 싹튼 것이다.
▲사월의 마지막 날들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막무가내 이스라엘의 한 세기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인 팔레스타인 땅이다. 지중해 서안을 끼고 남서쪽엔 이집트가, 동으로는 요르단, 북으로는 레바논과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종교며 산업, 에너지와 각종 이권이 맞물린 복잡한 정세는 이 일대 정치와 외교를 더욱 불안케 한다. 유대국가 이스라엘은 국방력에 집중해 저를 지키려 든다. 대칭과 비대칭을 막론하고 압도적 군사력을 확보하고, 첩보와 공작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고도 불안은 멈추지 않으니, 무엇보다 영토가 비좁고 그마저도 팔레스타인과 공존해야 한다는 게 문제의 근원이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주도로 이뤄진 보여주기식 협정은 뿌리 깊은 갈등을 해소할 수 없는 수준으로 꼬아놓았다.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맺은 오슬로협정으로 팔레스타인은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라는 두 정착촌을 얻고, 이스라엘의 점령과 관리, 개입 정도를 정한다. 그로부터 지난 30여 년 간 팔레스타인을 대하는 이스라엘의 전략은 확고했다. 서로는 가자지구, 동으로는 웨스트뱅크라 불리는 두 정착촌에 대해 가자는 봉쇄와 고립, 웨스트뱅크엔 이주로써 대응한 것이다.
제3회 반짝다큐페스티발 개막섹션 초청작 <사월의 마지막 날들>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웨스트뱅크 이주정책을 돌아보도록 한다. 팔레스타인인이 정착한 마을에 이스라엘인들이 자리 잡고, 무장한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협해 몰아내는 결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향을 생각하게 한다.
▲사월의 마지막 날들스틸컷
반짝다큐페스티발
전쟁이 바꿔 놓은 지역의 역사
<사월의 마지막 날들>은 1949년,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 이듬해로 건너간다. 이 해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게 운명적인 한 해였다. 영국이 식민지를 포기하고 떠나간 뒤 무주공산이 된 팔레스타인 땅에서 원주민인 팔레스타인과 이주민인 유대정착세력 간의 충돌이 지속됐다. 마침내 UN의 지지를 얻은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하자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한다. 제1차 중동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은 물론, 참전한 아랍 연합국을 격파하고 와해된 각국과 유리한 조건으로 협정을 체결한다. 1949년 3월 전쟁이 종식되기 전까지 이스라엘이 점령하지 못한 팔레스타인 땅은 이집트가 확보한 지금의 가자지구와 요르단이 점령한 지금의 웨스트뱅크 정도였다.
1949년 승기를 잡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헤집고 다니며 위세를 과시했다. 아랍 연합군에 비하면 조악한 전력이었음에도 연이은 승전으로 뻗친 사기와 유대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은 이들을 강하게 뭉치게 했다. 아랍이 사실상 팔레스타인을 포기한 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아온 각 마을이 이스라엘군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영화의 배경인 1949년, 현 웨스트뱅크에서 약간 남쪽에 위치한 마을 바띠르(Battir)도 그중 하나다.
<사월의 마지막 날들>은 바띠르가 어떻게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로 남았는지를 살핀다. 영화는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져오는 전설을 추적하는데, 1949년 마을로 다가온 이스라엘군을 물리친 어떤 영웅에 대한 이야기다. 기실 바띠르도 다른 마을처럼 번듯한 무기라 할 것이 없었다. 이스라엘 정규군조차 조잡한 총기를 대충 수집해 쓰는 민병대 수준이었으니 주둔한 군사도 없던 바띠르의 상황이야 알만한 일이다.
▲사월의 마지막 날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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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마을이 살아남은 비결
그러나 마을엔 기발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제안으로 한밤 중 바띠르의 주택 창문마다 허수아비가 선다. 총을 든 채 경계하는 모양의 허수아비 뒤에 불을 밝혀 한 밤 중 멀리서 보면 바띠르에 몇 개 분대 쯤의 병력이 주둔하는 양 꾸민 것이다. 허장성세, 이 계책이 꽤나 먹혀든 모양으로, 이스라엘군은 감히 바띠르에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바띠르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군에 접촉해 협약을 맺으니, 오늘날까지 지켜지는 나름의 평화협정이었다고 했다.
마을을 따라 놓인 철도와 그 위를 내달리는 이스라엘의 기차를 바띠르가 책임지고 안전하게 지켜주는 조건으로, 마을의 평화와 그 일대 토지 경작권을 보장받았다. 1949년 4월, 이스라엘이 1차중동전쟁에서 승전한 직후, 총 한 자루 없던 바띠르의 성취였다.
<사월의 마지막 날들>은 당대 권위 있는 역사로써 기록되지 못하고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수집하고 해석해 한 편의 다큐로 꾸민 작품이다. 벨기에 감독 로헝스 뷰엘렌스의 24분짜리 단편은 오늘날 철도 인근 땅을 경작하는 바띠르 주민들의 모습에 더하여 이 지역을 오가는 이스라엘의 현대적 열차, 과거 전설을 재구성한 사진과 비디오를 이어 붙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이야기를 전한다. 사진소설(photo-novel)이라 표현되는 조립된 영상이 진실로 문학적 멋을 발하는 가운데, 관객은 익히 알지 못한 팔레스타인의 작은 승리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패배, 그 부조리한 전쟁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영화는 바띠르의 승리, 그로부터 얻어진 지난 70여 년의 생존을 전한다. 그러나 바띠르의 사례는 지극히 이례적으로, 그와 같이 협약을 맺지 못한 대다수 마을은 이스라엘에게 점령돼 주권을 잃고 쫓겨나기 일쑤다. 수많은 마을이 파괴되고 빈 마을로 전락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무장한 이스라엘 정착민들에 의해 속수무책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을 <사월의 마지막 날들>이 몇 줄 자막으로 전한다.
▲반짝다큐페스티발포스터반짝다큐페스티발
전쟁을 멈추는 지혜가 갈급할 뿐
바띠르엔 '모든 돌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속담이 전해져온다. 그중 가장 가치 있는 전설을 뷰엘렌스가, 이 영화 <사월의 마지막 날들>이 발굴해 작품을 보는 이들 앞에 펼쳐낸다. 실제로 2015년부터 1년 넘게 바띠르에 거주하며 지속가능한 팔레스타인을 위해 작업했다는 뷰엘렌스다. 팔레스타인 관광사업을 일구려 했던 마사르 이브라힘과 공동작업 또한 하였다는데, 오늘에 이르러 파국에 봉착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가 이들의 수고를 완전히 엎어버린 게 통탄스럽다.
이스라엘은 1949년과는 비할 수 없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다. 가자지구에서 이뤄지는 그들의 공세는, 웨스트뱅크의 정착계획은 전에 비할 바 없이 악랄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제 고향에서 죽거나, 난민이 되어 전 세계를 떠돈다. 그 스스로 고향을 잃고 전 세계를 떠돌며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그 결과로써 2차대전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이스라엘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에게 꼭 저들이 겪은 참극을 고스란히 겪도록 하는 모습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하마스, 이란과 벌이고 있는 전쟁은 인간의 본성을, 그 너머의 운명을 가늠하도록 한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어디까지 폭력적일 수 있는가. 스스로의 잘못을 되돌릴 수 있는가. 그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낼 수 있는가. <사월의 마지막 날들>이 그저 전설로써만 퍼올린 이례적 이야기는 트럼프조차 동참한 전쟁 가운데 어떠한 힘을 발하고 있는가. 나는 도저히 어떠한 답도 내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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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집마다 서 있는 허수아비, 평화 지켜낸 기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