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오면서 수많은 한국 여자들이 사회적 맥락에 본인을 빼앗기며 사는 걸 목격해 왔다. 그런 이유로 몇몇 여성들은 빼앗긴 자신을 찾기 위해 움직여 오기도 했다. 그 움직임을 이 영화에 담고 싶었다. 그중 한 명인 제 외할머니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30대가 오기 전 꼭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던 일들을 그만두고 KAFA(한국영화아카데미)를 택한 허가영 감독은 졸업영화로 칸영화제에서 무려 1등상 수상(학생 영화 부문)의 영예를 안았다. 노년기에 접어든 70대 여성(허진)의 사랑 이야기를 두고 세계 영화인들이 먼저 공감했다. 손녀의 결혼식을 뒤로 하고 고인이 된 남자친구의 49재에 참석하는 주인공의 선택은 사회적 역할과 가부장제에서 억압받던 여성의 해방이기도 했고, 자신의 내면과 감정에 솔직했던 순수한 선택이기도 했다.
칸영화제 일정 및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상영회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허가영 감독을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프랑스에서의 여운이 남은 듯, 1달간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이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다며 소회부터 전했다.
이야기의 시작, 외할머니와의 기억
▲올해 5월 열린 제78회 칸영화제 라 시네프상(1등)을 수상한 영화 <첫여름>의 허가영 감독.
Manon Boyer / FDC
30분 분량의 영화 <첫여름>은 오롯이 감독 개인의 경험과 고민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칸영화제 초청에 앞서 올해 3월 7일 열린 KAFA 졸업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된 직후 배우 허진은 무대에 올라 감독에게 응원과 고마움의 말을 전했고, 남자친구 역을 맡은 정인기 배우 또한 객석에서 영화를 보고 남몰래 감흥을 표하기도 했다.
"졸업영화제 상영 때 설렘과 떨림이 있었다. 영화는 관객과 만나야 그 의미를 가지니까 다들 어떻게 반응하실까 생각했던 것 같다. 작품을 완주해냈다는 기쁨도 컸고. 배우분들도 그때 영화를 처음 보셨는데 나름 전 자신감에 차 있었다. 허진 선생님이 자신의 역할로 영화에서 단독 주연은 처음이셨는데 그날 밤 전화하셔서 두 신이 좀 아쉬운데 편집을 다시 할 생각 없냐며 의견을 주시기도 했다. 그만큼 애정을 가지고 계신다고 느꼈다. 그리고 상영 후 극장 화장실에서 어떤 아저씨가 너무 크게 우셔서 누구일까 싶었는데 그분이 정인기 선배님이셨다(웃음)."
신인 감독의 중편 영화를 관록의 배우들이 선뜻 출연한 이유는 역시나 시나리오 덕이었다. 노인 캐릭터가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찾기도 힘들거니와, 진심을 담아 눌러 쓴 이야기임을 배우들이 알아차린 것. <첫여름>은 청소년기에 집을 떠나 외할머니와 단둘이 6개월간 살며 느낀 것들, 대학교 수업 과제로 외할머니를 인터뷰하게 되면서 알게 된 깨달음을 녹여낸 결과다.
"할머니 댁에서 바퀴벌레가 나와서 혼자 잡고 있는데 보고도 모른 척하신 적이 있다. 제게 가장 안 좋은 방을 주셨었거든. 밤에 홀로 짜파게티를 끓여먹다가 서러워서 울고, 할머니가 너무 미워 욕하며 잠든 기억이 있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랑 크게 다퉜는데 할머니가 오셔서 '내 딸 괴롭히는 사람은 손녀라도 싫다'고 하시더라. 엄마와 제게 그리 관심도 없고, 차갑게 대하던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흥미롭기도 했다. 제게 용돈을 달라기도 하셨고, 남자친구를 보고 싶다는 말씀을 종종 하기도 했다.
학부생 때 들은 노인복지론 과제로 할머니를 인터뷰한 뒤 남긴 속기록이 있다. 그때만 해도 당장 영화로 만들고픈 생각은 없었고, 학보사에 칼럼 정도를 써서 낸 정도였다. 막연하게 다큐멘터리나 글의 형태로 더 많은 노인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졸업할 때가 돼서 진로를 정할 시기에 제가 갈망했던 영화를 꼭 만들어 보고 30대를 맞이해야겠더라. 그러던 차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49재에 갔는데 대웅전에서 흘러나오던 불경 소리가 마치 콜라텍 음악처럼 들렸다. 할머니가 춤추는 모습이 보이면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왔다."
허가영 감독은 할머니와의 인터뷰 후 할머니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보지 않고, 바쁜 20대를 보냈던 때를 소환했다. 경영학 전공에, 빈곤과 노동 관련 시민단체 활동을 하다가 영화투자 회사를 다니기도 했던 그는 "왜 제 세계관이 무너질 정도로 격동적이었던 할머니와의 경험을 두고도 교류를 하지 못했는지, 할머니에게 남친은 어떤 존재였는지 묻지 않았나 싶더라"며 "제게 보였던 할머니의 춤을 남기고 싶어서 영화를 하게 된 것"이라 말했다.
밀도 높게 녹여낸 현실감
▲영화 <첫여름>의 한 장면.
KAFA
<첫여름>이란 제목은 시놉시스 단계 때부터 변한 적이 없다고 한다. 애초에 장편으로 만들고 싶었던 이 이야기를 꺼낸 것에 허가영 감독은 준비가 된다면 언젠가 장편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제목은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 시놉시스 제출을 앞두고 새벽 5시엔가 떠오른 것이다. 제가 그리고 싶던 여성이 빼앗긴 무언가가 있는데 그게 여름이라고 생각했다. 충만함과 열기, 마음 껏 땀 흘리고 느낄 수 있는 걸 우리 할머니가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되찾아드리고 싶었다. 제 할머니가 특별하기도 했지만, 한국의 한 시절을 통과하며 보편적인 여성으로 살아왔거든. 그 시기를 거친 뒤 인생 끝자락에서 발버둥을 치신 것이라 작품을 쓸 때 그런 모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허진 선생님, 정인기 선배님도 노인의 로맨스라는 걸 독특하게 생각하신 것 같다. 제가 비록 신인이지만, 캐스팅 과정이 어렵진 않았다. 참고로 허진 선생님 남편 역을 하신 분은 전문 배우가 아니다. KAFA 기숙사 앞 편의점 사장님인데 생김새가 영화적이셔서 출연을 제안드렸는데 흔쾌히 참여하셨다. 현장서에 너무도 연기를 잘하셔서 놀랐다. 이젠 배우라는 또하나의 꿈을 가지신 것 같더라(웃음)."
실제로 엄마가 입던 옷, 할머니가 쓰던 소품을 영화 촬영 때 활용했고, 수차례 카바레에 들러 노인들의 대화를 채록하기도 했다. 직접 노인들과 춤을 추며 느꼈던 오감의 기억을 잊지 않고 영화에 담아냈다. "춤을 청하셨던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몸이 단단한 게 신기했다. 그리고 얼굴이 가까이에 있어 체취와 숨소리가 다 느껴지는 게 춤이라는 게 이처럼 교감이 강하고 섹슈얼 하다는 걸 알게 됐다"며 허가영 감독은 "오랜 파트너들이 합을 맞추는 게 큰 감정을 나누는 일이라는 걸 체감했다"고 당시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매우 개인적이고 한국적 소재였음에도 세계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건 그 자체로 본편성을 건드리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허가영 감독은 "칸에서 관객들이 상영 후 내려오셔서 여러 소감을 말해주셨는데 할머니를 기억하는 가장 특별한 방법 같다는 말이 가장 기억난다"며 "문화와 사회적 맥락 초월해서 캐릭터의 마음과 제가 하고 싶었던 진심을 알아주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여성 이야기, 꾸준히 전하고 싶다"
▲제78회 칸영화제 라 시네프 부문 1등상을 수상한 영화 <첫여름>의 허가영 감독(앞줄 오른쪽).Manon Boyer / FDC
돌연 영화를 하겠다는 딸의 선언에 부모의 반대 또한 예상됐을 터. KAFA를 택하며 허가영 감독은 딱 5년만 해보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고 한다. 칸영화제에 부모님과 동행하며, 새삼 존중받는 감독의 존재를 확인시킨 것도 나름의 수확이었다. "영화를 아끼고 그 힘을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살아 있는 예술임을 강조했다"며 허 감독은 "사실 촬영 때 엄마가 스태프의 급 부재로 하루 연출부 일을 하신 적 있다. 현장의 열악함을 보고 많이 놀라셨던 것 같은데 이번 수상으로 조금 마음을 놓으신 것 같다"고 전했다.
물론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 일이 아니다. 변수도 많고, 끊임 없이 삶을 파내야 하는 그 고통을 허가영 감독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화를 놓을 수 없는 이유를 그는 제법 설득력 있게 밝혔다.
"고등학생 때 전 만성 우울감에 시달리던 아이였다. 자퇴 후 검정고시를 보기까지 자율적인 시간이 꽤 주어졌는데 제 안의 분노와 우울을 해소했던 창구가 글이었다. 제 글을 바탕으로 친한 친구가 영상을 만들곤 했는데 그걸 여러 공모전에 출품했던 기억이 있다. 영상으로 사회와 연결되고 누군가가 귀 기울여 준다는 걸 확인했다. 대학에 가면서는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원하시는 학과로 들어가긴 했지만, 자꾸만 이야기를 쓰고픈 욕망으로 돌아오게 되더라.
누군가의 삶을 쓴다는 건 그만큼 많은 무게가 있는 일이라 고통스럽긴 한데 엄마가 <첫여름>을 보시고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했을 때 제 죄책감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할니를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사실 칸영화제를 통해 영화의 힘을 느끼고 자신감도 얻었지만, 동시에 그 화려함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조명하는 예술인데 온갖 화려한 행사로 영화인들을 대하는 걸 보며 한동안 마음이 얼얼했다. 자본주의에 영화로 봉사하고 있는 걸까 싶어 괴로운 마음이기도 했다."
이 모순된 양가감정을 이기는 것 또한 영화가 아닐까. 허가영 감독은 "화려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이야기의 힘으로 계속 밀어붙이고 싶다"며 "불편한 이야기를 쓴다고 학교에서 지적받기도 했는데 이게 제 장착의 정체성 같다"고 강조했다.
차기작 또한 소수자성을 다루는 이야기가 될 예정이다. 록 밴드 활동을 오래 해 온 경험을 담아 여성이자 50대에 접어든 베이시스트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또다른 구상은 불법 피임약을 유통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어떤 작품이 먼저 나올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삶과 불화해 온 인물에 한참 천착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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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손녀보다 남친 좋아했던 할머니 이야기, 칸에서 뜨거웠던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