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강북은 전통예술, 연극 등의 극 장르에 특화된 대표적인 문화예술교육센터이다. 강북구를 중심으로 동북권 일대의 예술교육과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강북은 전통예술, 연극 등의 극 장르에 특화된 대표적인 문화예술교육센터이다. 강북구를 중심으로 동북권 일대의 예술교육과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필립리

지난 21일 토요일 늦은 오후 3시, 서울 강북구 솔샘로에 위치한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강북'(이하 '강북센터'). 여느 때처럼 연극을 보기 위해 찾던 대학로의 붐비는 극장이 아니라 경사진 도로를 따라 신축 건물에 들어섰다. 주차장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오르자, 문득 오래 전 데자뷔가 밀려왔다. 마치 오래된 편지를 열기 직전의 기대가 뒤섞인 감정이랄까. 아니면 잊고 있던 기억을 다시 열어보는 마음처럼 미묘했다.

오늘 무대에서 마주하게 될 질문이 그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궁금증에 해답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오직 공연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끄집어내려는 결심의 장소로 말이다. 그것은 공연을 제작한 박지혜 연출가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극(劇)'의 본질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지난 2019년 국립창극단의 <시>를 연출한 그를 과거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그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판소리로 풀어내며 전통극의 형식을 해체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도에 놀라움을 넘어 감탄을 느꼈고, 동시에 이런 질문을 품었다. 판소리와 연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에게 던지는 궁금증으로.

그것은 몇 해가 지나도록 내 안에서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강북센터에서 진행된 공연 <파랑새>의 안내페이지에 소개된 문구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됐다.

"연극의 본질적인 힘과 배우의 순수한 연기력을 경험하고 싶은 분에게 추천합니다."

그 문장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이곳으로 이끈 것은 바로 이 문장이었는지 모른다. 나의 오래된 질문에 대한 파랑새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강북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90간의 공연을 마치고 양종욱, 양조아 배우와 박지혜 연출은 이날 공연에 참여한 관객들을 대상으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90간의 공연을 마치고 양종욱, 양조아 배우와 박지혜 연출은 이날 공연에 참여한 관객들을 대상으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필립리

무대 위에 펼쳐진 감정의 여정

무대는 작고 아담했다. 장치라곤 없었다. 조명은 손등처럼 따뜻하게 번졌다. 이번 공연은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희곡을 바탕으로 제작된 연극 <파랑새>. 이미 연극 분야에서 탄탄한 위치를 자랑하는 양손프로젝트는 이 원작을 각색하여 여러번 무대에 올린 바 있다. 틸틸과 미틸. 배우는 둘뿐이다. 하지만 등장인물은 셀 수 없다. 그런데 연극에서 실제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신 배우의 말과 호흡이 무대를, 목소리의 결이 공간을, 손끝의 방향이 보는 이의 감정을 채웠다. 누군가는 말을 했고, 다른 이는 말을 듣는 연기를 했다. 말의 심지에서 감정이 타올랐다. 장면의 끝에는 내재된 침묵이 퍼졌다. 대부분의 관객은 어느새 대사를 따라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야기보다는 리듬에 가까운 호흡으로, 사건보다는 감정에 닿아 있는 장면이 가슴으로 다가왔다.

무대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배우의 손끝과 시선,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공간이 바뀌었다.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스며드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아주 가끔 배우들은 조용했고, 관객들은 그에따라 숨을 멈췄다. 누군가는 도중에 노트를 꺼내 메모했다. 다른 이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보려 하기보다는 가슴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 이렇게 연극은 관객의 다양한 태도를 전제로 진행하는 듯 보였다.

공연이 진행된 강북센터의 '예술당솔샘'은 객석과의 경계가 모호하다. 모호하다고 표현했지만, 어쩌면 아예 없는게 맞을지 모른다. 마치 일상 공간에서 연극이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은 장면이 이어졌다. 이후에 두 배우들은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연기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됐단다. 특히 전공자로보이는 관객들은 극의 구성에 감탄을 표했다. 어떤 이는 "아직까지 나는 파랑새 같은 작품을 찾지 못했다"라며 속내를 드러냈다. 양손프로젝트의 연출 방식은 명확했다. 무대 장치는 최소화하고, 장면은 배우의 몸을 통해 창조된다. 감정의 리듬, 시선의 흐름, 공간의 밀도. 이 모든 것이 배우의 섬세한 연기를 통해 재현되는 구조다.

함께 호흡한 공간, 이어지는 질문들

 지난 21일 오후 3시부터 두 시간에 걸쳐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강북 2층 다목적실에서 양손프로젝트의 공연 '라이브씨어터' <파랑새>가 진행됐다.
지난 21일 오후 3시부터 두 시간에 걸쳐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강북 2층 다목적실에서 양손프로젝트의 공연 '라이브씨어터' <파랑새>가 진행됐다. 필립리

공연이 끝났을 때, 누군가 박수를 쏟아냈다. 하지만 모두가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우리에겐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박수를 쳐서 배우들을 보내기엔 아직 미련이 남았다. 말 한마디를 꺼내기에도 너무 깊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서 대부분의 관객들은 자리를 지켰다. 예정된 30분을 훌쩍 넘겼다. 질문은 끊이지 않았고, 배우들은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다.

한 관객은 이렇게 물었다. "이번 <파랑새>는 어떻게 구성한 건가요? 이 선택에 담긴 연출 의도가 궁금해요." 이에 대해 박 연출가는 "배우의 집중력과 감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연극의 본질이 배우라는 믿음에서 출발했다"고 답했다.

또 다른 관객은 "양손프로젝트가 무대에 올린 여러 작품 중에서 배우로서 특별히 성장하게 만든 것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양조아, 양종욱 배우는 주저 없이 <파랑새>를 꼽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단출한 공간, 극도로 제한된 장치, 최소화된 구성. 그리고 그 안에서 감정을 끝까지 끌어올려야 했던 연기. '연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매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란다.

창작 방식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양손프로젝트는 모든 작품을 수평적으로 선택한고 전했다. 각자의 머릿속에 자리한 상상과 욕망을 꺼내놓고, 누구 하나 이끄는 이 없이 나란히 두고 들여다본다고. 그 속에서 가장 절실한 질문을 향해 방향을 맞추고, 그에 맞는 형식을 탐색한단다. 그래서인지 무대 위 두 사람은 단지 배역을 맡은 배우가 아니라, 연출의 일부였고 극의 동력으로 보였다.

그날의 대화는 단순한 질의응답이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공간에 머문 사람들이 각자의 감정과 기억을 조금씩 열어보이는 시간이었다. 나 역시 그 안에서 오래 묻고 있던 질문 하나를 꺼내 들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질문을 잇지 못해 끝나고 개인적으로 질문을 이어갔다.)

"6년 전, 국립창극단 작품을 연출할 때, 판소리와 연극의 경계를 넘나들어 주목을 받았어요. 이번엔 정통 연극의 본질을 염두하셨는데, 서로 다른 두 장르를 연출하면서 어떻게 다른가요?"

박지혜 연출가는 웃으며 말했다.

"겉으로는 다르게 보여도,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감정이나 호흡은 비슷해요. 실제로 양손프로젝트의 배우들이 연기한 장면을 보고 이자람 배우는 판소리와 비슷하다고까지 말했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이 연극이 하고자 했던 말을 조금은 이해한 것 같았다. 파랑새는 '꿈과 행복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머물렀던 곳에 있다'는 사실을. 연극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거창한 장치나 인상적인 대사가 아니라 지금 눈앞의 배우가 숨 쉬며 감정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 자체. 강북센터의 작은 무대, 고요한 공간, 따뜻한 조명, 숨죽인 관객, 손끝에서 시작된 감정 등이 극의 본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강북의 '예술당솔샘'은 대학로에서 흔히 볼법한 공연장이 아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시설은 연극과 전통예술, 교육과 실험, 어린이와 어른, 예술가와 시민이 한데 어우러져 예술을 호흡하는 열린 무대이다. 양손프로젝트가 강북센터에서 무대를 꾸렸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선택한 게 아니라, 이곳이야말로 장르를 초월한 실험이 가능하다는 실천이었다. 관객과 배우가 호흡을 나누는 전통예술과 연극의 본령이 이 열린 구조의 무대에서 되살아났다. 그리고 현장에 모인 여든 명의 관객은 배우와 함께 그 파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연극은 끝났지만, 감정은 남았다. 질문도 여전했다. 그러나 이전보다 조금 덜 조급해졌다. 어쩌면 내가 찾던 연극의 본질에 관한 파랑새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20~21일, '서울시민예술학교 강북'에서 공연 [라이브씨어터] 파랑새 포스터
지난 20~21일, '서울시민예술학교 강북'에서 공연 [라이브씨어터] 파랑새 포스터양손프로젝트




덧붙이는 글 서울시민예술학교는 서울문화재단의 대표 예술교육 프로그램으로, 봄시즌(4~6월), 여름시즌(7~8월), 가을시즌(9~11월) 동안 서울의 5개 권역별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양천, 용산, 강북, 서초, 은평)에서 대상과 장르의 특성에 맞춘 사업입니다.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강북 서울시민예술학교 양손프로젝트 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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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다. 그동안 문화예술 월간지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2016~2023)에서 객원필진으로 글을 썼다. 현재는 대학로에서 공연과 전시를 보며 현장을 담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를 만나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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