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엔 수많은 감독이 있지만 진정으로 작가라 불릴 만한 이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작가의 인장이 있는 이, 작품 가운데 작가의 지문을 새길 줄 아는 이가 그리 많지는 않아서다. 자기만의 특색 없이 시나리오를 그대로 영상으로 옮길 뿐인 감독에게 작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서사의 영상화를 넘어 저만의 색깔, 독자적인 호흡과 색채를 묻힐 줄 아는 이를 작가라 부르는 건 영화 또한 표현이 중추가 되는 예술의 한 갈래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한 세기 영화 역사 가운데 결코 흔하다고 할 수 없는 작가 중 하나다. 1966년 발표한 데뷔작 <트랜스퍼>부터 지난해 나온 <더 슈라우즈>까지, 거장의 필모그래피는 무려 반세기를 헤아린다. 그 활발한 작업이 매번 칸과 베니스의 선택을 받고 있다는 점은 이 독창적 작가가 세계적 수준에서 저만의 스타일을 잃지 않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이것은 크로넨버그의 영화구나'하고 알 법한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고 있다.

인간의 몸이 파괴될 때 얻어지는 감상

네이키드 런치 스틸컷
네이키드 런치스틸컷엣나인필름

크로넨버그가 1980년대 내놓은 <비디오드롬>과 <플라이>는 그대로 영화 역사에 길이 남는 고전이 됐다.

<네이키드 런치>는 위 두 영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크로넨버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1991년 작인 이 영화는 크로넨버그의 주된 특징 중 하나인 극단적인 신체변형과 그로부터 비롯된 인간성에 대한 탐구를 진지하게 수행하는 작품으로 영화사적 의미가 있다.

영화사 엣나인필름이 <네이키드 런치>를 25일 한국에 선보인다. 제작된 지 34년이 지난 작품이지만, 요즈음 흔한 재개봉작과는 달리 한국에서 첫 개봉이란 점이 눈길을 끈다. <플라이>가 1988년 정식 개봉한 것과 달리, 크로넨버그의 작품은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정식개봉하지 못한 경우가 잦다. 대표작인 <비디오드롬>조차 7년여가 흐른 뒤 비디오로만 유통됐을 뿐이다. <네이키드 런치> 또한 마찬가지로, 크로넨버그의 색깔이 잔뜩 묻은 독창적 작품임에도 한국관객은 그를 마주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네이키드 런치>가 한국에 처음으로 선보이게 된 배경엔 영화의 원작이 된 윌리엄 S. 버로스의 존재가 영향을 미친 듯 보인다. 그의 작품 <퀴어>를 이 시대 주목받는 작가 중 하나로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루카 구아다니노가 연출해 개봉한 때문이다. 티모시 샬라메를 일약 스타덤에 올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대단한 인기를 누린 한국에서 이 영화의 연출자인 구아다니노의 신작은 주목받을 수밖에 없고, 이와 접점을 가진 작품을 가만히 흘려보낼 수 없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영어 원제를 직역한 소설 <벌거벗은 점심>은 <퀴어> 못잖은, 아니 그보다도 더욱 높이 평가되는 버로스의 대표작이다. 훗날 '컷업 기법(cut-up technique)'이라 명명되는, 아무렇게나 잘라 아무 데나 붙이는 실험적 작법의 시작점으로 대단한 악명을 얻은 소설이기도 하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짐작하기 어려운 작법이 파격이란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

이와 같은 요상한 작품이 크로넨버그와 만난 건 어쩌면 운명, 천생연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로넨버그야 말로 변태적 거장이란 표현이 따라붙는 작가가 아닌가. 특이점이 남다른 두 작가의 만남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작품으로 이어졌으니 씨네필들이 <네이키드 런치>의 개봉을 기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크로넨버그에게 흔히 따라붙는 바디호러 장르의 주창자란 표현은 <플라이>에 이어 <네이키드 런치>에서도 여지없이 맞아떨어지는데, 그것이 그저 B급 영화의 연출법으로 그치지 않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또 무엇인가 하는 존재론적 고민과 맞닿아 해석된다는 점은 다분히 인상적인 대목이다.

말하는 벌레, 벌레가 된 인간

네이키드 런치 스틸컷
네이키드 런치스틸컷엣나인필름

주인공은 중년 사내 윌리엄 리(피터 웰러 분)다. 그는 해충 방역사, 이해를 돕자면 '세스코' 같은 방역업체에서 일하는 일선 업자다. 회사에서 살충약을 받아 해충이 출몰하는 곳으로 가 방역작업을 하는 게 그의 업무다. 농약살포기를 떠올리게 하는 기구를 등에 지고서 해충방역을 하는 그의 모습이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데, 막상 바퀴벌레들이 눈에 보이는 곳으로 튀어나올 즈음엔 약이 떨어져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만다. 통엔 필요한 것보다 훨씬 적은 약이 들어있었다.

어째서 약이 부족했을까. 그 이유를 찾던 윌리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아내 조앤(주디 데이비스 분)이 살충제에 중독돼 있었다. 그녀가 마치 필로폰 류의 마약을 투입하듯, 살충제를 주사기로 제 가슴에 찔러 넣는 광경이 윌리엄의 눈에 띈다. 아니, 세상에 하고 많은 약물을 놔두고 살충제라니. 그것이 마약이 주는 만큼 환각이나 각성, 이완효과는 있는 것인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채로, 영화는 마구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어 내달리기 시작한다.

현실세계와 환상, 도저히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기 어려운 인터존이라는 세계, 그 사이에서 만나는 인간의 말을 하는 벌레들,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는 인물들의 교차가 영화 내내 이어진다. 이 영화 <네이키드 런치>가 도저히 제 정신으로 쓴 이야기라고는 믿기 어려운 가운데, 버로스가 실제로도 약을 빨며 원작을 썼다는 사연이 보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도록 한다.

크로넨버그는 버로스가 빚은 세계를 무리없이 시각화해 낸다. 인간이 벌레가 되고, 다시 벌레가 인간이 되며, 둘 사이의 경계가 무용한 세계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혐오며 평안한 느낌이 어디로부터 유래하는지를 되짚게 되는 건 그의 다른 작품이 천착한 주제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주제이고 효과라고 하겠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살충제에 중독된 윌리엄 스스로가 환각을 보고 사고를 치고 있다 보는 편이 합당한 해석이라고 하겠는데, 과연 그대로 결론을 내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도 쉬이 확신할 수 없다. <네이키드 런치>는 보는 그대로 느껴지는 것, 그 느낌들로부터 깨워지는 감각 그 자체가 줄거리보다도 중요한 효과를 일으키는 작품이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언어로써 쉬이 포획할 수 없는 의미에도 <네이키드 런치>를 흥미로운 작품이라 말하는 이가 많다는 건, 그대로 크로넨버그의 세계가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네이키드 런치 포스터
네이키드 런치포스터엣나인필름


덧붙이는 글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네이키드런치 엣나인필름 데이비드크로넨버그 피터웰러 김성호의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