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비밀 연구실에 일단의 동물보호 운동가들이 침입해 실험대상인 침팬지를 우리에서 내보낸다. 하지만 그 침팬지들은 '분노 바이러스' 실험체였고, 인간에게 전염된 바이러스는 혈액을 통해 전파하며 숙주를 통해 이성을 잃고 피에 굶주린 좀비로 변이시킨다. 교통사고로 사건 발생 '28일 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짐'은 영문도 모른 채 좀비 무리에 쫓기다 생존자들과 합류한다. 그러나 사회질서가 붕괴되고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감염자에 쫓겨 안전지대를 찾아 헤맨다.

# 최초 발생부터 '28주 후'

영국 전역을 멸망시킬 뻔한 분노 바이러스는 다행히 숙주가 먹이를 찾지 못해 쇠약해지고 아사에 이르면서 진정되기 시작한다. 바다 건너에서 평화유지군이 도착해 재건에 들어간 상태. 하지만 새로운 변종이 발견된다.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지만, 이성을 잃지 않는 감염체의 등장이다. 이로 인해 백신의 가능성과 함께 식별하기 어려운 새로운 위협이 동시에 닥친다.

# 좀비 사태가 터지고 '28년 후'

유럽 전역에 확산될 위기는 간신히 넘겼으나 영국은 통제불능 상태에 빠졌다. 유럽은 영국을 위험지역으로 격리하고 누구도 출입할 수 없도록 감시한다. 고립된 영국 본토는 좀비들의 세상이 되고, 소수의 생존자는 각지에 소규모 안전지대를 구축하고 자급자족 생활로 명맥을 잇는 중이다. 그런 안전지대 가운데 육지와 격리된 섬에 둥지를 튼 '홀리 아일랜드'에서 이야기는 새롭게 출발한다.

이 섬에서 태어난 소년 '스파이크'는 아직 섬 밖 본토를 본 적이 없다. 그는 12살이 되는 해에 처음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광활하고 낯선 세계를 응시한다. 어른들이 종종 기억을 더듬어 들려줬지만,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흔적들, 바이러스가 잠식한 세상이 활짝 열려 있다. 물론 조금만 방심하면 목숨을 잃거나 분노 바이러스의 감염체가 될 운명이다.

안전한 섬 내에서 지낸다면 위험은 최소화할 수 있지만, 스파이크는 생명을 걸고 본토로 향한다. 그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 확실치는 않지만 작은 가능성에 불과해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고자 함이다. 과연 소년은 무사히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세계는 어떻게 변한 걸까?

28년 동안 좀비도, 인간도 생존을 위해 진화하다

 <28년 후> 스틸
<28년 후> 스틸소니 픽처스 코리아

대니 보일 감독이 2002년, <28일 후>를 세상에 공개했을 때, 21세기 대중문화에서 너무나 익숙해진 소재인 '좀비'는 일대 혁신을 맞는다. 기존의 좀비는 그야말로 '되살아난 시체'다. 불가사의한 영향에 의해 썩어가던 시체가 벌떡 일어나 산 사람을 시샘하듯 피와 살을 탐한다. 생전과 비교하면 한없이 느릿느릿해도 인간을 감염시켜 자기편을 늘리고, 서서히 목을 조르듯 사방에서 조여오며 먹지도 자지도 않는다. 그게 20세기에 보편적으로 자리 잡았던 좀비 캐릭터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1968) - <시체들의 새벽> (1978) - <시체들의 낮> (1985) 클래식 3부작은 그 전형적인 기틀을 제공한 예시라 하겠다.

그러나 대니 보일의 <28일 후>는 모든 걸 뒤흔들어 놓는다. 육상선수 출신 조연배우들을 특별히 기용해 '뛰는 좀비'를 본격 창조한 것이다. 그저 눈요깃거리를 위해 과격한 운동능력이 있을 리 없는 좀비에게 달리기 주자 노릇을 시킨 게 아니다. 21세기 좀비는 인간의 탐욕과 만용, 불신과 갈등에서 탄생한 존재라는 선언이었고, 이는 자아를 잃고 원초적 본능만 남았던 로메로 판 좀비에서 시대 변화에 발맞춰 다양한 사회적 해석을 가능케 하는 장치로 받아들여졌다.

전작에서 오직 감염체를 늘리는 데에만 혈안이 된 나머지 자기 몸은 정작 챙기지 않아 쇠약해져 제안된 오류를 분노 바이러스는 변화에 발맞춰 돌연변이 형질 변화로 극복한 상태다. <28년 후>에는 단시간에 자기 유지를 목적으로 다양한 변종을 낳은 좀비들의 행태가 그럴듯한 모양새로 구현된다. 그저 피에 굶주려 무작정 질주하던 감염체는 지속 가능한 유지 방식을 찾고자 다양한 경로로 자신을 변모시키는 중이다.

영화에 등장하듯, 바이러스가 스테로이드 복용 같은 효과로 활용돼 보디빌더처럼 신체 능력을 강화한 개체, 종족을 이뤄 집단으로 협동하며 그들 나름의 공동체를 건설한 개체, 신진대사를 최소화해 수동적인 생존방식을 학습한 개체까지, 마치 초기 인류의 시조들이 서로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며 경합하던 모습을 닮았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영국 내에서 생존한 소수 인간에게도 찾아왔다. 그들은 바다 건너 대륙에서 누리는 현대문명의 이기와 편의를 대부분 상실한 상태다. 12살 소년은 휴대전화도, 온라인 쇼핑몰도,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은커녕, 라디오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경험한 적 없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신체를 단련하고 이제 잊힌 무예와 궁술을 어릴 때부터 숙달한다. 본능으로 몸에 익은 전투법, 예리한 감각, 전체 집단의 안위를 위해 내려야 하는 냉정한 결단력 등이 그것이다.

그렇게 근미래 영국은 다른 국가들과는 정반대의 변화 아래 있다. 어찌 보면 중세 초기 통일국가가 무너지고 이민족의 침략에 상시 노출된 소규모 마을의 생존전략이 부활한 셈이다. 도입부에서 공동체 내부를 제외한 모든 외부의 존재를 위험으로 인식하도록 규정하는 안전지대의 철칙과 함께 지난 세기의 살육과 생존투쟁의 풍경이 연달아 등장하는 건 <28년 후>의 주인공들이 처한 생존 조건을 압축하듯 펼치는 전시 격이다.

그런 을씨년스러운 기운에 화룡점정을 찍는 건, 영국의 작가 러디아드 키플링이 1903년, 보어 전쟁 당시 남아프리카에서 게릴라 전쟁에 시달리며 픽픽 죽어 나가던 영국군 보병의 암울한 처지를 냉혹한 필치로 구사한 시 "군화" 낭독이다. <28년 후>는 좀비가 장악한 세상에서 생사를 건 생존투쟁을 다루지만, 의외로 흔히 관객이 해당 장르에 기대하게 마련인, 마치 게임하듯 무차별 좀비 학살의 말초적 쾌감을 선사하진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만, 그야말로 너 죽고 나 살자의 순간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안 무섭다거나 밋밋하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다)

이분법적 세계, 무정한 인심이 당연시되는 세상에 묻다

 <28년 후> 스틸
<28년 후> 스틸소니 픽처스 코리아

처음 예상과 다르게 끈질기게 세상을 잠식하는 감염자 집단은 이제 기존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 vs 감염된 상태이지만 원시적 공동체를 꾸려 협동하는 존재로 크게 구분되기 시작하는 듯하다. 고작 28년 만에 일어난 변화이고, 주인공이 고작 내륙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기에 앞으로 또 어떤 변종과 마주칠지 예측 불허 상황이다. 갈 길은 멀고 여정은 고작 안전지대인 섬에서 이삼일 거리밖에 안 되었는데 깜짝 놀랄 일투성이니 말이다. 본토에서 매일 목숨을 위협당하는 극소수 생존자들도 '외톨이 늑대'일 확률이 팽배한 건 당연지사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인간 대다수는 (타 영화나 대중매체에서) 좀비에 대항하는 생존자들의 방식을 답습한다. 방어벽을 세우고 물자를 절약하고 자체 생산하며 전통적 공동체 방식으로 집단 유지와 재교육을 수행한다. 생존이 모든 것에 우선하기에 집단주의/전체주의적 공동체로 폐쇄적인 면모를 기본으로 갖췄다. 좀비는 이성을 잃고 우리를 해치려 하니 냉정하게 처단할 대상에 불과하다. 단호하고 무자비해야만 한다. 그렇게 철저한 이분법적 세계관과 닫힌 사회 특징이 굳어질 수밖에 없다. 약자는 짐이 되고, 남 도우려다 나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을 비롯해 소수의 생존자는 다른 방식이 가능할 수 있지 않나 상상한다. 물론 분노 본능이 지배하는 감염자와 대화를 통한 평화 협상을 벌일 도리는 없다. 그러나 무차별로 한 쪽을 '멸종'시켜야만 끝나는 걸까? 그런 식이라면 승산이 있기는 한 걸까? 한때 인간이었던, 그리고 최소한의 집단생활을 부활한 저 무리를 어떻게 간주해야만 할까? 변해버린 세계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그런 고민은 이미 조지 로메로가 자신의 좀비 연대기를 이어가며 중반 이후 지속해 제기한 주제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찰나가 등장할 때마다 숨을 죽이고 응시하게 된다. 죽음과 살육이 너무나 익숙해진 시대, 소년은 강인한 전사로 바뀐 세상에 적응한 아빠의 방식 vs 죽음에 대한 애도와 추모는 인간이 인간답기 위한 덕목임을 설파하는 괴짜 의사의 태도 사이에서 모험을 거듭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해야 할 운명이다.

좀비 아포칼립스 판 <반지원정대>의 위업에 도전하다

 <28년 후> 스틸
<28년 후> 스틸소니 픽처스 코리아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하던 좀비 영화에서 청소년 성장물의 면모를 발견하기란 생경한 일이지만, 20세기에 조지 로메로가 이룩한, 하지만 감독의 비전을 온전히 구현하는 데엔 아쉬움이 남던 시리즈의 숙제를 21세기에 대니 보일이 창조적으로 계승 및 변주하려는 원대한 야망이 <28년 후>에서 뚜렷하게 관측된다.

감독은 이미 <28년 후>가 3부작으로 완결될 연작의 첫 번째이자 문을 여는 작업임을 밝힌 바 있다. 2부가 이미 제작 과정이고, 마지막 대망의 3부는 다시 대니 보일이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직접 연출할 예정이다. 그래서인지 규모는 비길 수 없어도 마치 <반지의 제왕> 3부작의 첫 번째 편인 <반지원정대>의 느낌이 풍기는 기분이 자연스레 깃든다. 억지 과장이 아니다. 자신이 20여 년 전 변화의 문을 연 21세기형 좀비, 하지만 오락물의 단골로 전락한 그 존재의 가치와 함의를 제대로 구축하려는 의지가 날이 서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아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살육쇼를 기대한 이들에겐 기대한 것과 퍽 다를 테지만, 오히려 거장의 안목과 성찰을 좀비 영화에서 접할 기회다. 인적이 끊긴 채 야생동물의 천국이 된 영국 본토의 풍광 속, 어떤 위험한 존재가 숨어 있을지 모를 위험에 노출된 채 28년 전부터 그 누구도 체험하지 못한 세상을 탐험하는 소년의 여정을 그저 안전과 행운을 기원하며 지켜봐야만 할 뿐이다. 그 모험의 끝에서 과연 주인공과 세계는 어떤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

<작품정보>

28년 후
28 Years Later
2025|미국/영국|공포, 스릴러, 좀비 아포칼립스, 드라마
2025.06.19. 개봉|115분|청소년관람불가
감독 대니 보일
각본 알렉스 가랜드
제작 킬리언 머피
출연 조디 코머, 에런 테일러존슨. 알피 윌리엄스. 랄프 파인즈
수입/배급 소니 픽처스 코리아
28년후 대니보일감독 조디코머 알피윌리엄스 에런테일러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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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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