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스틸
<퀴어> 스틸㈜누리픽쳐스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꽤 성공한 경력의 중년 작가 '리'. 하지만 그는 1950년대 미국 사회에선 불법으로 규정된 것들에 푹 빠져 있다. 결국엔 미국에서 탈출해 멕시코시티에 오래 머무는 중이다. 마약과 술은 그의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한 가지 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존재인 리는 멕시코의 작열하는 태양이 조금 숨을 고를 때쯤 어김없이 바에 들러 매일 밤 함께할 상대를 찾는다.

그렇게 끝없이 반복되는 것만 같던 어느 날, 리는 젊은 청년 '유진'과 만난다. 보자마자 첫눈에 확 들어오는 유진의 매혹에 리는 하룻밤 상대와의 가벼운 만남을 고수하던 것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어떻게든 그와 가까워지고자 본인의 체면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 리, 하지만 구애의 대상인 유진은 모호한 태도를 보일 따름이다. 조바심이 난 리는 마치 공작새가 구애의 춤을 추듯 필사의 갈망을 전한다. 과연 그의 욕망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루카 구아다니노, 마침내 윌리엄 버로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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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선보인 신작 <퀴어>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윌리엄 버로스란 이름을 우회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 <퀴어>는 윌리엄 버로스의 두 번째 장편소설 <퀴어>를 영화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원작을 각색한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첫 소설 <정키>로 1950년대 미국 문단에 파란을 일으킨 작가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결정적 전환점이라 직접 언급한 치부를 비롯해 쉽게 드러내기 힘든 본인의 자전적 인생 경험을 농축한 작업이 원작이고, 20살 때 소설을 독파한 후부터 항상 영화화를 꿈꿨다는 감독의 술회가 구현된 결실이라 그렇다.

2차 세계대전 연합국 승리의 '엔진'으로 종전 후 세계 초강대국으로 올라선 미국은 1950년대 번영의 절정에 서 있었다. 하지만 넘쳐나는 힘은 풍요에 그치지 않고 '의심암귀'에 빠져 국내외에서 '적'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외부에선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선 외적에 빌붙어 암약하는 '빨갱이'를 색출하느라 혈안이 된다. 그렇게 번영의 그늘 아래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번지던 시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현상적인 풍요와 위기의 징후를 동시에 감지한 예민한 이들의 일원으로 자리 잡은 윌리엄 버로스는 훗날 '비트 세대'라 불리게 된 일군의 문화예술가 집단과 추종자들의 중심에 선다.

비트 세대는 현실 체제에 안주할 생각은 없지만,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을 외치는 저항이나 조직적 운동에도 적극적이진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개인의 해방, 영적 각성에 이르는 길을 추구하려 했다. 현실을 초월하려는 매개로 약물에 관심을 보였고, 자유분방한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유하지만 답답한 기성 사회를 벗어나 3세계의 낯설고 이국적인 문물과 야생의 자연을 동경하며 세계 각지로 뻗어갔다. 그런 '비트닉'들의 여정은 자연히 그들 세대가 배출한 온갖 문화예술 결과물에 묻어난다. 그 세대의 상징적 존재인 윌리엄 버로스의 <퀴어>는 대표적 예시다.

작가의 초창기 필명부터 '윌리엄 리'다. 즉 본인이 작가로 자리를 잡기 전 20-30대 청춘을 장식한 온갖 기행과 방황을 온몸으로 구현하는 존재이자 '오너캐'인 셈이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 <퀴어>를 관통하는 맥락을 관객이 독파하려면 원작자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영화 한 편 보려는데 뭐 이리 따지는 게 많아?' 할 이들이 적지 않을 게 눈에 선하다. 하지만 기왕 루카 구아다니노의 신작에 도전하려면 관람 앞뒤로 이는 필수다. 기왕 도전할 것, 제대로 '뽕'을 뽑으려면 그래야만 한다. 이건 친절한 조언임을 나중에라도 깨닫고 말 테다. 일단 훈수는 여기까지.

모호하되 치명적인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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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순차적으로 3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전개된다. 소설의 내용을 적절히 축약해 각색한 덕분에 기본 뼈대는 갈빗대 하나 제외하지 않으면서도 2시간 반이 안 되는 상영시간으로 완성되었다. 어떤 이들은 3시간이라는 원래 버전을 볼 방법 구하려 혈안이 되겠지만 말이다.

모든 게 청결하고 얌전하게 틀에 박힌 미국과는 전혀 다른, 열정과 폭력이 날것 그대로 해방된 멕시코시티가 첫 무대를 빛낸다. 이 도시에서 리를 비롯한 일단의 미국인 여행자와 체류객들은 영원한 이방인에 불과하다. 그들은 광활한 3세계에서 지극히 한정된 영역에만 머문다. 미국에 싫증이 나서 떠났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이 땅에 정착해 동화될 용기 내기란 쉽지 않다. 리 역시 그런 부류의 전형에 속한다. 이 도시의 매력에 취하지만, 깨고 나면 공허함이 밀려든다. 온전히 소속감을 얻거나 내면의 안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늘 쾌락을 좇고 권총을 휴대하는 건 그런 속내의 발산이다.

그러다 마침내 애타게 찾던 상대를 만난 것 같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유진은 리가 아니니까. 하지만 단순히 육욕을 넘어 영혼의 단짝이라 멋대로 규정한 리는 유진의 모든 걸 교감하고 싶다. 그런 갈망은 다양한 형태로 발휘된다. 때로는 그저 부유한 중년 동성애자가 자신의 능력을 활용한 '플러팅'으로, 종종 짜증날 법한 집착으로, 간혹 연약한 면모를 기꺼이 공개하며 촉발되는 동정심으로 구현되지만, 그 모든 행위의 본질은 비트 세대가 추구하던 온전한 소통과 공감대로 수렴된다.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도에 힘입어 영화는 소설에서 신비롭게 묘사된 초현실적 순간들을 더없이 몽환적으로 구현한다. 종종 관객은 이게 어디까지가 극중 실제고, 어디부터가 인물의 뇌내망상인지 구분하느라 애를 먹을 테다. 그 경계가 너무나 모호하기에 두뇌 회로가 고장이 나더라도 자책할 필요는 전혀 없다. 처음부터 그런 의식과 무의식의 혼재와 교차가 당연한 효과이자 이 영화가 추구하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라틴아메리카의 다채로운 배경, 귓가를 울리는 음악이 쉴 새 없이 밀고 당기며 조석간만의 효과처럼 거대한 흐름을 조성한다.

우리에겐 제인스 본드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리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는 이미 퀴어 배역을 여러 차례 소화했다. 여기에 소설에서 걸어 나온 듯 오진을 담당한 드류 스타키의 활약이, 보고만 있어도 숨이 턱 막히는 순간들을 영화 내내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이건 직접 봐야 이해 가능한 영역의 문제다. 여기에 익숙한 얼굴들 대신에 적재적소에 실화라면 그 자리에 당연히 있을 법한 캐릭터를 기용해 자연스러움을 부각한다. 거장 칭호가 아깝지 않은 천의무봉의 연출력인데, 하기야 전형적 서사 구조론 도저히 영상화하기 어려운 윌리엄 버로스의 원작에 도전하려면 그 정도 내공과 각오는 당연히 기본 준비였던 셈이다.

현대적 해석이 가미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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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난이도 최강 원작을 어떻게 요리했을까 두근거리며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던 관객에게 어두컴컴한 극장 스크린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하면, 귓가에 익숙한 배경음악이 들려온다. 1990년대 등장해 불꽃처럼 기성품이 되어버린 주류 대중음악계를 불태운, 혹은 점잔 빼고 연미복 차려입고 침묵하는 객석에 폭탄을 투척하듯 활약한 뒤 자신을 불사르듯 사라진 그룹 너바나의 명곡들이 흐른다. 1950년대 배경 원작에 갑자기 웬 얼터너티브 록이지 하며 당황할 이들이 적지 않을 테다.

음악감독을 맡아 호흡을 맞춘 트렌트 레즈너의 탁월한 선구안에 이마를 탁하고 쳤다. 왜 수많은 이들이 여전히 윌리엄 버로스의 작품에 이끌리는지, 어떻게 보면 그저 약물 탐닉과 허무주의로 귀결된 시대 현상이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새삼 돌아보게 되니 말이다. 비트 세대 중 윌리엄 버로스가 상징하던 그룹은 자유 방임주의에 가까웠지만, 그들을 계승한 1960년대 히피 세대는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던 이상을 진화시켜 인권과 반전운동을 통해 세상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사상적 지향으론 어쩌면 결이 달랐을지언정, 바로 직전 세대의 고정관념에 균열을 낸, 그야말로 둑에 구멍을 터뜨린 효과로 태어난 세대인 것이다.

1990년대 '시애틀 그런지'로 출발해 세계 음악계를 뒤엎은 대변혁의 시대에 전자음악으로 한 축을 담당했던 트렌트 레즈너가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자신 역시 대서양을 넘나들며 1970-80년대 불씨를 지핀 펑크 음악의 기틀 위에서 피어난 존재니 말이다. 그저 음악적 형식을 넘어 그들이 혁신적인 음악에 담으려던 새로운 변화와 해방의 기운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고, 루카 구아다니노란 소설의 오랜 애독자가 품은 뜻도 같다는 의기투합의 증명이라 하겠다.

1950년대 비트 세대는 10년 후 히피 세대로, 다시 상업적인 무슨 무슨 세대 어쩌구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계승 발전을 이어갔다. 그렇게 앞 세대의 도전과 실패를 딛고, 미지의 영역, 가지 않은 길을 향한 미래 세대의 행진은 중단된 바 없고, 여전히 실험 중이란 메시지다. 즉 단지 배경음악 선정만으로 영화와 작가의 태도를 유추 가능한 셈이다.

그런 찰나들, 뭐라 설명할 순 없는데 끈질기게 따라가다 보면 목격할 수 있는 어떤 장면들이 있다. 리가 입버릇처럼 자신을 설명할 때 쓰던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존재, 식물학자가 경고하던 '텔레파시'의 실체, 접하지 않은 세계로 통하는 '문' 같은 상징들이다. 그런 뇌리에 새겨지는 이미지와 형언하기 힘든 결말을 조합하는 공식은 수천, 수만 개가 나와도 모자랄 테다. 창문은 열려 있고 거울은 자신을 비춘다. 모든 모험엔 위험과 대가가 따른다.

그런 사려 깊은 태도와 명확한 구현 의지를 오롯이 (영화 속 리가 갈구하던 것 마냥) 근접하려면,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추상적으로 묘사된 장면과 맥락을 따라잡기 위해 결국에 소설 원작을 읽고, 윌리엄 버로스와 그의 친구들을 추적하는 긴 모험에 발을 들여야 할 노릇이다. <퀴어>는 그렇게 만든 이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지는 영화다.

<작품정보>

퀴어
Queer
2024|이탈리아, 미국|드라마, 로맨스, 시대극
2025.06.20. 개봉|137분|청소년관람불가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드류 스타키 외
원작 윌리엄 S. 버로스 - 소설 《퀴어》
수입/배급 ㈜누리픽쳐스

 <퀴어> 포스터
<퀴어> 포스터㈜누리픽쳐스


퀴어 루카구아다니노감독 윌리엄버로스 다니엘크레이그 드류스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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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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