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브로드> 스틸컷
스튜디오 에이드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태민(장성범 분)과 민지(임영주 분), 두 한국인 커플이 공항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미네소타에 도착했지만,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데다 연착까지 하는 바람에 늦은 밤이 된 상황. 기관지 천식으로 장시간 비행이 힘들었던 남자로 인해 게이트는 더 늦게 나올 수밖에 없었고, 렌터카 업체는 영업 종료, 공유차 앱으로 예약한 차는 늦게 도착하는 등의 불편한 순간을 연이어 마주하게 된다.
어렵게 도착한 숙소에서도 그런 상황은 계속된다. 자동차로도 수십 분을 달려야 할 정도로 외딴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커튼 하나가 없고,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는 것은 물론, 냉장고도 옷장도 텅텅 비어 있다. 간단한 문장을 말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영어를 조금도 하지 못하는 남자 대신 여행을 주도해 왔던 민지와 모든 계획과 예약을 도맡았던 여자의 치밀하지 못한 점이 짜증 나는 태민. 잠시 부딪히는가 싶던 두 사람의 갈등이 채 고조되기도 전에 민지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영화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지오바니 푸무 감독의 데뷔작인 영화 <어브로드>는 여행 첫날, 예고도 없이 실종된 여자친구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낯선 도시의 숙소에서,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민지. 그리고 그의 남자 친구인 태민에게 곧 쏟아지기 시작하는 차가운 의심과 누명이 극의 중심에 있다. 영화 전반에 걸쳐 꽤 익숙한 장면이 배치되는 것과 달리, 감독은 간결함을 유지하면서도 불안한 정서를 조성하고 긴장감 있는 톤을 유지하는 일에 깊이 몰두하고자 한다.
02.
영화의 다른 장면을 이야기하기 전에, 초반부에서 제시되는 장면 하나를 먼저 떠올려봐야겠다. 공유차 앱으로 수배된 차를 타고 태민과 민지 커플이 숙소에 처음 도착하는 지점이다. 이때 카메라는 두 사람만 현장에 남겨 두고 후진으로 빠져나가는 차량에 달린 카메라로 그 모습을 담아낸다. 비까지 내리는 어둡고 깜깜한 산장에 낯선 외국인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겨놓는 이미지가 꽤 강렬하게 자극되는 순간이다. 이때 태민과 민지가 느끼게 되는 감정, 그 낯설고도 서늘한 심리를 쫓으면서도 좁혀가는 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환기다.
오로라라는 신비로운 대기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 해외로 여행 온 두 젊은 남녀의 심리를 영화는 이미 몇 차례 좁혀 온 바 있다. 앞서 설명했던 공항에서의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상황. 그리고 아직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숙소로 향하는 차량 내부에서 경험한 몇 가지 일로 인해서다. 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의 과속, 정체를 알 수 없는 차량과의 일촉즉발의 상황 등이 여기에 속한다. 심지어 운전기사는 '숲을 배회하는 늑대 무리를 주의하라'며 경고까지 하는데, 이 모든 사건은 사소해 보이지만 두 여행객의 마음을 기대로부터 불안으로 옮겨놓기에 부족하지 않다.
물론 이와 관련한 어떤 사건이 가까운 미래에 펼쳐질 것으로 예측하게 되는 것은 극 중 인물만이 아니라, 이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오바니 푸무 감독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와 장면 내부에 충분한 의심을 감춰놓는데, 이는 이후의 장면들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영화 <어브로드> 스틸컷
스튜디오 에이드
03.
"제 눈에는 민지 양이 보이지 않아서요."
'의심을 감춰놓는다'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민지가 갑자기 사라지게 되는 극의 변곡점 이후 이야기를 따르다 보면 영화가 크게 두 계층의 레이어로 미묘하게 분리돼 있음을 알게 된다(교차하는 식의 정확하고 명확한 분리는 분명 아니다). 하나는 실종된 여자친구를 찾기 위해 직선적인 형태로 앞으로 나아가는 태민의 모습과 관련한 중심 흐름이다. 조금 의아해 보일 법한 설정이나 상황 위에서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혹은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고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나아가는 태도를 보인다.
또 다른 하나는 관객의 입장에서 그런 당황스럽거나 영화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고 감추어 놓음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유격의 지점들이 연결돼 형성하는 주변 흐름이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 민지에게 의지하는 설정이던 태민이 사건 발생 이후 갑자기 유창하게 보안관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 경찰서에 갇혀 있던 그를 이유도 없이 갑자기 탈출시켜 주는 여순경.
역시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자신이 대신 붙잡히면서까지 태민을 도와주는 여성의 모습이 여기에 속한다(그는 어제 공유차의 조수석에 함께 타고 있던 사람이다). 심지어 후반부에서는 민지로 보이는 여성이 배관공과 다정하게 지내고 자신을 찾아온 태민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다시 설명하면, 극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분명 태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순간마다 요철처럼 등장해 관객의 인식 속에 무언가 매끄럽지 않은, 다른 이질적인 설정이 연속적으로 주어지고 있음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이 주변 흐름에 속한다.
다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심 흐름과 달리 그 아래에 놓여 있는 또 하나의 레이어는 파편적으로 분산돼 있고, 이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게 되고 난 뒤에야 정확히 인식할 수 있기에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짙게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전통적인 의미의 서스펜스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끌어내는 요인이라고는 볼 수 있다.
▲영화 <어브로드> 스틸컷스튜디오 에이드
04.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다했어요. 이제 본인들에게 달렸어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 낯설고도 서늘한 심리를 쫓으면서도 좁혀가는 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환기'는 태민이 끝까지 쫓아서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 영화가 끊임없이 상황적 제약을 통해 인물로부터 회수하고자 하는 것에 속한다. 함께 여행을 떠나온 순간의 마음과 예상과 달리 무엇 하나 제대로 계획처럼 되지 않을 때의 마음. 그마저 의지하던 여자 친구가 갑자기 실종된 이후의 감정과 의심까지 받고 경찰에 쫓기는 순간의 심리. 마지막으로 어렵게 찾아낸 여자 친구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물론 칼까지 들고 저항할 때에 이르기까지 태민이 경험하게 되는 감정의 변화 및 상황적 데크레셴도(decrescendo).
결말의 중요한 스포일러와 연결되기에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모든 과정은 후반부에서 영화의 초반부로 다시 돌아가 장면과 장면 사이를 잇기 위해 시도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메인 스트림이 아니라 이를 시종일관 이상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레이어 한 겹 아래의 감춰진 설정들인 셈이다. 운전기사가 말했던 '숲 속 늑대의 위협'이 어쩌면 관객들에게는 몇 번의 이런 장치들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고.
영화 <어브로드>는 분명히 새롭거나 기발한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작품은 아니다.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의 주요 서사와 그 아래에 감춰놓은 설정들의 미묘한 거리가 핵심이다. 보여주기는 하지만 들키지는 않을 수 있을 정도의 구조를 놓치지 않는 것.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톤을 유지하는 것, 한 장소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것,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자 하는 것 모두가 이를 위해 존재한다.
이를 구조적 변주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오바니 푸무 감독이 만약 앞으로의 작업에서도 지금과 다른 형식으로 또 다른 우회적 구조를 완성해 낼 수 있다면, 주목해 볼만한 인물이 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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