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멜로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주로 가난하고 몸도 약하고 청순한 캐릭터들이 많았다. 그렇게 남자 주인공과 힘들지만 예쁜 사랑을 이어가던 여자 주인공이 드라마 후반 갑자기 쓰러지면서 시한부 판정을 받으면 애절한 '수도꼭지 멜로 드라마'의 서사가 완성된다. 실제로 최지우와 손예진, 송혜교 등은 드라마에서 이런 캐릭터를 연기해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드라마에서 표현되는 여성 캐릭터의 색깔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하지원 분)처럼 남자보다 강한 신체 능력 가진 액션배우도 있었고 <스물 다섯 스물 하나>의 나희도(김태리 분)와 고유림(김지연 분) 같은 펜싱 국가대표 선수도 있었다. 이제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더 이상 남자 주인공 품에 안겨 눈물만 흘리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진취적이고 씩씩한 여성 캐릭터가 일과 사랑을 모두 쟁취하며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는 2005년 MBC에서 방송됐던 이 드라마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주인공을 연기한 슈퍼모델 출신 배우가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10kg 가까이 살을 찌우며 열연을 펼친 작품이다. 바로 2005년 초여름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김선아 주연의 MBC 수목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었다.

김선아의 전성기를 활짝 열어준 대표작

 김선아는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의 열연을 통해 2005년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김선아는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의 열연을 통해 2005년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MBC 화면 캡처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과 미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김선아는 미국 인디애나주의 볼 주립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던 1995년 슈퍼 엘리트모델 선발대회 출전을 계기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김선아는 1996년 '낯선 여자에게서 그의 향기를 느꼈다'는 카피로 유명한 화장품 광고에 출연하며 주목 받았지만 데뷔 초 어색한 연기와 좋지 못한 발음을 지적 받으면서 배우로서 크게 도약하지 못했다.

그러던 2003년, 김선아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박중훈 분)의 아내 역으로 특별 출연하면서 존재감을 뽐냈고 <위대한 유산>과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S 다이어리 >,<잠복근무>에 차례로 출연했다. 그렇게 2000년대 초반 영화에 집중하면서 배우로 자리매김한 김선아는 2005년 <황금시대> 이후 5년 만에 출연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주인공 김삼순 역을 맡았다.

영화에선 상승세를 타고 있었지만 드라마에선 검증되지 않았던 김선아가 단독 주연인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솔직·당당한 매력의 김삼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극찬을 받았다. 김선아가 '인생연기'를 선보인 <내 이름은 김삼순>은 최고 시청률 51.1%를 기록했고 김선아는 2005년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포함해 4관왕을 휩쓸었다(닐슨코리아 수도권 시청률 기준).

배우로 한창 활동하던 2003년 경희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김선아는 연기와 학업을 병행했고 2009년 6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며 공로상을 받았다. 2009년 김은숙 작가의 신작 <시티홀>에서 10급 공무원에서 시장이 되는 주인공 신미래를 연기한 김선아는 2011년 <여인의 향기>에서 이동욱과 호흡을 맞췄다. 다만 2012년에 출연했던 <아이두 아이두>는 <각시탈>과 <유령>에 밀려 아쉬운 성적을 남겼다.

2010년대 중반까지 히트작을 내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졌던 김선아는 2017년 jtbc의 <품위 있는 그녀>를 종편드라마 최초로 두 자리 수 시청률(12.1%)로 이끌며 재기에 성공했다. 2018년에는 <키스 먼저 할까요?>를 통해 상대역 감우성과 SBS 연기대상을 공동 수상했다. 김선아는 2020년대에도 jtbc의 <디엠파이어: 법의 제국>과 채널A의 <가면의 여왕>에 출연하며 다양한 장르의 연기에 도전하고 있다.

OST와 양머리까지 유행시킨 '삼순이 신드롬'

  <내 이름은 김삼순>에 출연한 김선아.
<내 이름은 김삼순>에 출연한 김선아. MBC

2010년대 이후부터 케이블과 종편, OTT까지 시청자들의 채널 선택권이 다양해지면서 지상파 드라마의 시청률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실제로 과거엔 '못해도 30%, 잘하면 50%'이라던 KBS 주말드라마의 시청률도 최근엔 시청률 20%를 넘기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2005년 MBC 수목드라마로 방송된 <내 이름은 김삼순>은 수도권 기준으로 평균 38.1%, 최고 51.1%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여러 우연들이 겹쳐 연인이 되는 남녀 주인공과 여주인공 앞에 나타나는 백마 탄 왕자 같은 재벌 2세, 몸이 아픈 남자 주인공의 첫사랑 등 멜로 드라마의 뻔한 설정들을 대거 담고 있다. 하지만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2006년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수상한 김도우 작가는 뻔한 설정들을 신선하게 비튼 현실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잘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신드롬'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아시아 각국은 물론이고 튀르키예와 헝가리 등 유럽 일부 국가에서도 방영돼 인기를 끌었고 태국과 필리핀에서는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삼순이가 찜질방에서 만들어서 썼던 '양머리'는 찜질방의 필수 아이템이 됐고 "숨겨왔던 나의"로 시작되는 클래지콰이의 OST <She Is>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삼순이는 드라마 속에서 예쁘지도 날씬하지도 젊지도 않은 엽기발랄 고졸 노처녀 파티시에라는 설정으로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는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30살은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고 '세계3대 요리학교'로 불리는 프랑스의 르 꼬르동 블루에서 유학을 한 삼순이의 스펙은 파티시에로서 상당히 높은 편이다.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삼순이가 처한 현실이 지나치게 낮게 설정됐다는 뜻이다.

MBC는 드라마의 인기를 등에 업고 그해 추석 <삼순이 선발대회>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삼순이를 뽑는다'는 기획 의도는 그럴듯했지만 평범하지만 솔직 당당했던 삼순이의 매력을 살리긴커녕 체격이 크고 욕 잘하는 삼순이의 외형적인 모습만 희화화시켰다. 방송 후에는 당연히 "삼순이의 '욕'을 욕 보이지 말라", "삼순이와의 추억을 더럽히지 말라"는 시청자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한예슬 대타로 들어와 '국민 전 여친' 등극

 정려원은 첫 정극 드라마였던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기대 이상의 호연을 선보이며 '국민 전 여친'에 등극했다.
정려원은 첫 정극 드라마였던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기대 이상의 호연을 선보이며 '국민 전 여친'에 등극했다.MBC 화면 캡처

시트콤 < 논스톱4 >를 통해 주목 받은 현빈은 영화 <돌려차기>와 드라마 <아일랜드>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배우로서 큰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던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교통사고로 형을 잃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레스토랑 사장 현진헌을 연기하며 김선아와 유쾌하면서도 애틋한 로맨스 연기를 선보였다. 지금도 많은 시청자들은 <내 이름은 김삼순>을 현빈의 출세작으로 기억한다.

삼순의 라이벌이자 진헌의 첫사랑 유희진 역은 현빈과 < 논스톱4 >에 함께 출연한 한예슬에게 먼저 제안이 갔다. 하지만 한예슬이 SBS <그 여름의 태풍> 스케줄로 고사하면서 유희진 역은 걸그룹 샤크라 출신의 신인 정려원에게 돌아갔다. 당시 정려원은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 출연했을 뿐 정극 연기는 처음이었지만 유희진의 아련한 느낌을 잘 살린 연기로 오랜 기간 동안 '국민 전여친'으로 회자됐다.

정려원이 가수 활동과 시트콤을 통해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과 달리 혼혈배우 다니엘 헤니는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국내 시청자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미국에서 모델로 활동하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희진의 주치의 헨리 킴을 연기한 다니엘 헤니는 이국적인 매력으로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다니엘 헤니 특유의 화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데뷔 초 드라마 <딸부잣집>에서 다섯째딸이자 뮤지컬배우 권소령을 연기하며 주목받은 이아현은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삼순의 둘째 언니 김이영을 연기했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미국에 갔다가 이혼하고 돌아왔지만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는 인물이다. 초반까지 주로 삼순에게 충고하는 역할을 맡았던 이영은 삼순이 일하는 레스토랑의 총재배인 현무(권해효 분)와 러브 라인이 생긴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작년 OTT 채널 Wavve에서 8부작으로 압축된 감독판이 공개되기도 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작년 OTT 채널 Wavve에서 8부작으로 압축된 감독판이 공개되기도 했다.<내 이름은 김삼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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