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 스틸컷서울독립영화제
언젠가 유명한 자기계발서 작가가 말했다. 우울한 사람, 부정적인 사람과는 거리를 두라고. 기가 빨리고 부정적인 기운이 전염된다나. 내게 눅눅하게 붙어사는 우울함은 땀구멍마다 비명을 질러댔을 것이다. '차라리 웃긴 사람이 되자'라는 전략도 실패했다. 자기계발서에 따르면 농담으로 방어하는 태도조차 가볍고 만만한 사람의 전형으로 경계의 대상이었다. 결국, 방치된 우울함과 훈련된 가벼움 사이에서, 나를 피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을 만들며 그럭저럭 살고 있다. 기분 나쁠 때 걷어차이는 기분 나쁜 돌처럼.
한번은 우울증 약을 복용 중인 사람을 만나 서로의 증상을 경쟁하듯 털어놓았다. 기운은 빠지지 않았다. 서로 기를 빨면서 동시에 보충한 것이었을까. '기빨림' 이론이 다른 방법으로 증명된 셈이다. 그날 이후 소외를 감내해야 한다는 비관이 느슨해진 것 같다. 방어막을 들추고 누군가에게 다가선다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었고, 서로의 밝고 진중한 내면을 발견하기도 했다.
침묵의 기술
슬픔은 짧게, 불안은 조용히. 사회는 감정에조차 경계를 요구한다. 그 선을 넘으면 '감정 조절에 실패한 사람'이 되고, 속마음을 보이면 '정서적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된다. 예측가능하고,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며, 감정을 조율할 줄 아는 사람이 회사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조금씩 배운다. 말하지 않고, 울지 않고, 불편을 만들지 않으면서 윤리처럼 보이는 침묵을.
이 침묵의 기술은 자본이 훈련시킨다. 자기계발 강사의 화려한 언변, 책, 기업의 '정서 관리' 프로그램과 기업윤리를 통해서다. 회사는 복잡한 얼굴을 싫어하고, 판단을 유보하는 사람을 답답해하며, 감정을 생산성의 장애물로 여긴다. 특히 부당함이나 불의, 불편함에 대한 감정을 삼키는 것이 책임감으로 포장되고, 조용한 동의가 구성원의 미덕이 된다. 그렇게 침묵은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구조가 부여한 생존 방식이 된다.
영화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침묵의 얼굴들을 따라간다. 경남의 중견 조선소. 구조조정이 예정된 이곳에서 한 인물이 인사팀으로 발령받고, 해고 대상자를 선별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는 말없이 괴로워하지만, 그 고뇌는 개인의 도덕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자신이 알고 있던 타인의 삶이, '명단'이라는 이름의 셀에 의해 정리될 수 있다는 현실과 마주하는 순간 출현한다. 그 순간은 다정한 직장 동료가 문서 속 한 줄로 치환되는 기이한 장면이며, 그렇게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내면에 금이 가는 시간이다. 위임된 책임, 훈련된 죄책감, 감정의 기계화, 무력해진 공동체. 이 모든 것이 그를 둘러싼다.
영화 초반, 인사팀이 해고자 리스트를 작성하는 장면은 냉정하고 차분하다. 그들은 회장과 채권단의 요구를 '생존'이라 번역하며, 누군가의 이름을 지운다. 명단은 '해야 할 일'이라는 "합리적 도려냄"으로 포장되지만, 곧 상층부의 임의적 수정이 개입된다. 그 순간, 인사팀 내부의 희미한 저항은 사라지고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복종만 남는다.
이어지는 일대일 면담 장면에선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의 강요, 침묵과 망설임, 복도에서 굳은 얼굴로 나서는 사람들을 감정 없이 비춘다. 누군가는 펜을 들어 서명하고, 누군가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유를 묻지만, 끝내 110명이 회사를 떠난다.
그러나 떠난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함께 싸울 언어, 나누었던 감정, 동료라는 이름. 그 모든 것이 함께 빠져나갔다. 소수의 잔류자만이 영화 말미에 남는다. 그런데 남은 자에 대한 정리해고가 진행되려던 시점,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함께 구조조정은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중단된다.
'생존'이라는 말이 결국 자본의 입맛에 맞는 선택적 논리였음을 이 장면은 말해준다. 끝까지 버틴 자들이 살아남지만, 이는 공정도, 이성도, 투쟁의 결과도 아니다. 구조는, 말 그대로 구조였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된 방향의 문제였다.
남아있는 질문들
주인공 강준희는 혼자 고통스러워하고 혼자 울부짖지만, 그는 묵묵히 명단을 작성하고 면담에 동석하며, 결국은 명령을 '그대로 수행'한다. 나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착한 사람도 나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라는 익숙한 서사에 이입되지 않기 위해 차갑게 보려 애썼다. 나쁜 놈을 '놈의 사정'으로 매력적으로 만들고야 마는 신파적 감정 조작에 질려 있었던 탓에,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강조하는 게 조금 불안했다. 자칫 슬픔을 관리하는 자의 고통을 부각하다 보면, 구조의 얼굴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해야 할 일>은 그런 서사로부터 거리를 둔다.
"이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야."
영화 속 인사팀 직원이 던지는 이 말은 영화 전체를 응축한 문장이다. 무겁고 공허하다. 누군가는 그것을 책임감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영화는 그 말의 배경을 차갑게 따라다니며 묻는다.
"누가, 무엇을, 왜 결정하고 있는가?"
"이 일이 정말 해야만 했던 일이었는가?"
이 침묵은 개인의 윤리적 고민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설계한 감정의 궤도다. 감정은 표현되지 않도록 훈련받았고, 윤리는 위임됐으며, 말하지 않는 것이 적응의 방식이 됐다. 사회는 비명을 삼키는 방식으로 개인을 조정하고 죄책감을 내부로 밀어 넣는다. 문제는 늘 개인에게 전가되고 구조는 가려진다.
이 영화엔 딱히 악한 사람이 없다. 진짜 악의 얼굴은 유령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모두가 괴로워하고 설득하고 자신을 정당화한다. 인사팀은 명단을 작성하며 서로의 고단함을 토닥이고, 노조는 구조조정 한가운데서 침묵의 거래를 택한다. 대결도 구호도 없다. 다만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입을 다문 얼굴들과 무너진 공동체의 자취만이 남는다.
<해야 할 일>은 특정 인물의 정의감이나 결단을 부각하지도 않는다. 대신 우리가 어떻게 구조에 동조하는가를 보여준다. 이는 조선소나 명단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누구의 노동을 평가하고, 누가 누구의 존재를 지워왔는가에 대한 사회의 질문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무표정한 표정을 짓는다. 공동체의 언어는 점점 사라지고 상대의 기분을 언짢게 할 감정은 꼭꼭 숨긴다. 공감은 효율에 밀리고, 연대는 사적인 감정으로 축소된다. 결국, 갑갑한 질문들을 맴돌게 할 뿐, 영화는 설명하지 않고 장면을 오래 붙든다. 그 시간은 너무 조용해서 슬프다. 침묵은 관객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건 내가 선택한 시선인가, 아니면 선택하게 만들어진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짜 우리가 해야 했던 일은,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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