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세기의 사나이> 메인 포스터
연극 <세기의 사나이> 메인 포스터극단 명작옥수수밭

극장을 향하면서도 마음은 며칠 전 그와 나눴던 대화에 머물렀다. 당시에 인터뷰("낭독회에서 배우들 눈물, 그때 깨달았죠" 연출가의 고백 https://omn.kr/2dzwa)가 끝날 무렵, 최원종 연출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다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 들어섰을 때, 문득 마음 한 켠이 무거워졌다. 나는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

지난 5월 25일, 공연을 앞둔 로비는 활기가 띄었다. 매표소 앞에 선 관객들, 복도에 비치된 프로그램북을 넘기는 손끝, 무대 조명 틈새로 새어 나오는 빛. 그 모두가 공연 전의 정적을 깨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을 준비했다. 무대는 단출했고, 설명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무대 앞에서, 오히려 많은 이야기가 들려올 것 같았다. 아직 객석의 불이 꺼지기 전, 무대 한쪽에서 은은한 조명이 비춘다. 화려함도, 위압감도 없는 무대.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조용히 내 옆자리에 앉아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처럼 정적 속에 기운이 감돈다.

이내 객석이 모두 채워지고 불이 꺼졌다. 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이 아니다. 박덕배라는 이름을 가진 이 보통의 남자를 따라, 그 시절로 이동하는 목격자가 된다.

이름 없는 생애, 그러나 모두의 초상

연극 <세기의 사나이>는 한국 근현대사를 격렬하게 겪어낸 한 남자의 삶을 따라가며, 동시에 그 남자가 아무런 격렬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관객을 당황시킨다. 극의 주인공 '박덕배'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겪은 시간과 사건은 분명히 실재했던 것들이다.

그는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민주화운동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학자나 예술가로 이름을 남기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처한 시대에서 묵묵히 살아남은 사람일뿐. 연극은 그가 경험한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정면에서 조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건들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침묵했는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무대의 시작은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던 귀국선 우키시마호의 폭발 사고. 덕배의 형이 그 배에 탑승해 있었다. 관객에게는 구체적인 사고 영상이나 설명이 주어지지 않지만, 무대 위 조용한 조명과 덕배의 목소리 하나로 그 사건의 무게가 전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형, 돌아오지 못했어요. 해방 날, 바다 밑으로 사라졌습니다." 연극은 해방을 기쁨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기를 상실의 출발점으로 바라본다. 박덕배에게 해방은 나라의 기쁨이 아니라 형을 잃은 날로 각인된다. 그리고 이 감정은 이후 그의 생애를 통과하는 정조가 된다.

덕배는 이후 여러 사건의 주변을 지나간다. 친구 길자중이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는 모습을 배웅하고, 또 다른 친구 배민국이 일제에 협력하는 길을 택하는 것도 지켜본다. 그는 어느 쪽에도 서지 않는다. 판단을 유보한 채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그의 침묵은 비겁함이라기보다 그 시절을 살아가는 한 시민의 보통의 선택이었다. 그는 매일 공장에서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세금 고지서를 들여다보며 하루를 산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가 아는 가장 많은 사람들의 표본' 같은 존재다. 최 연출가는 필자와의 지난 만남에서 이렇게 속내를 드러냈다.

"어떤 특정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묵묵히 지나온 이름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고백

어느새 조명이 바뀌고, 무대의 색감이 바래질 즈음. 한 남자가 커피잔을 들고 서 있었다. 숨죽인 객석 속에서 나는 문득 그가 우리 옆집 아저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평범한 얼굴, 너무나 익숙한 말투. 그런데 그 얼굴에서, 누군가는 오래된 아픔을 떠올렸고, 또 누군가는 오늘 자신의 일터에서 마주하는 무력감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일상은 반복될 뿐이다. 그는 정치와 관련된 집회에 나간 적도 없고, 언론사에 기고를 한 적도 없다. 그가 일으킨 파동은 없지만, 그는 시대가 만들어낸 수많은 상흔을 제 몸으로 견디며 살아냈다. 그의 고요는 무관심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혼자 중얼거리고 반문하며 자신을 쥐어짜는 고요 속에서 매일을 버텼다. 이 점에서 덕배는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어딘가에서 본 듯한 누군가가 겹쳐진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 어쩌면 옆집의 조용한 가장, 혹은 자신의 거울 속 얼굴일지도 모른다.

공장의 기계음, 복사기의 작동음, 그리고 싸늘한 전자우편 하나로 인생이 정리되는 장면은 압도적인 침묵으로 표현된다. 관객은 그 장면을 응시하며 질문하게 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가?"

그러나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평균적인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평균성 안에 스며든 무게, 죄책감, 그리고 시대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주요한 서사의 흐름을 이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전태일의 죽음 이후 덕배가 조용히 고개를 떨구는 순간이다. 그는 분노하지 않는다. 구호를 외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침묵이야말로 이 연극이 말하는 시민의 자의식이다. 그가 한 대사처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싸우지도,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죄스러웠습니다." 이 고백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작품은 후반부에 접어들며 현대사로 진입한다. 박덕배는 계약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해고 문자를 받는다. "계약 해지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한 줄의 문장은 덕배의 삶 전체를 갈무리한다. 그가 겪은 수십 년의 노동이 문장 하나로 정리되는 현실. 그는 이 상황에서도 항의하지 않는다. 다만 다시 커피를 따르고, 조용히 사무실의 풍경을 바라볼 뿐이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울지 않지만, 깊은 정적이 흐른다. 이 장면에 대해 최 연출가는 지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대의 언어는 감정을 삭제합니다. 계약 해지라는 말은 사실상 사형선고지만, 누구도 화내지 않죠. 모두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사회예요."

살아냈다는 사실 자체로 의미 있는 존재

무대 한가운데, 아무 장치도 없이 조명만이 덕배의 얼굴을 비추는 장면은 이 연극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이다. 말도, 움직임도 없지만 관객들은 그 고요한 얼굴을 보며 마음속 어딘가가 조금씩 흔들린다. 나는 그냥 바라보았다. 그저 살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대 위 한 인간은 충분히 말이 되고 이야기가 된다.

죽음 이후에 주어진 33년이라는 시간은 단순한 연장이 아니다. 그것은 묻혀 있던 시간을 다시 살아낼 기회였고, 동시에 덕배라는 인물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소외'돼 왔는지를 직면하게 하는 장치였다. 저승사자와의 대화 장면은 오히려 이 연극에서 가장 철학적인 지점이다. '왜 나는 아직도 살아야 하죠?'라는 덕배의 질문은, 생존의 의미를 되묻는 모든 이들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무대 위에 특별한 변화가 없는 이 장면에서, 조명은 점점 더 덕배의 얼굴에 집중된다. 관객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떠오른 주름 하나, 입가에 맺힌 침묵 하나를 따라가며 자신과 주변의 누군가를 떠올린다. 이 연극이 '기억극'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다. 덕배는 단지 허구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한국 사회라는 무대 위에 함께 존재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상징이며,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한 살아 있는 증언이다.

"살아 있다는 건, 누구에게 기억되지 않아도, 하루하루 다시 시작하는 일이에요."

극의 절정은 덕배가 총에 맞고 죽는 장면에서 펼쳐진다. 그러나 그 죽음은 실수가 된다. 그는 원래 죽을 운명이 아니었고, 그래서 저승사자는 시간을 사고 다시 돌아오라는 제안을 한다. 덕배는 33년을 사고 살아난다. 이 비현실적인 설정은 오히려 사실보다 사실처럼 느껴진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삶을 이어간다. 퇴직 이후에도 일하고, 연금을 기다리며 시간을 끌고, 더는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오늘을 살아간다. 덕배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저, 살아냈을 뿐입니다." 그는 위대한 변화를 이룬 사람은 아니지만, 살아남은 자로서 존재를 증명한다.

연극 <세기의 사나이>는 정치극도 아니고 영웅서사도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기억극'이다. 역사 속에 이름 없이 지나간 사람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방식. 그들을 주인공으로 무대 위에 세움으로써, 관객은 그 안에서 자기 자신과 가족, 혹은 아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최 연출가는 이 작품을 두고 "말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들의 시간을 복원하고 싶었다"고 했다. 작품은 그 복원의 시도를 조용하고도 묵직하게 수행한다. 누군가에겐 극적이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그 밋밋한 하루들이 쌓여 이 사회의 뼈대를 이루었다는 것. 숨죽이며 일하고, 감정을 삼킨 채 버티고, 묵묵히 걷던 이들의 이름 없는 생이야말로 시대의 기둥이었다. 이 연극은 그 진실을, 잊지 않는다.

극이 끝나고 조명이 꺼진 후에도 박덕배의 말은 오래 남는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죄스러웠습니다." 이 말은 단지 한 인물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시대에 대한 성찰이다. 이 연극은 끝까지 관객에게 직접적인 감동을 주려 하지 않는다. 눈물 짓게 만들지도 않는다. 다만 각자의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다시 꺼내어 바라보게 한다. 바로 그것이 이 연극의 감동 방식이며, 가장 현대적인 공연이 되는 방식이다.
연극 세기의사나이 최원종 리뷰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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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다. 그동안 문화예술 월간지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2016~2023)에서 객원필진으로 글을 썼다. 현재는 대학로에서 공연과 전시를 보며 현장을 담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를 만나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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