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는 일본 영화와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다. 중·고등학교, 또 대학교 학창생활 한편으로 취미라 부를 만한 활동에 매진하는 모습이 수시로 등장한다. 그저 활동 그 자체만을 다루지 않는다. 한 분야를 마음 다해 배워가는 것이 어디 지식이며 기술의 습득만으로 끝이 날까. 때로는 동아리 선후배며 동급생간 풋풋한 연애가, 또 때로는 우정과 경쟁, 열정의 피고 짐이 일어나는 것이다. 야구치 시노부의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 같은 영화부터, 고시엔을 꿈꾸는 소년야구 배경 작품들, 기타 다양한 동아리 배경 만화와 드라마, 영화가 끊이지 않고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에서 동아리 활동이 강조된 배경으론 여러 이유가 제기된다. 학업에만 매진하면 청소년의 심성이 강퍅해질 수 있다는 인식이 그 근간이 된다는 건 분명하다. 근대에도 문무겸비의 자세가 장려되기도 했거니와, 청소년의 체육과 예술활동을 강조한 미국의 영향 또한 적잖이 받았을 테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다. 마치 군국주의 시대 일본이 그러했듯, 모든 전력을 한 곳에 집중해 목표를 이뤄내야 한다는 자세가 청소년과 그 학부모 사이에도 선명히 자리한다. 경쟁일변도의 입시체계는 그 비효율을 우려한 교육당국의 노력에도 바꿔내지 못하였다. 한때는 'Club Activity'의 준말인 CA활동이라 해서, 학업 외 다양한 활동을 명목상으로나마 장려하긴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장려일 뿐이었다.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포스터
찬란
30년 간 변주된 여고생 청춘성장물의 힘
전국 수천 개에 이르는 일본 생활체육 동아리를, 한국은 엘리트 체육부 수십 개로 당해낸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저 체육뿐이 아니다. 클래식과 재즈, 락 등 음악부터, 문학과 회화, 연기, 무용 등 다른 예술분과들도 얼마 상황이 다르지 않다.
여기 일본 동아리 활동의 긍정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 한 편이 또 나왔다. 95분짜리 애니메이션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가 바로 그 작품이다. 시키무라 요시코의 1996년 작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애니는 과거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된 적 있던 이야기를 시차를 두고 극장판 장편 애니로 새로 제작했다. 말하자면 원작을 서로 다른 장르로 변주해 재탄생시키는 미디어믹스로, 근래 소재 고갈을 겪고 있는 일본 애니계가 내놓은 검증된 작품이라 하겠다.
원작은 작품 중 파이팅 구호를 딴 <힘내서 갑시다>로, 애니 제목을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로 바꾸어 달았다. 기빗올은 'Give it all', 직역하면 '전력을 다하다'란 뜻으로 역시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앞서 1998년 제작된 영화가 '화이팅 에츠코'로, 2005년 작 TV 드라마는 '힘 좀 냅시다요'로 방영된 걸 생각하면 원작이 대중 사이에 확실히 새길 만한 제목을 얻지는 못했다 보는 편이 타당하겠다.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스틸컷
찬란
여고생과 조정의 이색적 만남
무튼 신작 애니는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란 이름을 달고 한국 관객들과 만나게 됐다. 지난해 제26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초청됐던 작품을 찬란이 수입해 상영키로 한 것이다. 이 작품이 형태를 바꿔 때로 때때로 소환된다는 건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작품을 보자면 그 매력이 무엇인지가 선명히 드러난다. 눈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는 일본 동아리가 지닌 본래적 매력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부제가 보여주듯 여름을 긍정적으로 내보이는 계절감이 되겠다.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는 여고생들의 동아리 성장기를 그린다. 여고생 동아리를 다룬 작품이라 하면 앞서 언급한 <스윙걸즈>가 가장 먼저 떠오를 법도 한데,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는 그 소재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로 조정이다. 눈부신 바다 위에서 노를 저어 나아가는 조정이란 스포츠는 도무지 인문계 여고생들의 동아리 활동으로 익숙할 수가 없지 않은가. 바로 그 지점이 이 작품이 승부하는 바,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름의 성취를 얻어내는 여고생들의 노력이 다른 여느 분야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선명한 감동을 준다.
사쿠라기 유우헤이의 애니는 시종 두 가지 지점을 확고하게 지켜내려 든다. 하나는 조정이라는 이색적 스포츠의 매력이고, 다른 하나는 청춘성장물이란 익숙한 장르적 경로다. 이색적 매력과 익숙한 경로를 적절히 섞어가며 보는 이로 하여금 분명한 감동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가 의도한 승부수라 하겠다.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스틸컷
찬란
시원한 여름, 깊어지는 우정
이 같은 선택이 과연 틀리지가 않아서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일정부분 대리만족과 공감을 느끼도록 한다. 대리만족이란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전력을 다해 노를 저어가는 학생들의 모습으로부터 얻어진다. 조정이란 그리 흔하지 않은 취미다. 필요한 장비부터가 흔히 구하기 어렵고, 조정장이나 바다까지 나아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모든 조건이 갖춰진다 해도 드는 체력이 어마어마하다. 심지어 마음 맞는 팀원들까지 있어야 하니, 웬만한 이라면 상황이 되지 않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 가운데는 모든 것이 착착 맞아 떨어지니 대리만족하며 볼 수밖에.
공감 또한 분명하다. 여고생들이 바다로 나가 조정을 연습하고, 마침내 최고 수준의 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좌절하고 극복하며 의지하고 성장하는 과정이 결코 낯설지 않다. 누구나 어떤 분야에, 또 다른 이들과 협력해야 하는 부문에서 성장하고 성취해본 일이 있을 것이다. 이는 동아리 문화가 박약한 한국 교육과정에서조차 필수적으로 예비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이들은 주인공들이 더 나은 조정팀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며 저마다의 지난 시간을 떠올려보게 되는 일이다.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는 이처럼 안정적인 길을 걷는 애니다. 중요한 건 타고난 재능 뿐, 노력이란 쓸모없는 것이라 여기던 에츠코, 그런 그녀를 바꿔내는 조정이란 스포츠와 동료들의 존재가 그저 그런 단짝친구며 학교에서의 일상을 상회하는 자극을 준다. 기실 누구에게나 애니 속 인물들과 같은 경험이 있었을 테다. 누군가는 부모의 재력에서, 누구는 자기의 재능에서, 또 누구는 타고난 외모며 체력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 쉬운 포기 앞에서 인간이란 마땅히 제 앞의 장애와 부닥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교육이 할 일 아닌가 말이다. 입시일변도의 우리네 교육이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 바로 그를 바다 건너온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가 찬란하게 찌른다.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스틸컷찬란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는 성우진 또한 화려하다. 성우이자 가수로도 유명한 아마미야 소라, <최애의 아이> 속 '아이' 다카하시 리에, <귀멸의 칼날> 네츠코 목소리로 유명한 키토 아카리, 이들 만큼은 아니지만 실력파로 분류되는 야마미야 소라까지 포진했다. 성우진만으로 팬들을 줄 세울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작화며 장면연출만 놓고 보면 기라성 같은 일본 극장판 애니들 사이에서 아쉬움도 밟히지만,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만의 매력이 있단 건 부인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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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입시 위주의 한국 교육, 일본 동아리 문화에서 배워야 할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