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한국인 감독이 있다. 그는 칸영화제 감독주간(2009), 비평가주간(2025) 2회 초청을 받았고, 칸과 더불어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 경쟁(2010/2022/2024)에는 3회 오른 바 있다. 여기에 3대 애니메이션 영화제로 분류되는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그랑프리(2014) 수상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2006년부터 세계 유수의 영화제는 물론, 자신의 상상력을 토대로 한 그림책으로 국제도서전 행사에서 다수의 수상 경력도 가졌다. 이만하면 한국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명감독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테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감독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한다. 그가 애니메이션, 그중에서도 관객이 극장에서 접할 기회가 지극히 드문 단편 독립 애니메이션 위주로 활동해 왔기 때문이다. 극히 소수만이 영화제 등을 통해 일시적으로 이 감독의 작품 세계를 목격했을 뿐, 절대다수는 이런 감독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20년간 이 감독이 활약해 온 경력은 우리가 세계적 거장이라 자신하며 내세우는 몇몇 이름들에 그다지 꿀릴 것도 없다. 접근할 수 있는 통로의 제약이 문제일 뿐이다.

이렇게 숨어 있는 보물상자의 정체는 정유미 감독이다. 순수미술을 전공했지만, 방향을 틀어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애니메이션을 익혔고, 졸업작품 <나의 작은 인형 상자>가 히로시마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 초청되면서 경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먼지아이>, <수학시험>, <연애놀이>, <존재의 집>, <파도>, <서클> 등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또한 본인의 드로잉 작업을 그림동화로 출간하는 것도 병행했다.

그런 감독의 작업을 드문드문 국내 영화제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짧지만 강렬한, 무엇이라 설명하긴 힘든데 꽤 오랫동안 뇌리에 새겨지는 그런 작품들로 기억한다. 기억이 희미해질 걸 염려해 작품과 동명의 책을 구매해 소장한 것도 몇 권 된다. 정작 감독의 이름은 가물가물할지언정, 현대사회가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현상, 개인의 원자화와 고립으로 인한 인간 소외와 극복을 위한 노력을 극한의 섬세함으로 표현하는 특유의 그림체와 몇몇 기이한 이미지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몇 해마다 '아 그 감독 작품이구나!' 하는 탄성을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야 무심코 소리없이 지르곤 했던 경험이다.

단편 애니메이션 옴니버스 조합 개봉이란 시도

 <안경> 스틸
<안경> 스틸매치컷(주)

통상 극장 개봉영화는 최소 1시간, 대개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장편'에 국한되어 왔다. '대작'이라 불리는 경우엔 3시간 넘는 예외도 있지만, 흥행 보장된 블록버스터나 극소수 작가주의 영화에 국한되었다. 마블 시리즈의 기념비적 작품, 혹은 <반지의 제왕>이나 <아바타> 같은 EPIC 대작에만 허용된 특례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많은 게 변했다. 복합상영관 + 천만 영화 시스템이 붕괴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여러 관측이 분분하지만, OTT 플랫폼의 대체 효과와 함께 가파르게 상승한 비용 문제 등이 꼽힌다. 그렇지만 방향 전환을 모색할 상황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극장 시설을 다른 용도로 매각하거나 업종 전환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국내 극장가를 삼국지처럼 '천하삼분'하던 대형 복합상영관 체인 중 2위와 3위인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의 통합 행보는 그런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그 결과는 몇 해 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극장가의 색다른 풍경이다. 복합상영관의 여러 스크린 중 하나는 요즘 유행한다는 '버튜버' 라이브 실황이 중계되고, 다른 관에선 실제 콘서트 현장을 방불케 하는 공연실황이 상영되고 있다. 대화면으로 즐기고픈 이들을 위해서 인기 게임이나 프로스포츠 중계도 사전 대관 형식으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최신영화 개봉 위주로 흘러가던 상영작 목록도 사뭇 달라졌다. 이젠 신작 개봉보다 검증된 추억의 명작 재개봉이 더 많아질 정도다. 공식적으로 개봉할 기회를 놓쳤던 1950-60년대 고전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다는 건 역설적인 축복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원래라면 극장 개봉은 꿈꿀 수 없던 단편영화도 기회가 깃든다. 예전에는 여러 편 조합해 장편에 비례해 맞춘 옴니버스 개봉이 종종 존재했지만, 다급한 극장 상황이 새로운 여지를 가능케 한 것이다. 단편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저렴한 가격에 정규 편성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참이다. 이런 변화 덕분에 소문만 무성하던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도 극장 관람 기회가 마침내 온 것이다.

오랜 경력에 비해 늦은 감이 있지만, 감독의 근작 2편이 한데 묶여 극장 상영을 예고하는 중이다.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초청작 <안경>과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초청작 <파라노이드 키드>다. 전자는 극영화의 칸영화제 진출 무산에 의기소침하던 국내 영화계에 작은 희망으로 미디어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후자는 감독이 2005년에 출간한 동명 그림동화/인디만화를 영상화했다. 서로 다른 제작의도와 배경을 가졌지만, 감독 작품 세계 특징이라 언급했던 공통 요소로 자연스럽게 연작 분위기를 조성한다. 썩 괜찮은 궁합이다.

현대인의 지독한 소외와 고립, 그리고 인간의지의 구현

 <파라노이드 키드> 스틸
<파라노이드 키드> 스틸매치컷(주)

7분 남짓한 짧은 단편 <파라노이드 키드>는 과도한 자기 보호 본능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겪는 불면의 밤과, 상상하기만 해도 끔직한 그 고통의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만 작성한 내면의 일기를 기반으로 시각화한다. 아마 감독 자신의 경험이 투영되었을 테지만, 화면을 통해 목격하는 주인공 '파라노이드 키드'의 고통은 곧 일상적 불면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보편적 속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굳이 서사화된 줄거리 없이도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해당 주제는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은 물론, 단편 독립영화 창작자 사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소재와 배경이긴 하다. '나'로부터 출발한 문제를 극한의 세밀함으로, 고통은 더욱 예리하게 묘사하는 작업은 영화제에 가면 어렵잖게 목격 가능하다. 하지만 <파라노이드 키드>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겨내기 위한 필사의 분투와 해결을 위한 노력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대목이다. 타인은 알 수 없지만, 본인은 너무나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는 내면의 슬픔과 넘어설 수 없는 벽 같은 한계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시각화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파라노이드 키드'의 사투와 변화의 단계를 한층 더 관객과 밀착하기 위해 감독은 비슷비슷해 보이던 전작들과 다른 시도를 가미해 변주한다. 우선 흑백 배경에 얼핏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짙던 화면에 선명한 원색 효과가 더해진다. 물론 무지개의 찬란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오직 무채색만 가득하던 화면에 점을 찍듯 출현한 색채 효과는 그래서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미 예전부터 다수의 인디음악 앨범에 내레이션이나 피쳐링으로 참여해 왔고, 자신 역시 사진집 등 예술적 감각을 만만찮게 선보여온 배우 배두나가 내레이션을 담당한 점이 특기할 만하다. 배우 특유의 목소리는 '파라노이드 키드'가 실제로 귓가에 속삭이듯 관객을 이끌기에 충분하다.

 <안경> 스틸
<안경> 스틸매치컷(주)

<안경>은 그동안 선보인 감독의 작품 세계 집대성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그만큼 군더더기란 없이, 작가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해 기본 골격만 튼튼하게 갖춘 형식과 이미지를 선보인다. 현실에 바탕을 두지만, 뭔가 다른 차원과 평행을 이루듯 기묘한 형상과 배경이 상영시간 내내 화면을 채운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이라면 당연히 예상할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 특수효과와 3D 비주얼은 찾을 데 없는 화면에는 오로지 장인의 수공예 작업으로 그려나간 연필 드로잉의 2차원 풍경만 넘실거린다. 15분짜리 단편이지만, 그런 깊이 덕분에 왠만한 장편 보는 체감이다. 물론 지루할 틈은 없다.

익명의 주인공은 자신의 안경을 무심코 밟았다. 안경 한쪽이 깨졌기에 수리해야 한다. 안경점에 들른 그는 누구나 그렇듯 시력 검사를 받기 시작한다. 익숙한 시력 검사에 이어 양쪽 눈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정밀 검사에 들어간다. 경험자라면 다 알 법한, 그림 같은 작은 집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틈에 주인공은 그 집으로 성큼 들어가기 시작한다.

마치 인형의 집처럼,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선 집은 아기자기하게 근사하지만 비밀에 쌓인 듯하다. 거실에서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방이 나오고, 그 방의 문을 열면 다시 거실로 나오게 되는, 무한히 반복되는 순환의 우주다. 그저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계속 이어지는 순환에 갇혀버린 걸까? 하지만 그런 패러독스를 전시하는 게 감독의 본령은 아니다.

주인공은 계속 연결되는 방에서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어떤 불안과 공포, 두려움이 형상화한 것만 같은 또 다른 '나'들과 거듭 대면한다. 그들은 주인공의 분신일 수도, 어쩌면 그림자일 수도 있다. 자신의 망상이 만들어낸 환영이라도 무방하다. 그런 상대와 만나며 교감을 시도하는 주인공의 필사의 노력은 곧 사회가 바라는 이상화한 자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으려는 도전인 동시에 진정한 자아 실현을 위한 분투의 기록으로 전달된다.

어쩌면 정유미 감독의 작업은 그 자체가 하나의 소우주일지도 모른다. 감독은 지난 20년 간 꾸준히 일관된 주제를 변주해 왔다. 하지만 이를 답습이라 부를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 조응하는 예술가로서 감독이 진행해 온 대응은 몇 줄 글로 형언하기엔 온당치 않아 보인다. 그저 보고 느끼며 판단할 영역이다. 다만 극장에서 관객이 직접 체험하고 확인하는 데 이 졸문이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품정보>

안경
Glasses
2025|한국|2D Drawing 애니메이션
2025.06.11. 개봉(메가박스 단독)|15분|
감독·각본 정유미
프로듀서 김기현
제작지원 김해김(KIMHĒKIM), KOCCA, BIAF
제작 매치컷(주)

파라노이드 키드
Paranoid Kid
|한국|2D Drawing + 3D CGI 애니메이션
2025.06.11. 개봉(메가박스 단독)|7분|
내레이션 배두나
감독·각본 정유미
프로듀서 김기현
제작 매치컷(주)
제작지원 KOCCA, BIAF
파라노이드키드 안경 정유미감독 애니메이션 그림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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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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