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이 별에 필요한> 스틸컷
넷플릭스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지구상 가장 약한 생명체인 인간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해 왔습니다. 바다 건너 신대륙을 발견했고 하늘로 떠올랐습니다. 이제는 이 푸른 행성을 넘어 우주 문명을 창조하려 합니다."
처음 넷플릭스 코리아에서 한국 감독과 함께 첫 애니메이션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지원 감독이 떠올랐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매해 아동용 작품 몇 편 정도가 겨우 만들어지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성인 관객을 위한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의 가능성을 엿보자면 역시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 얼마나 성실하고 반듯한 걸음으로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착실히 쌓아왔는지를.
첫 시작은 서울인디애니페스트 대상을 수상했던 단편 애니메이션 <코피루왁>(2010)이다.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정서를 담아내고자 한 작품. 당시 세련된 스타일과 확고한 주제 의식으로 호평을 얻었던 작품은 대학교 2학년 학생의 실습 작품이라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줬다. 이후 그는 <학교 가는 길>과 <럭키미>, 졸업 작품인 <사랑한다 말해>를 연이어 완성하고, 네 작품을 단편을 모두 모은 극장용 애니메이션 <생각보다 맑은>(2015)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한지원 감독이 27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최연소 극장용 애니메이션 감독의 탄생.
이후 연출한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2022), <그 여름>(2023)을 돌이켜봐도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비슷하다. '인물 개인의 내면과 관계 사이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번 작품 <이 별에 필요한>에서는 그 대상과 감정에 로맨스와 SF의 외피를 두껍게 입혀낸다. 우주라는 광막한 배경 속에서 소통과 감정에 대해 들여다보고자 하는 감성 SF 애니메이션이라고 소개하고 싶을 정도다.
02.
2050년,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그려지는 이번 작품에서 주요 인물은 두 사람이다. 어린 시절 화성 탐사를 떠난 어머니를 불의의 사고로 잃게 된 과학자 난영(목소리 김태리 분)과 레트로 음향기기를 고치며 살아가는 뮤지션 제이(목소리 홍경 분). 우연히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과 인연은 각자의 꿈과 사랑을 지나며 감정과 기술, 인간성 사이의 긴장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첫 만남의 계기가 난영의 턴테이블이라는 점부터 의미심장하다. 정확히는 난영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다.
영화에서 설정되고 있는 2050년의 시대 배경은 상상보다 훨씬 더 미래적이다. 완전 자율주행, 홀로그램 통신, 개인용 로봇 등 삶의 많은 부분이 디지털, 자동화된 것은 물론 벌써 3차 화성 탐사 프로젝트가 끝나고, 4차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교감하고 감정적으로 유대감을 느끼게 되는 건 우주와 과학이 아닌 아날로그적인 '소리'다. 물리적으로 돌아가는 턴테이블과 그 위에 조심스럽게 놓이는 바늘, 그렇게 맞닿는 행위를 통해 흐를 수 있게 되는 음악과 같다.
지구 귀환에 실패한 어머니의 진실을 찾기 위해 자신 역시 화성으로 향하고자 하는 난영.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고 음악을 포기한 채로 방황하던 제이. 극 중 시대적 설정 속에서는 거의 활용되지 못할 고전적이고 낡은 대상이 두 사람을 잇는 매개이자 서로를 지탱하는 대상이 된다. 한편, 이런 아날로그적인 감성은 영화의 다른 지점에서도 종종 묻어난다. 사이버틱한 분위기를 차용하면서도 종로와 충무로, 마포 등 서울의 오래된 동네 곳곳을 서정적으로 그려낸다. 두 사람이 함께 머무는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이 별에 필요한> 스틸컷
넷플릭스
03.
"전파는 어디에도 가. 받아줄 사람만 있으면. 기지 안테나 시설 복구하는 대로 전화도 가능할 거고, 아! 물론 20분 딜레이는 있겠지만."
영화가 전반에 걸쳐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한 가지 이유가 아니다. 가령, 개발과 성장으로 인해 점차 잊혀 가는 대상을 소재로 하여 관객들의 감상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용도 말이다. 이 작품에서 디지털과 대비되는 아날로그 소리는 두 인물의 공간적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중요해진다. (안타깝게도 공학적으로 명확히 설명할 능력은 없으나) 의도적으로도 확실히 그렇게 이용되고 있다.
난영이 탑승한 화성 탐사선이 발사되는 장면에서 소통할 수 없는 두 사람의 내면은 탐사선 이륙음으로부터 제이의 아날로그 연주곡으로 점차 바뀌는 것이 대표적이다. 화성에서 단독 탐사에 나선 난영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하는 것 역시 디지털이 아닌 제이의 아날로그 소리. 이를 다시 풀어서 해석한다면, 함께일 수 없는 존재를 아날로그적 매개 속에 담긴 사랑과 온기를 통해 외로움과 고독으로부터 구원해 낸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고민했던 지점은 기술과 발전, 감정과 인간성이 우리의 연결성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두 인물의 사적인 감정이 완성된 레이어를 한 겹 더 놓는다면, '가장 먼 곳에 떨어져 있게 된 두 인물 사이의 거리를 감정적으로 좁힐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물음이 될 거고.
04.
"나는 언제 돌아올 줄도 모르는 사람 가슴에 품고 하늘만 보면서 못 살아. 그렇게…"
전면에 내세워지는 건 아니지만, 사랑, 조금 더 보편적으로는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필요할 서로 간의 신뢰와 상대의 결정을 존중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한지원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중심에 놓이게 되는 인물은 난영의 아버지다. 화성 탐사를 떠난 아내의 결정을 존중했을 뿐만 아니라, 돌아오지 못할 그를 기다리며 평생을 하늘만 바라봤다던 그의 모습은 난영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극 중에서 '매일 하늘만 보니까 비가 오는 건 기가 막히게 맞혔나 봐.'라고 난영이 회상하는 대사가 등장한다.) 이는 엄마의 흔적을 찾겠다며 오래전 난영이 우주 과학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치매로 인해 이제는 딸과의 관계조차 가물거리는 그는, 날이 좋을 때면 잊지 않고 안테나를 들고나와 화성으로 소리를 보낸다.
제이의 이야기에서도 같은 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밴드 생활을 같이했던 동료들로부터 잃은 신뢰, 솔직하게 처음부터 화성 탐사대에 지원했던 사실을 말해주지 않은 난영에 대한 실망과 같은 부분이다. 특히 난영과 다투게 되는 지점에서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관계가 더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신뢰의 문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미리 이 사실을 알게 되었더라도 그런 난영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을까에 대한 자기 확신을 제이는 아직 가질 수 없으니까.
어린 시절 세상의 전부와도 같던 어머니의 자리. 반드시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기억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을 난영의 신뢰는 또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성인이 된 이후로 처음으로 우산을 나누어 쓴 사람이 제이라고 고백하는 유언 영상 속 난영의 말을 곱씹어 보자.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이 별에 필요한> 스틸컷넷플릭스
05.
이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노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극본에만 2년, 제작에 다시 또 2년이 넘게 30-40명도 넘는 팀원들과 함께 매달렸다. 심지어 목소리 연기를 맡은 김태리, 홍경 배우는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의 표정과 동선, 행동을 더 현실감 있게 구현하기 위해 중요한 장면을 실제로 연기해 실사 촬영까지 했다고 한다. 국내 애니메이션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드문 시도다. 영화 속 내러티브가 갖고 있는 레이어를 한 겹씩 벗겨내면 낼수록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감정과 인간성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말미에서 난영은 멀리 떠나오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떠나오기 전에는 알 수 없었지만 떠나온 바로 그 자리에 언제나 있었던 게 있다고 말이다. 누군가에 해당하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보다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 그 '존재'가 도망치거나 스스로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만드는 것. '진심'이다. 이 별에 꼭 필요한, 어떤 기술적 발전으로도 당신이라는 '존재'가 아니면 전해줄 수 없는 것.
"당분간 우리 서로 닿지 않더라도 잊지 마. 우주 어딘가에 항상 너를 응원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거."
그리고 이 영화의 진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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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