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추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들을 배려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 종영한 SBS 퓨전사극 <귀궁>은 전시 민간인 희생에 대한 국가권력의 무심한 태도를 반영하는 장면을 보여줘 아쉬움을 남겼다.

지난달 30일 제13회 초반부에 등장한 조선시대 군주는 적군이 도성 근처에 진군하자 서둘러 피난을 떠난다. 그는 산세가 험한 용담골로 가시자는 호위 군관의 제안대로 피난을 가다가, 적군이 이미 용담골 근처에 가 있다는 긴급 보고를 받는다.

왕의 질책

 영화 <귀궁> 방송화면 갈무리
영화 <귀궁> 방송화면 갈무리SBS

적군이 자신의 동선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고 혼란에 휩싸인 그는 잠시 생각 하더니 "그래, 사람을 보내 용담골에 의장기를 높게 세우거라"라며 "적들이 내가 그곳으로 간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이라고 지시한 뒤 "저들의 눈을 속이는 사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옆의 신하는 "묘안입니다"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용담골이 고향인 그 호위 군관은 깜짝 놀란다. 그렇게 되면 용담골 백성들이 적군의 공격에 노출되니, 자신에게 시간을 주면 백성들을 안전하게 피난시키겠다고 왕에게 진언한다.

왕은 "아둔한 놈"이라고 질책한다. 백성들을 대피시키면 적군이 나의 계획을 눈치채지 않겠느냐고 꾸짖는다. 그런 뒤 "대의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고 강조한다. 이 임금은 '아둔한' 호위 군관을 흠씬 두들겨 패도록 한 뒤 그를 묶어놓고 행군을 계속한다.

<귀궁>은 이 때문에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이 강력한 원귀의 출현을 초래해 왕실이 위협을 받게 됐다는 설정을 깔고 있다. 호위 군관은 팔척귀라는 이름의 악귀가 되어 왕실의 안녕을 해치는 존재가 됐다.

이 장면이 아쉬운 건 전쟁시 민간인은 무방비 상태가 되어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국가는 많은 경우 국가 지도부와 주요 인물들과 군사력을 지키는 데 더 치중했다.

1907년에 채택된 육전규칙이 무방비 상태의 주거 지역에 대한 폭격을 금지했지만, 국제사회가 전시 민간인 보호에 본격적으로 신경을 쓴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1949년에 채택된 제네바협약이 그 결실이다. 2차 대전 이전만 해도, 민간인은 전쟁과 무관하다는 인식이 국가 운영자들을 지배했다. 그래서 민간인 보호는 전쟁 수행자의 관심 밖이었다.

전쟁 시 국가의 태도

 SBS 드라마 <귀궁>의 한 장면.
SBS 드라마 <귀궁>의 한 장면.SBS

민간인 보호에 대한 인식이 훨씬 희박했던 왕조시대에는 민간인이 전리품쯤으로 취급되는 것은 물론이고 군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일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보좌한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소개된 일본군 수색작전이 그 시절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유몽인에 따르면, 경기도 양주 홍복산에서는 어린 사람들과 값나가는 재물을 찾기 위한 일본군의 대대적 수색 작전이 있었다. 이 작전은 의경들이 대거 동원되는 오늘날의 야산 수색을 방불케 했다. 유몽인은 "숲속을 빗질하고 김매듯(櫛耨林藪)"이라는 표현을 썼다. 산속에 숨은 사람들과 그곳에 숨겨진 물건들을 찾기 위한 수색 작전이 빗질을 하고 김을 매는 듯이 촘촘하게 진행됐다.

이 수색으로 인해 유몽인의 조카인 유광의 부인이 목숨을 잃었다. 성이 한씨인 이 민간인은 일본군이 퇴각한 뒤 나무에 목이 매달린 상태로 발견됐다. 한씨의 여동생은 다른 지역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서 뛰어가다가 낭떠러지 끝에서 목숨을 잃었다.

전쟁 초기에 유몽인의 형인 유몽웅은 칠순 어머니를 모시고 양주 선산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만난 일본군은 그의 어머니를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유몽웅은 자기 몸으로 어머니를 가린 채 연달아 네 번이나 칼을 맞았다. 그런 상태로 끝끝내 어머니를 지켜내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우야담>은 나라에서 유몽웅을 위해 정려문을 내렸다고 알려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원군인 명나라군에 의해서도 민간인 피해가 대거 발생했다. 명나라 군인들이 말을 탄 채로 민가에 뛰어드는 일도 많았다. 명나라가 참전한 직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음력으로 선조 25년 6월 20일자(양력 1592.7.28.) <선조실록>은 "군마가 민간에 난입하게 하니, 인민들이 놀라 흩어져 성 안이 온통 비었습니다"라는 보고서를 소개한다.

집안에 군마를 난입시키는 것이 칼로 사람을 해치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위험하다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민간인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모습은 일본군뿐 아니라 명나라군에서도 나타났다.

유몽인은 광해군과 함께 전시 국가행정에 참여했다. 일반 대중과 마찬가지로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당연히 민간인 피해에 노출됐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전시 민간인 보호의 필요성이 국가적 의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민간인 희생으로 인한 원한은 나라 곳곳에 쌓였지만, 그런 의제가 전쟁 수행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군주는 인간보다 높은 신으로 간주되고 수많은 대중은 인간보다 못한 노비로 취급됐다. 이 같은 불평등 구조도 민간인 보호의 필요성이 덜 부각되게 만든 요인이다.

역사는 '적군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가'를 군주 평가의 기준 중 하나로 사용한다. 전쟁 같은 재난으로부터 백성을 얼마나 잘 보호했는가는 비중 있게 취급되지 않았다. 이런 일에 신경을 쓰면 "아둔한 놈"으로 치부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대중 역사서에도 그런 인식의 흔적이 꽤 많이 남아 있다. 전몰장병뿐 아니라 민간인 희생자 역시 현충일의 추모 대상이 돼야 한다는 인식을 저해하는 역사 서술이 여전히 적지 않다.
귀궁 전쟁 민간인학살 임진왜란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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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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