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네스트와 셀레스틴: 멜로디 소동> 스틸
㈜영화사 진진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이 돌아왔다. 가브리엘 뱅상의 인기 동화 시리즈를 영상화 한 시리즈 첫 작품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은 원작의 유려한 디자인을 화면에 고스란히 옮긴 것은 물론, 간단한 내용 안에 서로 다른 종과 사회의 화해와 공감을 담아 프랑스는 물론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멜로디 소동>은 10년 만에 선보인 속편이다. 전작의 인기로 텔레비전 시리즈가 제작되고 영화 사운드트랙 음반도 화제에 올랐지만, 두 번째 작품은 꽤 늦게 만들어진 셈이다.
전편이 지상의 곰과 지하의 생쥐 나라로 이분화한 사회적 몰이해에서 오는 갈등을 중심축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면, 속편은 멀리 동쪽에 떨어진 어네스트의 고향이 주요 무대로 기능한다. 험준한 산간지대에 자리한 샤라비는 극 중 셀레스틴이 휴대한 지도에 묘사되듯 동유럽 어딘가로 추정된다. 둘이 살던 마을이 프랑스라면 발칸반도 북쪽 카르파티아산맥 인근일 테다. 서유럽의 시선에선 유럽의 동쪽 경계이자 낯설고 신비한, 하지만 근대 이후 낙후된 동방과의 경계지대다.
그저 가난한 거리의 악사로 설정되었던 어네스트의 과거사가 드러난다. 그는 사실 샤라비에서 꽤 명망 있는 가문의 후계자였다. 이 동네에선 여전히 중세적으로 부모의 직업이 고스란히 자식에게 계승된다. 하지만 음악에 푹 빠진 어네스트는 명예와 부가 보장된 부친의 직업을 물려받지 않고 가출해 멀리 떠나버렸다. 유력자인 그의 부친은 아들이 탈선한 게 다 음악 탓이라 분개했고, 그 결과가 바로 돌아온 '탕아'가 목격한, '멜로디'가 금지된 샤라비의 현실인 것이다.
샤라비의 법을 주관하는 어네스트의 부친이 강행한 법은 가문의 체면을 훼손한 음악을 금지하는 악법 중 악법이다. 오직 '도' 단음만 허용된 샤라비 지역이지만, 어네스트 말마따나 음악 없이는 못 사는 주민들이 이를 순순히 수용할 리 없다. 정체불명의 음악 게릴라 '미파솔'을 비롯해 음악 지키기 운동가들이 도처에 암약하며 공권력과 쫓고 쫓기는 중이다. 감옥엔 운동가들이 넘쳐나고, 모든 악기는 압수되어 어디론가 옮겨진다. 그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준법'이라는 명목 아래 일체의 의문은 금기시된다,
어네스트가 입버릇처럼 말하듯, 샤라비에선 '그게 현실'이란 말이 상식으로 통용된다. 그저 순응하고 따라야 한다는, 체념이 몸에 배인 태도다. 체제에 의구심을 품고 반항해도 소용이 없다는, 권력이 결정한 대로 따라야 한다는 순종이 강요된 덕목으로 주민들의 뇌리를 지배한다. 동화 원작이지만, 전편에서 다양성과 포용, 타자에 대한 이해를 설파한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속편에선 비판적 시민의식의 소중함과 권위주의 독재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가 뚜렷하다.
서유럽 중심적 시각이란 점이 좀 불편하긴 하지만, 구소련 붕괴 이후 민주화가 정착되지 못한 채 상당수 국가가 여전히 무늬만 민주주의로 운영되거나 심지어 극우화 위협에 직면한 동유럽의 현재를 지적하는 본작의 문제의식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동화의 수위를 가뿐히 초월한다. 사실 동화는 다른 문화 분야 못지않게 이데올로기적이란 진실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게다가 주요 독자층이 아직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은 유소년 대상이기에 동화에 함축된 내용이 무엇인가는 자칫하면 한 사람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마저 있는 판이다.
그래서 천편일률적인 과거 국내 동화와 달리, 사려 깊은 작가들이 고심한 요즘 국내 동화도 예전 보던 것 생각하고 읽으면 화들짝 놀랄 경우가 적지 않지만, 어릴 적부터 민주 시민교육에 공을 들이는 서구의 동화는 확실히 전달방식만 눈높이를 맞췄을 뿐, 사회가 지향하는 방향과 가치에 더없이 충실하다. 다문화와 관용을 권장하고 차별과 혐오를 경계한다. 과거사의 오류를 감추지 않고, 이주와 난민, 생태 문제를 비중 있게 담는다. 그런 경향의 첨단을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멜로디 소동> 역시 충실하게 소화하고 있다.
동유럽의 그림엽서 같은 풍광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멜로디 소동>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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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림동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역시 현실에 바탕을 두되, 이를 꿈꾸듯 몇 곱절 더 환상적으로 구현하는 섬세한 아름다움에 있다. 최대한 동화 원작의 그림체를 고스란히 옮겨 위화감을 없애면서도 활동사진 특유의 동선으로 한 단계 더 유려한 질감으로 승화해낸다. 저게 현실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보고 있자면 무의식중에 안으로 빨려들고 싶은 충동은 어쩔 도리가 없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샤라비의 풍경이 너무나 아기자기하게 예쁜 바람에 음악의 자유를 박탈당한 '디스토피아'로 통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일 테다. 오랜 전통을 간직한 채, 서구화된 대도시에선 체험하기 힘든 아기자기함과 투박하지만 순박한 정서로 가득한 샤라비 풍경은 산 넘고 물 건너 험준한 여정을 거쳐 케이블에 의지한 곤돌라로만 출입할 수 있는 이 비경을 마치 전설 속의 '샹그릴라'처럼 다가오게 만든다.
샤라비의 전경은 그저 유럽 관광길에 카메라 셔터 누르기 바빠지는 수백 년 묵은 오래된 가옥과 도시의 풍광을 고스란히 재현한 듯하다. 구불구불한 계곡 곳곳에 끝없이 이어지는 모형같이 오밀조밀한 골목과 거리, 예스러운 복식과 도구를 물려받아 고쳐 쓰며 아끼는 소박함이 화면 구석구석 배경을 가득히 채운다. 여기는 장인이 손때 묻은 도구를 수리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면 광장의 맥주 홀에서 음악과 함께 이웃과 나누는 담소가 소중한 땅이라는 것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신비로운 땅은 외부와 단절되어 세상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을 위험에 놓여 있다. 닫힌 사회에서 관습과 권위주의가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을 세계시민의 보편적인 상식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강렬한 주제를 영화는 제기한다. 전체관람가답게 순화된 수위를 유지하지만, 샤라비 거리 곳곳에 위압적으로 세워진 '법'의 권위를 형상화한 조형물들은 과거 전체주의 체제를 떠올릴 때 첫손으로 등장하는 지도자 동상을 고스란히 닮았다. 불합리하고 앞뒤 맞지 않는 명령에도 충실히 따르는 경찰 역시 과거 독재체제에 맹종하던 평범한 공권력의 민낯 그대로다. 은근히 정치 풍자 관련한 재현수준이 높다.
입시라는 블랙홀 대신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멜로디 소동>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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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점은 물론 있다. 유소년은 유소년대로 재미있게 볼 테지만, 아이들과 덩달아 함께 보게 된 어른들에게도 색다른 보는 맛이 추가될 법하다. 이는 양날의 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주요 수요층인 유소년층에는 영화가 은유하는 풍자가 다소 생소하고 낯설 테지만, 어른에겐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관람평이 상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화 형식과 구조로 담기엔 현실 대입이 다소 직설적이라 오히려 단점이 될 수 있는 건 물론이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본 작품이 품은 현실 세계를 향한 시선과 이를 적절히 순화하는 높낮이 조절의 묘는 반갑고 소중하기만 하다. 좋은 동화(와 기반을 둔 애니메이션까지)라면 제도권 구미에 맞는 덕목을 넘어 질문을 던지며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도록 도와야 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어네스트는 꼭 고향을 떠나서 살아야 할까? 혹은 샤라비의 전통과 개혁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연거푸 궁금증이 밀려들고, 부모는 자녀와 토론에 응해야 할 테다. 같은 동화라도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시리즈는 일 방향이 아닌, 쌍방향 수평적 교육과 토론을 전제로 한다. 근본적인 차이가 의외로 깊고 예리하다.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의 속편은 일정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동화는 애들 보는 것이란 고정관념을 흔들고, 본래 동화가 지향해야 마땅한 효용을 충실하게 구현하려 방향타를 제대로 설정한 작업임에 틀림이 없다.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입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시기라며 교육과정을 당겨 주입하거나 매년 유행처럼 '코딩' 교육이다 인공지능 활용뭐다 호들갑을 부리는 대신에 더불어 살아가는 시민교육을 위한 양질의 동화가 고달픈 대한민국 교육 현실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추억의 1편과 연달아 가족이 함께 보면 추억이 새록새록, 하지만 작품 속 '부드러운 직선'을 새삼 느낄 만하다.
<작품정보>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멜로디 소동
Ernest & Celestine: A Trip to Gibberitia
2022|프랑스|애니메이션
2025.06.11. 개봉|80분|전체관람가
감독 장-클리스토페 로저, 줄리엔 청
원작 가브리엘 뱅상, 동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공동배급 ㈜하이스트레인저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멜로디 소동> 스틸㈜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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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신고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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