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발전사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감독이 누구일까. 뤼미에르 형제부터 프레드릭 빌헬름 무르나우, 오손 웰즈, 버스터 키튼, 구로사와 아키라, 알프레드 히치콕, 스탠리 큐브릭, 스티븐 스필버그, 제임스 캐머런, 크리스토퍼 놀란 등 영화사를 수놓은 걸출한 이름들이 꼽자면 끝이 없을 만큼 수두룩하게 쏟아진다. 수십 년이 흘러도 회자되는 걸작을 낳은 이부터 영화사에 길이 남을 기술을 발견한 이,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고 수많은 관객들로부터 존경을 얻어낸 이들까지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수많은 감독 가운데서 장 뤽 고다르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아마도 영화사조를 깊이 공부한 평론가들에게 묻는다면 첫 번째나 두 번째 손가락에 들 만큼 특별한 이로,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며 내놓은 작품들이 다른 감독들과는 전혀 다르게 독특하고 독창적이다.

소위 누벨바그라 불리는 프랑스 영화예술의 새로운 사조를 이끈 혁신적 창작가로, 전설적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혁신적 세례를 받은 일련의 영화감독 가운데서도 첫째 자리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함께 언급되는 이들로는 프랑소와 트뤼포, 끌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 아녜스 바르다, 자크 리베트, 자크 로지에 정도가 있는데, 장 뤽 고다르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영화예술의 혁명가, 장 뤽 고다르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 스틸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 스틸엠엔엠인터내셔널

영화예술을 아끼는 이들이 하나같이 장 뤽 고다르에 환호하는 이유가 있다. 그건 그가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 끝내주는 이야기를 만들어서가 아니다. TV연속극부터 만화와 연극, 무엇보다 당대 서사 기반 예술의 정점을 찍었던 문학에 비하여 영화가 갖는 특별함이 무엇인지를, 그 이전에 영화란 대체 무엇인지를 끝없이 고민하고 나름의 답을 내어놓은 전위적 작가로 일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흔히 영화를 잡탕예술로 보는 시각이 있다. 기반은 문학적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로 짜고, 듣기 좋은 음악과 보기 좋은 영상을 섞어 연극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연극적 요소를 삽입해놓은 무엇이 곧 영화라는 식이다. 나쁘게 말해 잡탕, 좋게 말해 종합예술이 되는 영화는 이 모든 세부항목을 적절히 조율해 문학적 가치를 보다 현대적 기술 아래 증폭, 적어도 깔끔하게 담아내는 것이란 평가가 영화에 대한 흔한 시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 뤽 고다르는 이 같은 흔해빠진 생각과 맞섰다. 영화예술은 그 형식과 내실에서 기존 다른 어떤 예술 분과도 해내지 못하는 표현을 해낼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오로지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건 그저 다른 예술분과의 총합 이상의 특별함을 이룰 것이란 얘기였다. 그로부터 그는 온갖 실험적 시도를 거듭하게 되는데, 영화라는 예술분과의 한계와 경계를 오가는 그의 연출로부터 이제껏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였던 영화의 새로운 표현방식이 발굴되고 실험되며 해석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

너무 형식적 실험에 치중한 나머지 내용은 관객들이 좋아하는 '여자'와 '총', 즉 짝짓기와 폭력 정도로 이야기를 꾸리고 형식연출에 전념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완전히 틀린 비판인 것도 아니지만, 그는 그대로 장 뤽 고다르의 매력을 이루고, 긴 필모그래피 가운데 조금씩 변화를 이루기도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형식적 시도가 천재적 재능이며 집착에 가까운 열정과 맞물려 빚어낸 성취는 다른 감독의 작품군에선 흔히 마주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이따금씩은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고다르의 영화가 만들어진 지 반세기를 훌쩍 넘겨서까지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회자되고 재개봉에 이르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을 테다.

6월 한국서 재개봉한 <미치광이 피에로>는 고다르의 대표작 중 한 편이다. 지난해 재개봉해 3000명 넘는 관객을 모은 <국외자들>에 이어, 또 한 번 고다르의 고전 명작을 상영관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고다르의 대표작이라 하면 수없이 변주돼 온 전설적 작품 <네 멋대로 해라>를 필두로, <여자는 여자다>, <국외자들>, <알파빌>, <경멸> 등이 거론되는데, 1965년 작 <미치광이 피에로>도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고다르의 작품이 대개 그러하듯 줄거리는 특별히 중요하다 할 것이 못된다. 그래도 극영화니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중산층 가장이 어느 날 옛 연인과 조우하여 가정을 버리고 내뺐다가 온갖 범죄에 휩싸여 수배자 신세로 전락하고, 그 여자에게도 뒤통수를 맞고 분노하여 살인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추락에 추락에 추락의 와중에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위태롭지만 절절하기도 한데, 이 모두는 고다르가 흔히 활용하는 남녀상열지사에 폭력과 일탈, 몰락이니 만큼 흥미로써 영화를 지탱하는 수단이라 하겠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삶, 그러나 권태롭다면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 스틸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 스틸엠엔엠인터내셔널

주인공은 페르디낭(장폴 벨몽도 분), 가진 것 없던 프랑스인이지만 이탈리아 돈 좀 있는 집안의 여자와 결혼해 부러울 것 없는 한량의 삶을 살고 있다. 널찍한 고급 주택에다 좋은 차, 아내와의 금슬도 나쁘지 않고 슬하에 어린 딸까지 둔 그의 삶이 중산층의 전형처럼도 보이는데, 특별한 아쉬움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렇다 할 재미며 열정을 둘 구석 또한 보이지 않는 듯 하다. 다니던 방송국도 무슨 이유인지 때려치우고 백수로 지내는 페르디낭에게 아내가 인맥으로 이런저런 일자리를 소개하지만 그는 영 마음이 없는 것만 같다.

영화는 페르디낭이 아내와 함께 처가에서 연 파티에 가는 대목으로부터 출발한다. 아내는 둘 모두 파티에 꼭 가야 한다며 임시로 보모까지 불렀다는데, 막상 참석한 파티는 영 마음이 끌리지가 않는다. 온갖 허울을 훑는 듯한 뜬 대화에, 마음 끌리는 구석은 하나도 없는 요상한 분위기가 관객 보기에도 초현실적으로 보이기만 한다.

날렵하게 올라붙은 젊은 여성의 맨가슴을 그대로 까보여도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도록 한 연출이 너무나도 고다르스러운 가운데, 권태 그 자체처럼도 보이는 늙수구레한 사내들과 성공한 치들의 이야기는 또 얼마나 지겨운지. 그렇게 페르디낭은 파티장을 도망쳐 제 집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흥미로운 것이 있으니 바로 빈 집에서 애를 보는 미모의 보모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안느(안나 카리나 분), 진작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졸다 차가 끊기도록 못 움직였다는 그녀와 그녀를 바라보는 페르디낭 사이에서 어쩐지 묘한 기류가 흐르는 건 왜일까. 이유는 곧 드러나는데, 쏟아지는 비에다 막차시간이 지난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탄 차에서 그들이 과거 연인이었단 사실이 공개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이야기는 도저히 짐작이 불가능한 막무가내 막장극으로 흘러간다. 할리우드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나 <내일을 향해 쏴라>와 같은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도피와 범죄, 다시 도피와 범죄의 이야기가 이 영화에서도 펼쳐진다. 물론 고다르의 영화가 위 두 작품보다 몇 년 쯤 앞서 있다는 점은 영화사적으로 그가 추앙받는 이유와도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미치광이 피에로>는 그 제목처럼 뒤가 없는 두 남녀의 미친 듯한 여정을 뒤따른다. 그저 범죄에 한해서가 아니라 이들의 관계까지도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과정으로 흘러가는데, 영화는 개연성이며 줄거리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거침없이 나아가 예상치 못한 결말로 치닫는다.

1960년대, 프랑스, 고다르의 영화만이 빚어내는 특별함이 있단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중심을 채우는 건 에너지며 낭만이 아닐까. 영화 재개봉 포스터엔 '새로움, 파격, 광기, 누벨바그의 가장 결정적 순간'이란 카피가 들었는데, 이 역시 그의 영화가 갖는 특별한 힘을 고려해 쓰인 것일 테다.

6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재개봉한 영화는 소위 씨네필이 지나치기 어려운 선택지가 될 것이다. 지난해 <국외자들>에서 확인했던 바, 고다르와 누벨바그, 파격과 새로움이 이 시대 식상함에 물들어가는 한국 문화예술계에서 여전한 유효함을 지니고 있는 때문일 테다.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 포스터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 포스터엠엔엠인터내셔널

덧붙이는 글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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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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