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스튜디오디에이치엘

존재 자체가 장르인 몇 안 되는 존재가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소룡의 영화를 액션이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이소룡이 나오는 영화는 이소룡 영화다. 홍콩 영화 백년사에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건 그야말로 손에 꼽는다. 배우로선 성룡과 이연걸, 감독으로는 오우삼과 왕가위 정도다. 아! 그리고 주성치도 있겠다.

어디 액션과 홍콩뿐일까.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 또 서부극의 상징 존 웨인의 영화를 우리는 그대로 독자적인 장르물처럼 취급한다. 실베스터 스탤론이나 아놀드 슈워제네거, 또 약간 B급이긴 하지만 장 끌로드 반담의 영화도 그런 구석이 있다. 한국으로치면 옛 심형래의 영화들이 그러했고, 요즈음은 마동석의 작품이 또 그렇다. 홍상수도 마찬가지, 그는 심지어 다른 많은 작가에게 홍상수스럽다는 평가까지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마블과 픽사, 디즈니는 또 어떠한가. 그대로 하나의 브랜드로써 장르를 이루지는 않았나.

이 긴 이름들의 목록 한 구석에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을 더한다. 한국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는 미야자키의 작품군은 그가 설립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색깔로 보는 이의 뇌리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지난 몇 달 간 한국에서 거의 신드롬이라 해도 좋을 인기를 구가한 챗GPT 및 DALL·E를 통한 이미지 생성 놀이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주변에 몇쯤은 자기 프로필을 지브리풍 이미지로 변환해 올려둔 이가 있을 테니. 아마도 적잖은 수는 본인 스스로 그런 일을 해봤을 수 있겠다.

스스로 장르가 된 일본 애니의 전설

은퇴와 복귀를 수차례 번복한 미야자키 하야오다. 좀처럼 그 의미를 따져보기 어려운 근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고 어쩌면 마지막 은퇴일지 모를 은퇴 뒤 한가롭게 지낸다는 그다. 환경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그답게 자주 운동삼아 동네를 산책하며 쓰레기를 줍고 다닌다는 백발의 노인이 자타공인 이 시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작가라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생애를 정리한 의미 깊은 다큐멘터리다. 프랑스 출신 레오 파비에의 86분짜리 다큐는 지브리 설립 40주년을 맞아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부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이르는 곡절 많은 필모그래피를 총정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은 물론, 아들 미야자키 고로와 절친한 동료들, 서구 학자들까지 두루 등장해 풍성한 인터뷰를 더한다.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을 두 차례, 공로상도 한 번 받은 거장의 오늘이 거저 얻어진 건 물론 아니다. 압도적 재능으로 성공만을 구가한 것 또한 아니다. 거의 마흔이 가까워질 때까지 TV애니메이션의 장면설정이며 레이아웃 같은 부수적 역할을 맡아 수행한 그다. TV애니 <미래소년 코난>의 성취 뒤 드디어 극장용 애니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으로 데뷔할 기회를 잡았다. 그의 나이 39살 때였다.

결과는 참혹했다. 손익분기를 크게 넘지 못해 제작비에서만 2억 엔가량 적자였다. 통상의 감독이라면 이 정도 실패면 재기불능 수준, 스스로도 '두 번 다시 극장용 영화는 만들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매 작품 스스로를 완전히 갈아 넣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때의 실패로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피폐한 상황에 놓였다. 다시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전처럼 TV애니메이션 스태프로 일하며 만족하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고 술회할 정도다.

영화는 실패한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떻게 재기에 성공했는지를 차근히 살핀다. 이제는 평생의 동료가 된 스즈키 토시오 지브리 이사회 의장, 당시 아니메쥬 편집장의 제안에 따라 기본 중 기본인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실패의 영향도 있었을 테다.

기껏 영화 기획을 들이밀어도 받아주는 회사가 없는 판에 아예 만화를 그린다는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만화, TV애니, 극장용 애니로 이어지는 일본의 유관 산업계가 여전히 튼실했기에, 만화가 성공하면 얼마든지 형태를 바꾸어 애니로 제작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스튜디오 지브리, 그 전설적 발자취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스틸스튜디오디에이치엘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전설적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권 발간부터 곧장 그 비범함을 드러낸 작품은 2년 만에 극장판으로 제작돼 일반에 공개되기에 이른다. 제작상의 제약이 얼마 없는 만화 원작인 때문일까. 현재까지 이어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특색, 본연의 매력이라 해도 좋은 자연친화적이며 규격이 크고 고전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설정의 작품이 그 빛을 발한다. 만화 자체도 일본 만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으로 평가되지만, 애니는 그 이상의 가치를 발했다. 다시 감독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를 일으킬 만큼의 재정적 성공을 가져다준 것이다.

성공에 고무된 미야자키 하야오와 그 친구들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해 앞의 스즈키 토시오, 그리고 타카하타 이사오까지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해 차기작을 향해 전력투구한다. 그렇게 태어난 작품이 1986년 작 <천공의 성 라퓨타>다. 어느덧 40대 중반의 나이, 데뷔작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이 실패한 뒤 7년 만이었다.

이후는 우리가 아는 것과 같다.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이르는 일련의 전설들이 우루루 태어나는 것이다. 거의 장르로서의 지브리, 우리가 아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탄생이다.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은 그 작품 가운데 깃든 세계관과 철학, 작품관을 작품 그 자체는 물론, 에세이 안에 담긴 문장, 그를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의 입을 통하여 밝혀낸다. 전쟁에 반대하지만 전쟁에 쓰인 무기에 매혹당하고, 인간에 대한 애정과 함께 그 비극적 운명을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무력감에 가까운 인식을 품고, 환경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도 뚜렷한 성과 앞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치열하면서도 처연하기도 한 모습이 은근히 드러난다.

가만히 보면 근래 유행한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 열풍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랜 투쟁과 그 아래 깔린 인식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듯도 하다. 한 땀 한 땀 혼신의 열정을 바쳐 그려내던 그림을 불과 수 초 만에 생성하는 AI(인공지능)의 활용을, 지브리 스튜디오를 아끼는 이들조차 거리낌 없이 하는 모습이 어딘지 반인간적이면서도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당해낼 수 없는 흐름 앞에 해낼 수 있는 최선으로 맞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캐릭터들이 이제와 AI 앞에 선 예술이며 애니, 애니메이터와 인간 그 자체처럼 여겨지는 건 차라리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영화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지만 무엇도 바꿔내지 못했다고 씁쓸하게 읊조리는 이 위대한 작가의 모습으로부터 오늘의 관객은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그저 역경을 뚫고 성공에 이른 거장만을 보았다면 '자연의 영혼'이란 부제가 붙은 이 영화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포스터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포스터스튜디오디에이치엘


덧붙이는 글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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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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