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세이부 라이온즈 레이디스에서 뛰고 있는 '한국 여자야구 에이스' 김라경 선수를 5월 31일과 6월 1일 이틀간 사이타마 현지에서 직접 취재했습니다. 옆에서 직접 지켜본 그의 활약상을 세 편에 걸쳐 소개합니다.[편집자말]

 김라경이 훈련에 앞서 필자와 만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라경이 훈련에 앞서 필자와 만나 포즈를 취하고 있다.황혜정

올해로 만 25세가 된 김라경. 그가 13년 넘게 길러온 머리를 과감히 '싹둑' 잘랐다. 야구를 처음 시작한 초등학교 5학년 때 이후로 다시 짧게 자른 것이다. '한국 여자야구 에이스'로 불리는 그의 새로운 각오가 담긴 결정이었다.

일본 남자 프로야구팀 '세이부 라이온즈' 산하 여자팀인 '세이부 라이온즈 레이디스' 입단이 결정된 지난 2월 말, 김라경은 홀로 일본으로 향했다. 어느덧 사이타마 생활 4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현지에서 직접 만난 그는 훈련장과 일터를 오가며 '야구에 미쳐 사는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야구 열정 대단해"... 동료들이 본 김라경

지난 5월 31일, 훈련장에 들어서자 내야수 오비츠 리오가 김라경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장난을 걸었다. 기자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차은우, 세븐틴, 너무 좋아요!"라며 반가움을 표했다. 리오는 "김라경은 정말 성실한 사람"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외야수 코자카 미우는 "김라경의 야구 열정은 대단하다. 야구 하나 때문에 한국에서 건너오지 않았나.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야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엄격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외야수 시미즈 유우카도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우리 팀 분위기를 더욱 활발하게 만드는 존재"라고 했다.

30분 일찍 훈련장에 와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몸을 푼 김라경은 오후 6시 30분 본격적인 훈련에 임했다. 이때 김라경과 단 1초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붙어 다니며 함께 훈련을 받는 선수가 눈에 띄었다. 러닝, 캐치볼 등 모든 훈련을 계속 짝을 이뤄 같이한 이는 바로 김라경의 동갑내기 '절친' 투수 타치 아야카다.

김라경은 아야카에 대해 "팀에 처음 합류했을 때, 따뜻한 미소로 잘 챙겨줘 빠르게 합류할 수 있었다. 서로 많은 말은 하지 않지만, 눈빛만으로 통하는 사이가 됐다. 우리 둘만의 등판 루틴도 있다. '아야카X김라경의 등판 루틴'을 지켜봐 달라"며 웃었다. 아야카에게 김라경은 어떤 친구냐 묻자 그는 "강력한 직구가 매력적인 선수"라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르바이트 하며, 야구에 몰두하는 삶

 김라경이 절친한 투수 타치 아야카(오른쪽)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라경이 절친한 투수 타치 아야카(오른쪽)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황혜정

대학 시절부터 일본어를 틈틈이 공부한 덕분에 김라경은 일본 현지에서 언어 장벽 없이 생활하고 있다. 현재는 주 4회, 하루 5시간씩 한 접골원에서 보조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다. 수요일과 주말은 야구에만 집중한다.

"매주 수요일은 자율 훈련일이에요. 구단에서 전용 구장을 잡아줘서 팀 동료들과 4시간가량 집중적으로 훈련하고 있어요. 주말에는 리그전이나 대회에 출전해요."

사실 김라경의 일본 무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2년 일본 실업팀 '아사히 트러스트'에 입단했으나 불의의 부상으로 토미 존 수술(팔꿈치 인대 재건술)을 받으며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완벽한 재활을 마친 그는 직접 일본 실업팀 문을 두드렸고, 세이부 라이온즈 레이디스에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았다.

벌써 올해에만 두 개의 대회 우승컵(사쿠라 컵, 가조 키즈나 컵)을 연달아 들어 올렸다. 김라경의 소속팀 감독은 지난해까지 일본 여자야구 국가대표팀 주전 유격수이자 주장을 맡았던 데구치 아야카다. 현재 팀에 전·현직 일본 국가대표만 4명이 넘는다.

김라경은 야구에 제대로 '미친' 팀 동료들을 보면서 제대로 자극 받고 있다고 했다.

"'무엇을 위해 우승컵을 드냐'는 질문에 팀 동료들이 '우승은 우리가 노력한 땀의 대가'라는 멋진 답을 내놨다. 한국에선 (여성이 야구 하는 경우가 흔치 않아) 야구에 미친 사람을 쉽게 찾기 어려웠지만, 여기선 모두가 야구에 진심이라 더없이 좋다. 한 명의 야구 선수로 인정 받고 있는 기분이라 외롭지 않고 즐겁다."

김라경은 "좋은 동료들과 코칭 스태프 밑에서 뛰는 게 참 감사하다"며 "데구치 신임 감독님이 열정적이라 팀 훈련이 정말 알차다. 얼마 전 여자 선수 최초로 캐나다 남자 프로야구 리그에 진출한 사토 아야미 선배에게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인드 컨트롤 부분 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전했다.

데구치 감독은 "김라경의 투구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안정적으로 좋은 공을 던지더라. 그게 라경이를 우리 팀에 뽑은 이유"라며 "팀에 활력을 불어 넣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내가 필요한 곳에 있고 싶다"

 김라경(등번호 29번)이 지난 6월 1일 베루나 돔에서 열린 리그전에서 맨 앞에서 이닝을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선수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 모습만 보더라도 김라경 특유의 친화력을 알 수 있다.
김라경(등번호 29번)이 지난 6월 1일 베루나 돔에서 열린 리그전에서 맨 앞에서 이닝을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선수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 모습만 보더라도 김라경 특유의 친화력을 알 수 있다.황혜정

석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지만, '야구 최강국' 일본의 시스템을 피부로 절절히 느끼며 경험해 가고 있는 김라경은 무엇보다 여자야구 선수를 아마추어 사회인 야구인이 아닌, 한 명의 정식 야구 선수로 보는 일본 사람들의 관점이 좋았다고 했다.

"일본 여자야구 리그인 '비너스 리그'가 참 체계적으로 돌아간다. 여자팀 경기가 열리면, 멀리서도 꼭 와주시는 팬들이 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야구를 정말 잘 안다. 내가 일하는 접골원에 오시는 할머니들도 야구 규칙을 정말 잘 알고 계신다."

일본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자야구 실업팀이 존재하는 국가다. 초·중·고·대학교까지 여자야구 엘리트 팀이 존재하며, 취미로 야구를 하는 여학생도 1만 명이 넘는다. 김라경은 "엘리트 코스가 체계적으로 짜여져 있는게 참 부럽다. 우리 팀 감독, 코치님도 틈틈이 일선 학교에 좋은 선수를 스카우트 하러 다니신다"고 귀띔했다.

지난 5월 말엔 십수 년 기른 머리를 '싹둑' 자르기도 했다. 김라경은 "초등학교 5학년,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 '여학생' 이 아닌 '야구 선수'로 보이고 싶어 머리를 귀 밑까지 잘랐다. 그때 그 마음처럼 다시 새롭게 각오를 다지기 위해 그날 이후로 다시 머리를 가장 짧게 잘랐다"며 야구를 향한 진심을 드러냈다.

김라경은 "존경하는 사토 선배와 약속을 하나 한 게 있다. 바로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자'였다. 우리는 현재 선수로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고 공감대를 나눴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다부진 각오를 전했다.

큰 부상을 이겨내고, 국경을 넘어 다시 마운드에 선 김라경. 그는 지금 일본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서, 묵묵히 공을 던지고 있다. '야구에 미친 사람들' 속에서, 이제 외롭지 않다. 그라운드 위, 김라경의 인생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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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라경이 팀 동료들과 장난 치는 모습.
김라경이 팀 동료들과 장난 치는 모습.황혜정

 김라경이 튜빙 훈련을 하고 있다.
김라경이 튜빙 훈련을 하고 있다.황혜정

 김라경이 훈련에 앞서 몸을 풀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김라경이 훈련에 앞서 몸을 풀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황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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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필자는 전 스포츠서울 야구팀 기자입니다.
여자야구 김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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