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시민의식을 높이는 공공 자산이다."

김옥영 K-다큐멘터리위원회 위원장의 말이다. 2025년은 김옥영 위원장에게 뜻깊은 해다.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40여년 활동해온 김옥영 위원장이 올해 처음으로 다큐영화 감독이 됐기 때문이다. 그저 연출자도 아니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기계의 나라에서>가 초청되며 김옥영 위원장은 감독 자격으로 폐막식 레드카펫을 밟았다.

전주영화제 폐막작에 얽힌 사연

전주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발언하는 김옥영 위원장(맨왼쪽).
전주국제영화제전주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발언하는 김옥영 위원장(맨왼쪽).JIFF

한 젊은 다큐 감독이 있다. 허철녕.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출강했던 김옥영 위원장과 그곳을 졸업한 허철녕 감독은 사제지간이기도 하다. 김옥영 작가는 제 데뷔작이라 알려진 전주 폐막작 <기계의 나라에서> 연출자로 허철녕 감독을 섭외한다. 2021년의 일이다.

3년 간 허철녕 감독이 현장을 뛰어다니며 연출한 <기계의 나라에서>다. 이 작품이 올해 전주 폐막작으로 걸렸을 때 크레디트 위에 연출은 김옥영이라고만 적혔다. 허철녕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김옥영 위원장은 영화제 기간 동안 폐막작 연출자 자격으로 여러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모든 인터뷰에서도 허철녕의 이름은 빠져 있다. 일부 인터뷰에서 그나마 초기 연출자가 있었다는 언급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존재감이며 기여를 확인하기 어렵다. 김옥영 위원장이 스태프며 주인공과 함께 폐막작 감독으로 폐막식 레드카펫 위를 걸었을 때 허철녕 감독은 모멸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폐막작을 보고, 허철녕 감독의 입장을 듣고, 다큐 및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친 기초 취재를 거친 뒤, 김옥영 위원장의 의견을 묻고, 다시 허철녕 감독과의 인터뷰까지 진행했다.

먼저 밝히는 바, 허철녕 감독과 김옥영 위원장의 주장이 서로 대립하고, 감정 또한 얽혀 있어 외부자 입장에서 그를 일일이 따져보기 어렵다. 다만 충분히 사실관계를 밝힐 수 있는 대목이 존재하고, 반드시 현 시점에서 그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오늘 '씨네만세'에서 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기초 사실관계는 이렇다. ▲<기계의 나라에서>는 2021년부터 제작자 김옥영, 감독 허철녕 체제로 작업을 이어왔다. ▲3년 간 작품은 감독을 허철녕으로 하여 한국콘텐츠진흥원, 경기콘텐츠진흥원, 전주프로젝트에서 사업지원을 받았다. ▲2024년 5월 허철녕 감독의 가편집본이 제작사에 전달된 직후 양측 갈등이 본격화됐다.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 <기계의 나라에서> 감독은 김옥영으로 바뀌었다.

허철녕 감독에게 직접 물었다

허철녕 감독 사진
허철녕 감독사진허철녕

허철녕 감독을 지난 6월 2일·4일, 서울 안국역 인근 작업실과 홍대입구역 인근 등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옥영 대표가 각각의 현장(인천, 경기 여주, 경남 함안에 위치한 공장과 농장)에 한 번씩 왔었어요. 언제 왔느냐면 주인공들 하고 출연 계약서 도장 찍을 때랑 그 공장 사장님들한테 허락 받을 때, 그때 와서 계약서에 사인하신 거고, 이후에 촬영하고 현장에서 분위기를 풀어가는 일은 당연히 저의 역할이었고요. 작업을 시작한 21년부터 문제가 생길 때(2024. 5)까지 제가 있는 동안은 (김 대표가 현장에 온 적이)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어려운 영화니까 분업을 해보자고 했어요.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게 아니라 매일이 반복되는 이주노동자의 삶을 관찰하면서 이야기를 끌어내야 하는 거라서 작가주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연출자가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이미지나 이야기를 발견했으면 좋겠다고요. 또 어려운 작업인 만큼 영화가 제대로 나오기 위해선 제작부터 기획, 연출, 편집까지 다 혼자하면 힘에 부치니까 독립다큐 진영에 있는 너를 섭외하는 거라고, 제가 촬영을 해오면 제작자인 본인이 구성안도 쓰고 저는 연출에만 집중하자는 거예요. 전부 동의를 해서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겁니다.

2024년 5월에 가편집이 끝났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후련한 마음으로 가편집본을 보냈더니 회의를 하자고 답이 왔어요. (평소 하던) 회의실이 다 찼다면서 마곡동 대표님 집에서 보자 하셨는데, 첫 마디부터가... '너는 1년이면 끝날 작업을 왜 3년이나 끌었다고 생각하니?'라는 거였죠. 그동안은 저한테는 선생님이기도 하시고, 무엇보다 영화 기획자이고 제작자시니까 의견이 맞지 않아도 수긍하고 반영하려 노력해왔는데 이날은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과는 말이 다르지 않느냐고, 처음부터 어려운 작업이란 걸 알고 시작하지 않았느냐고, 작업이 느려진 이유를 말씀드렸어요. 그날 다 틀어진 겁니다."

사실관계는 간명하다. 2021년 2월 허철녕 감독이 <기계의 나라에서> 연출자로 섭외된다. 2021년 3월부터 2022년 3월까지 1년 간 한국콘텐츠진흥원 사업지원을 받아 작업을 진행했다. 기간이 만료된 뒤엔 2022년 3월부터 2023년 3월까지 경기콘텐츠진흥원 사업지원을 받으며 작업이 이어졌다. 2023년 5월엔 전주국제영화제 전주랩: 영상콘텐츠프로젝트에 선정돼 전주영화제작소 상까지 받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감독은 허철녕, 제작자는 김옥영이었다. 관계가 파탄에 이른 2024년 5월 이후 허철녕 감독은 배제된다. 3년여의 촬영에 가편집본까지 편집을 마친 뒤였다.

그 없이 후반작업이 이뤄졌다. 일련의 갈등 상황 속에서 허철녕 감독은 메일을 통해 프로젝트 하차와 감독직 사임 의사, 크레디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는 입장을 전했다. 다만 정식으로 업무종료계약 및 저작권 양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후반작업이 이뤄지는 수개월 간 연락은 메일을 통해 두어 차례 오간 게 전부였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폐막작으로 선정됐단 소식을 허철녕 감독은 뉴스로 접했다. 동의를 구해오는 일은 물론 없었다. 감독은 김옥영으로 바뀌었다.

전주영화제는 알고 있었다

문제는 총체적이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작품을 상영했다. 앞서 전주국제영화제 산하 전주프로젝트에서 연출자 허철녕 작품으로 선정하여 상을 안기고 멘토링 프로그램까지 진행한 작품이다. 허철녕이 감독이란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전주(국제영화제)에 (감독 배제 문제를) 알고 있었느냐고 질의했죠. 영화제 쪽에서 이렇게 답이 왔어요. '선정할 때부터 분쟁이 있단 걸 인지하고 있었다'고요. 그런데 김옥영 대표와 영화제가 굉장히 깊은 신뢰를 갖고 수년 간 일을 해왔대요. 그리고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김옥영 대표로부터 들었고, 믿음이 있기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폐막작으로 선정하기로 했다고요.(허철녕 감독)"(기자주- 이에 대한 전주영화제 측 답변을 확인했다).

허철녕 감독이 전주국제영화제에 문의할 당시까지, 영화제는 그에게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사실관계를 김옥영 위원장에게만 확인한 뒤 폐막작으로 선정했다. 허철녕 감독이 문제제기를 한 뒤에도 폐막작 변경은 물론이고, 폐막작 감독 표기를 고치거나 언론 및 관객에 고지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양 측 모두가 SNS에 입장을 발표한 현재까지도 입장표명을 않았다.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식 레드카펫 위를 김옥영 위원장이 감독자격으로 걸었단 건 결정적 순간이다. 그 곁엔 작품 스태프들과 출연한 네팔 노동자까지 있었다. 허철녕 감독과 김옥영 위원장의 갈등 사실을 영화제는 알고 있는 상태였다. 영화제 측에 문제제기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김옥영 위원장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폐막식에서도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연출이란 무엇인가

기계의 나라에서 작품 초기 취재 겸 기초인터뷰를 위해 경상남도 함안을 찾았을 당시, 김옥영 위원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허철녕 감독(맨오른쪽).
기계의 나라에서작품 초기 취재 겸 기초인터뷰를 위해 경상남도 함안을 찾았을 당시, 김옥영 위원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허철녕 감독(맨오른쪽).허철녕

허철녕 감독과 몇 차례에 걸쳐 나눈 대화, 그와 김옥영 위원장 사이에 벌어진 일을 구구절절 기사로 옮길 의사는 없다.

다만 허철녕 감독이 반드시 다루어줬으면 좋겠다고 바란 문제만큼은 외면할 수 없겠다. 바로 영화, 또 다큐에서 '연출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전 연출이란 게 바로 그때 그 시점에 감독이 주인공 캐릭터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관계를 쌓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들이 카메라에 담기며 발생한 모든 일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다큐멘터리 연출의 본질은 저는... 관계성에 있다고 생각해요. 과연 영화 속 인물들이 저와 김옥영 대표가 서 있을 때 누구를 감독이라고 인식하겠냐는 것, 3년 동안 관계를 쌓아온 걸 기반으로 그들이 허락해주는 선까지 충실히 담아냈고 기획한 김옥영 대표의 의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제 관점을 집어넣어 영화를 완성하는 것, 그게 제가 한 작업이었죠.

물론 프로듀싱과 기획, 편집, 촬영에도 다 각자의 역할이 있고 각자의 가치가 있어요. 그렇지만 결국에 다큐멘터리가 멋지고, 혹은 다큐멘터리가 되게 힘을 갖게 되는 건 주인공이, 그러니까 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이 어디까지를 감독에게 허락하고 보여줄 것인가. 그러니까요. 이건 그 어떤 그 허용의 문제인데, 전적으로 연출자인 감독이 주인공과 얼마만큼의 신뢰 관계를 쌓았고 주인공이 이런 이야기까지 나한테 들려줘도 납득할 수 있고 많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정도로 관계를 쌓는 것, 그게 저는 다큐멘터리 연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김옥영 위원장 "직접 디렉션했다"

김옥영 위원장에게 다수의 질의를 해 그 답을 얻었다. 답변 가운데 영화 속 네팔 현지 촬영분에 대한 언급이 있다. 총 72회 차 촬영 가운데 28회차가 김옥영 위원장이 '직접 디렉션'했다는 주장이다.

"총 촬영회차는 회사 측 계산 총 72회차입니다. 감독이 촬영감독 없이 단독 촬영한 회차를 포함(구체적 보고를 한 바 없어 작가를 통해 10여회차로 추정하면) 감독 촬영회차는 48회차이며 네팔 촬영분 9회차를 포함하여 제가 촬영감독 2인을 별도 기용하여 직접 디렉션한 것이 28회차입니다. 이 또한 모두 감독의 동의를 얻었고, 제가 의뢰한 이미지 촬영에 며칠간 감독이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중 김옥영 위원장이 디렉션했다 주장하는 28회차 중 9회차는 네팔 현지촬영이다. 한국에선 누구도 직접 가지 않고 현지 감독을 고용해 진행했다. 하지만 누구도 가지 않은 네팔 현지촬영을 '직접 디렉션'했다 말하는 이는 감독, 또 연출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없지 않을까.

지난 4일 <기계의 나라에서> 김선아 공동 프로듀서는 자신의 SNS에 '현장에 나가지 않은 사람이 감독이 될 수 있는가'란 질문을 던진 뒤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20명의 크루가 2000명의 사람을 인터뷰한 < HUMAN the movie >의 예를 들며, 인터뷰 영상을 직접 찍지 않고도 감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에 반대한다. 감독은 현장에 있어야만 한다. 시집을 읽고 이를 다큐로 만들겠다 결정한 김옥영 위원장을 나는 기민하고 감각 있다 여긴다. 그러나 <기계의 나라에서>는 기민함과 감각만이 아닌, 우직하고 섬세한 도전을, 오랜 기다림과 수고로움을 필요로 한다.

바로잡을 기회는 언제나 있다

확실한 것은 2024년 5월, 허철녕 감독이 편집감독에게 보냈다는 가편집본을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여긴다.

김옥영 위원장에게 가편집본을 보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옥영 위원장은 "편집본의 비교는 핵심쟁점과 상관없으며 작품비교는 지극히 자의적인 판단의 영역이어서 새로운 논란의 단초가 될 뿐"이라며 "허 감독의 편집본을 공개할 의사가 없다"고 전해왔다. 허철녕 감독 또한 "상대 측이 제 허락 없이 전주영화제에서 튼 게 문제인 것처럼, 제가 외부에 제출하는 것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어 어쩔 수 없다"며 거절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기회를, 선택의 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업계 유력인과의 분쟁을 공론화해 혹여 따를지 모를 불이익을 감당키로 결심한 허철녕 감독의 용기 덕택에 한국사회는, 영화계는, 우리 모두는 다시 한 번의 기회와 마주한다. 어쩌면 이것이 40년 다큐인생을 걸어온 김옥영 위원장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또 한 번 믿어보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전주국제영화제 JIFF 기계의나라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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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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