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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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약 3천 년의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동의 도시로, 전세계 인구를 합쳐 무려 46억 원의 신도를 차지하는 3대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공통의 성지로 꼽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본래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예루샬라임) 어원과는 달리, 수천 년간 종교·민족·영토가 뒤섞이며 끊임없는 피의 전쟁으로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민감하고 논쟁적인 도시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척박한 땅은 어쩌다 '성지'가 됐나

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세 종교의 성지는 왜 분쟁의 도시가 되었나' 편을 조명했다.

예루살렘은 고대부터 지형이 험준한 산악지대에 위치했고, 뜨겁고 건조한 기후에 불안정한 강수량으로 물이 부족해 사람이 살기에는 척박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예루살렘이 인류의 성지가 된 것은 '신앙'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을 가장 먼저 종교의 성지로 삼은 것은 유대인들이었다. 유대교에서는 예루살렘이 하느님이 주신 약속의 땅으로 성경에 기록됐다고 주장한다. <출애굽기> 3장 8절에 따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려 하노라"고 기록돼 있는데, 여기서 가나안은 예루살렘을 포함한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 일대를 의미한다.

유대민족은 기원전 1200년 경부터 신의 뜻에 따라 가나안으로 이주를 시도했다. 그들은 주변민족들과 기나긴 전쟁을 거쳐야 했다. 이스라엘 왕국의 2대 다윗왕은 중립지역이자 지형상 방어에 유리했던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왕은 기원전 959년 유대교 최초의 성전인 '솔로몬 성전'을 모리아산에 건축하면서 예루살렘은 명실상부한 유대교의 성지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솔로몬왕의 사망 이후 예루살렘 왕국은 큰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예루살렘은 이후 바빌로니아-페르시아-마케도니아-로마 제국 등 여러 강자들의 외침에 시달려야 했고, 민족의 구심점이던 성전이 무려 두 번이나 파괴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로마제국에 의한 2차 성전 파괴 당시 서쪽 벽에서 슬퍼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고 후대인들이 붙여준 이름이 '통곡의 벽'이었다.

한편 로마제국의 통치 시대에 예루살렘이 또다른 종교의 성지로 떠오르게 된 사건이 '예수의 탄생'이었다. 예수는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고 누구나 구원받을수 있다'는 성경의 교리를 전파하며 많은 기적을 행했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메시아를 칭하고 다녔다는 이유로 예수를 고발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시켰다.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다시 부활한 곳도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를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유대교에서 분리된 새로운 종파가 탄생한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다.

기독교는 초창기에는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았으나, 3세기 말에 이르면 인구의 1/10에 이르는 600만 명이 기독교 신자였을만큼 세력이 크게 증가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335년에는 예루살렘에 기독교 최초의 성전인 성묘교회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이어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로마제국이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예루살렘은 명실상부한 기독교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슬람교의 등장, 아슬아슬한 공존

한편 7세기경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또다른 종교인 이슬람교가 등장한다. 이슬람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창시한 종교로, 유일신을 '알라'로 칭했다. 무함마드가 하늘로 올라가 알라를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한 곳이 예루살렘이었다.

632년 아라비아 반도에서 최초의 이슬람 제국이 건설된다. 이슬람 제국은 세력을 확장하며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을 정복해나갔으나 637년에는 마침내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출생지인 메카와 무덤이 있는 메디나에 이어, 예루살렘에 황금돔과 알아크사 사원을 건립하고 자신들의 세 번째 성지로 선포한다.

이슬람 제국은 초기에 관용적인 정책으로 모든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그러나 985년 집권한 파티마 왕조의 6대 칼리프 알 하킴부터 선대의 관용책을 뒤집고 이슬람 중심의 강압적 통치를 자행했다. 이후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이어받은 셀주크 투르크 왕조는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를 차단하기에 이른다.

이에 분노한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11-13세기에 걸쳐 약 200여 년간 8회에 걸쳐 이루어진 십자군 대원정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은 큰 전쟁을 치르며 많은 희생을 겪었다. 또한 이슬람 세계 내부에서도 호라즘 제국, 맘루크 왕조 등이 명멸을 거듭하며 성지를 놓고 다투는 패권 전쟁이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예루살렘은 오랜 시간 평화를 잃어야만 했다.

1517년 등장한 오스만 제국은 분열된 이슬람을 통합하고 3대 성지인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을 모두 장악하며 '이슬람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의외로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펼친 오스만 제국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 성지를 순례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제국의 영향력 아래서 세 종교는 불완전하게나마 400여 년 간 아슬아슬한 공존을 이어갈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예루살렘의 운명을 또 한번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오스만제국이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패전하고 멸망하게 되면서, 제국의 영토는 승전국인 연합국들에게 분할된다. 예루살렘 일대를 차지한 영국은, 2차대전 당시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영토를 두고 아랍세력과 유대인들에게 연달아 '이중계약'을 맺으면서 훗날 중동 분쟁의 거대한 불씨를 초래한다.

부유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대거 매입하면서 위협을 느낀 아랍계와 유대계의 갈등이 고조된다. 양측은 성전산과 통곡의 벽 등 성지를 놓고 종교적 분쟁이 확산되며 곳곳에서 폭력 충돌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급기야 1946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당대 최악의 테러로 꼽히는 킹 데이비드 호텔 테러사건까지 발생했다.

난감해진 영국은 UN(국제연합)을 통해 투표로 유대인과 아랍인의 영역을 분리하는 영토분할을 결정했다. 하지만 아랍인은 인구의 1/3에 불과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영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UN의 결의안에 반발하며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초래한 영국은 1948년 팔레스타인 분쟁의 불씨를 남겨놓은 채 무책임하게 손을 떼고 철수해버린다.

이스라엘 건국, 그리고 시작된 유혈 충동

1948년 5월, 유대인들에 의해 이스라엘이 건국된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아랍 연맹국가들은 이를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단점령으로 규정하며 반발했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은 수차례에 걸쳐 치열한 '중동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스라엘은 중동전쟁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영토를 확정했다. 특히 1967년에는 '6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성지인 성전산과 통곡의 벽이 위치한 동예루살렘을 장악하고 2천년 만에 예루살렘 일대를 완전히 되찾는 데 성공했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비판을 고려해 성지를 독점하는 대신, 무슬림의 성지인 황금돔과 알 아크사 사원은 이슬람 재단이 관리하는 데 동의하며 다소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성전산을 둘러싼 고대유적 발굴과 주권 문제를 놓고 유대인과 아랍인들의 갈등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이 통곡의 벽 터널과 출구 건설을 핑계로 이슬람 사원이 있는 성전산을 빼앗아 유대교 성전을 지으려 한다고 의심했다. 또한 베냐민 네탸냐후-아리엘 샤론 등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은 극우 유권자들의 지지를 노리며 성전산 논란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이스라엘과 아랍계 양측의 빈번한 유혈 충돌로 번지게 된다.

2000년부터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의 대규모 봉기인 '알 아크사 인티파다'도 성전산 논란에 촉발된 종교갈등에서 비롯됐다. 5년간 이어진 인티파다로 인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을 합쳐 무려 수천여 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아이가 있으니 총을 쏘지 말아달라'는 팔레스타인 민간인 남성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울부짖던 아들이 끝내 총에 맞아 사망한 비극적인 사건은 이후 영상으로 공개되며 전 세계에 깊은 충격과 슬픔을 안긴 바 있다.

2017년 트럼프 1기 당시 미국 정부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며 유대인들의 손을 들어줬고, 팔레스타인과 아랍계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이후 2021년 라마단 성전산 무력 충돌, 2022년 유대인 성전산 집단 난입사태,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이 이어졌다. 2025년 현재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세력간 피에 피를 부르는 분쟁은 여전히 계속되는 실정이다.

'모든 종교는 도덕을 그 전제로 한다.' 철학자 칸트의 격언이다. 세 종교 공통의 성지로 가장 '평화로운 도시'가 돼야 할 예루살렘은, 이름과는 정반대로 '테러와 분쟁의 상징'이라는 오명을 안게 됐다. 관용과 이해가 없는 종교가 인간에게 어떤 비극을 가져올 수 있는지 예루살렘의 비극에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벌벗사 예루살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중동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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