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걸어간 길이 때론 역사가 되고, 침묵이 됩니다. 그리고 그 침묵 위에 우리 모두의 오늘이 세워지죠."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올라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까지 걷는 길. 무대 위로 불이 켜지고, 그 안에 '박덕배'가 선다. 나는 그를 처음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얼굴이다. 조용하게 묵묵히 시대를 지나온, 그러나 결코 기록되지 않았던 얼굴이다.
연극 <세기의 사나이>는 이런 얼굴에게 말을 건다. 이름 없는 자의 삶이 어떻게 시대를 증명했을까.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무게를 감당했을까. 바로 이런 질문을 무대 위에서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연출의 중심에 최원종이 서있다. 그는 역사는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한다. 덧붙여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바로 당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며.
그가 무대 위로 다시 불러낸 희곡 <세기의 사나이>는 2011년에 처음 만났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온도로 그의 가슴이 차오른다. 무엇이 그를 다시 이끌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한 인물의 고단한 삶에 숨을 불어넣게 했을까. 그 대답은 놀랍도록 일상적인 문장에서 시작됐다.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사는 날들이 쌓이니까, 어느 날 갑자기 그 페이지들이 울기 시작했어요."
이야기는 그렇게, 한 사람의 가슴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오는 25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재공연하는 연극 <세기의 사나이>의 최원종 연출가를 지난 3일, 대학로에서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다시 펼친 희곡, 가슴속으로 울다
▲연극 <세기의 사나이> 공연 사진
극단 명작옥수수밭
"그땐 그냥 지나쳤어요. 텍스트 너머에 웅크리고 있던 인물들의 숨결도, 가만히 울고 있던 침묵의 여백도 보이지 않았죠. 그땐 내 일이 아니니까, 그냥 옛날이라며 지나쳤죠. 그런데 아이를 낳고, 매일 숨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다 전혀 다른 것이 보였어요. 그 페이지들이 제 마음속에서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어요. 마치 예전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갑자기 밀려온 것처럼."
연극 <세기의 사나이>의 연출을 맡은 최원종 연출가의 말은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날처럼 고요하고 무거웠다. 그는 긴 시간을 건너온 사람처럼 생각에 잠겼다. 그 말은 잔잔하지만 깊게 스며든다. 희곡 <세기의 사나이>를 처음 접한 건 2011년. 그때는 그저 좋은 대본쯤으로 여겼단다. 그러나 10여 년이 흘렀다. 아이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아버지의 눈으로 다시 펼친 그 희곡은 전혀 다른 책이었다.
"파란만장한 우리의 근현대사를 다루는 작품이죠. 아이가 자라나게 될 나라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되새기게 되었어요. 역사는 과거가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딛고 선 땅이 아이가 걸어갈 길입니다."
텍스트를 넘어선 감정, 무대에 스며들다
▲연극 <세기의 사나이> 홍보 사진
극단 명작옥수수밭
"그때는 그냥 지나갔던 장면들이, 이제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와 닿았어요. 예전에는 지나가던 대사 하나, 숨죽이던 침묵 하나가 지금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에 꽂혔습니다. 이게 단순히 '과거' 이야기가 아니구나. 내 아이가 살아갈 나라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 연출가는 그때 느낀 감정을 '감정이 쏟아지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덕배가 울 때, 저도 따라 울었어요. 연출자가 대본을 읽으며 울면, 그건 연출해야 한다는 뜻이죠."
그는 그렇게 다시 이 작품을 꺼냈고, 극단원들과 함께 대본을 낭독하면서도 몇 번이고 목이 멨단다.
"처음 연습 들어가기 전에 배우들과 낭독회를 했어요. 다들 첫 장면 읽고 나서 한참 말이 없었어요. 누가 먼저 울었다기보단, 그냥 공기 전체가 멎은 것 같았죠."
낭독 후 배우들은 저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눈물을 닦았다. 누군가는 대사를 반복했고, 누군가는 무대 뒤편으로 걸어 나가 한참을 앉아 있었다. 최 연출가는 이 장면을 '공연 이전에 이미 시작된, 우리 각자의 연극'이라고 되새겼다. 그는 <세기의 사나이>를 통해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시절을 살아낸 이들의 삶과 감정을 고스란히 무대 위로 옮기려 노력했다.
"단지 사건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겪은 이들의 고통과 숨결을 관객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박덕배'라는 이름 없는 자, 바로 '우리'의 얼굴
<세기의 사나이>의 주인공 박덕배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 인물이 아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어디에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드라마속 등장인물이나 조연으로도 들어본 적도. 그는 우리가 잘 모르는,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 없는 자'다. 일제강점기의 조선 광부, 우키시마호 생존자, 해방 직후의 소시민, 한국전쟁 속 가장으로 말이다.
"그는 영웅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의 삶 자체가 질문을 던집니다. 그 시절에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덕배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는 불완전하다. 때론 소심하며, 흔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그냥 우리일 뿐이다.
"작가님이 이 인물을 쓴 이유는 명확합니다. 역사책에는 늘 영웅만 등장하죠. 하지만 영웅만이 역사를 만든 건 아니에요. 수많은 이름 없는 소시민들의 용기와 선택이 역사를 만든 것이죠. 이 작품은 그 목소리를 대신 전하고 싶었던 겁니다."
박덕배라는 인물은 극단 명작옥수수밭이 추구하는 역사 재조명 시리즈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2018년에 극단은 1910년부터 2000년대까지를 아우르는 한국 근현대사 시리즈를 꾸준히 무대에 올려왔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작은 사람들'이 있었다. 덕배, 길자중, 배민국… 그들은 선택 앞에 선 우리였다. 그들이 내린 선택은 지금 우리에게도 질문이 된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125년의 시간, 두 시간의 무대 위로 흐르다
▲연극 <세기의 사나이>를 연출한 최원종 연출가는 지난 3일 대학로에서 10여 년만에 이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린 이유를 설명했다.최원종
최 연출가는 말한다.
"희곡에는 원래 베트남전까지 다루고 있었어요. 하지만 무대화할 때는 한국전쟁까지로 범위를 축소했죠. 무대는 시간보다 감정이 우선이니까요."
그는 작가 차근호와 함께 수차례 대본을 다듬으며 관객에게 집중할 수 있는 개연성을 구성했다.
"그 인물이 어떤 시대를 통과했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인물이 왜 그렇게 흔들리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섰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관객은 줄거리보다 사람에게 반응합니다."
그는 그 말을 마치며 "내가 덕배를 연출하는 게 아니라, 덕배가 우리를 연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에 한동안 무게가 흘렀다. 역사는 그렇게, 덕배의 걸음으로 관객의 마음을 두드린다. 우키시마호의 폭발, 한국전쟁의 비극, 해방의 기쁨과 혼란, 그리고 그 속에서 길을 찾는 덕배의 삶은, 단지 과거가 아닌 현재로 이어진다.
"정지된 그림에 숨결을 불어넣다"
"무대에서 역사를 보여주는 일은 단지 과거를 묘사하는 게 아니라, 그 시대의 감정과 인간을 소환하는 일입니다."
최원종 연출가의 말은 곧 이번 <세기의 사나이> 무대 구성의 철학이기도 하다. 그는 영상처럼 시각적으로 화려한 재현이 아닌,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불러낸다. 이를 위해 그는 연극 무대에 '웹툰'이라는 장치를 끌어왔다.
"전쟁 장면, 해방의 소요, 탈출… 무대 위에서 직접 재현하기에는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한계가 있었어요. 그런데 웹툰 형식은 그걸 유려하게 보완할 수 있었죠. 특히 젊은 관객들에게는 친숙한 방식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무대 위에서는 커다란 배경 화면을 통해 웹툰 장면이 펼쳐지고, 그 앞에서 배우들이 동선에 맞춰 움직이며 실연을 한다.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서 과거가 다시 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방식은, 관객들에게도 강한 몰입을 안긴다.
"누군가는 이런 형식 덕에 역사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고 하더군요."
이번 재공연에서는 이 웹툰 요소를 더 유기적으로 정교하게 통합했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 초연 당시보다 장면 전환이 매끄러워졌음이 분명했고, 인물과 배경 간의 교차도 한층 더 섬세해졌다는 평가로 보인다.
관객의 울음, 역사의 공명
"초연에서 어떤 관객은 '이 작품은 나에게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고 했어요. 어떤 이는 '할머니가 해방 이야기할 때 울먹이던 장면이 떠올랐다'고 하셨고요."
최원종 연출가는 관객의 울음에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이다. 그는 공연 중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역사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이라 말한다.
"슬픈 장면이라서 우는 게 아니에요. 내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서 울게 되는 거죠. 덕배는 결국 우리 모두의 거울이에요. 어떤 시대에도 존재하는, 이름 없는 자들의 이야기. 그게 바로 우리의 이야기니까요."
그는 배우들에게도 "관객의 눈물을 끌어내야 한다"는 연출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진짜 인물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할 뿐이다.
"그게 되면, 울게 돼 있어요. 연기가 아니라 삶을 보면, 우리는 저절로 반응하니까요."
'이름 없는 자'에게 보내는 헌사
극단 명작옥수수밭은 20년 넘게 창작극을 무대에 올려온 공연예술 단체다. '명작이 옥수수처럼 풍성하게 열리는 밭'이라는 이름처럼, 매 공연마다 꾸준히 사회와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다.
"우리 극단의 창작극은 대부분 역사를 다뤘어요. 그것도 이름 없는 자들의 역사요. 그게 곧 우리 극단의 정체성이자 철학입니다."
이번 <세기의 사나이>는 그런 철학의 결정판 같은 작품이다.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자, 극단 창단 20주년이다. 연출가는 이 시기에 맞춰 이 작품을 올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명징한 의미 부여라고 말했다.
"광복 8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많은 것을 묻지 못했어요. 친일 문제, 분단 문제, 경제적 정의 문제… 덕배는 이 모든 시대의 질문을 끌어안고 살아온 인물이에요. 그러니까 덕배를 보면, 우리가 잊고 있던 질문들이 다시 떠오르는 거죠."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을 맺었다.
"연극은 질문입니다.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예술이죠. 그리고 그 질문을 받는 건 관객입니다. 덕배가 걸었던 길 끝에서, 관객들이 각자 자신의 질문을 안고 돌아가길 바랍니다. 그게 우리가 이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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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다. 그동안 문화예술 월간지에서 편집장(2013~2022)으로, 한겨레(2016~2023)에서 객원필진으로 글을 썼다. 현재는 대학로에서 공연과 전시를 보며 현장을 담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를 만나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낭독회에서 배우들 눈물, 그때 깨달았죠" 연출가의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