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삶을 배우들이 목소리로 전하는 음악극 <태일>이 개막했다. 장우성 작가와 이선영 작곡가, 박소영 연출이 합심해 기획한 '목소리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으로, 2018년 초연 이후 이번이 다섯 번째 시즌이다. 단기간에 오연을 진행할 만큼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며, 2019년에는 전태일 기념관 개관 기념 공연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태일>은 음악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며 극을 전개하는 음악극 형식을 빌렸다. 무대 옆에서 연주자들이 키보드와 기타를 라이브로 연주하여 음악을 보탠다. 연극의 대사나 가사는 전태일의 수기와 평전을 통해 구성했다.
2인극으로 한 명이 태일의 목소리를 전하고, 다른 한 명이 태일을 제외한 인물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태일의 어머니, 여동생, 아버지, 친구, 때로는 고용주나 부하 직원, 바보회(전태일이 결성한 노동운동 단체) 동료, 노동청 직원 등에 분한다.
초연부터 꾸준히 태일의 목소리를 연기해온 박정원이 다시 참여했고, 김리현과 김바다가 오연을 맞이하여 새롭게 합류했다. 태일 외 목소리는 김국희·이현진·이예지가 연기한다. 김리현과 이예지는 지난해 공연된 '목소리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품 < 섬: 1933-2019 >에 출연한 바 있다. 5월 14일 개막한 <태일>은 7월 20일까지 대학로 TOM 2관에서 공연된다.
▲음악극 <태일> 공연 사진
(주)아떼오드
목소리로 전해지는 태일과 소시민의 이야기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 가족 중 일부가 떨어져 지내고, 그중 어머니는 서울에 식모 자리를 구하러 간다. 소년은 학교를 다니는 게 꿈인데, 그 꿈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왠지 모를 죄스러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이는 태일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당대를 살아가던 다수 소시민의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열악한 노동 환경, 직업병, 그리고 아파도 생계를 위해 노동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은 특수한 몇몇의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인 생활상이었다. 이처럼 팍팍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름은 잊혀진 지 오래다. 재단 공장에서 말단 직원을 '시다'라고 부르는데, 13살 소녀 노동자는 이름이 아닌 "2번 시다"라고 불릴 뿐이다. 태일은 어린 소녀 노동자를 보고 부모 앞에서 어리광 부리는 게 더 어울리는 나이라며 안타까워한다.
태일도 같은 처지다. 태일이 거리에서 우산을 팔 때 누군가 우산을 사기 위해 "학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태일은 반응하지 않고, 곧이어 "우산"이라고 소리치자 그제서야 태일이 뒤를 돌아본다. 이 장면에선 태일 스스로가 반응한 것이라 더 마음이 아팠다. 태일은 자신의 정체성을 학생이 아니라 거리에서 우산을 파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름 없는 평범한 소시민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 조건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했다. 노동자를 기계처럼 취급하는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했다. <태일>은 배우들의 목소리를 통해 태일을 비롯한 당대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일하는 당대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일하면 내일은 다르겠지,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내일은 그저 오늘의 복사본일 뿐이다.
연극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도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워킹 푸어(working poor) 또는 근로 빈곤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데도 혹자는 노력하지 않아서 궁핍한 삶을 산다고 비난을 쏟아낸다. 열심히 살아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비난과 차별까지 감수해야 한다면, 그건 사회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 아닌가.
▲음악극 <태일> 공연 사진
(주)아떼오드
전태일 앞에 부끄럽지 않은 시민이고 싶습니다
태일은 잘못 돌아가는 세상의 중심에 서있다. 보편적인 다수의 사람들은 머리로 알더라도 실제로 행동하긴 쉽지 않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팍팍할수록 자신만을 돌보게 된다. 하지만 태일은 달랐다. 자신도 없는 처지에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먹을거리를 내어주고, 자신도 일에 지쳤으면서 부하 직원의 잡무를 돕는다.
연극이 초중반부까지는 태일과 주변 인물들을 통해 보편적인 시대상을 그려냈다면, 중반을 지나면서부터는 전태일이라는 인물만이 가진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힘을 쏟는다.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 태일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바보회'를 결성하고, 지극히 당연한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이 바보처럼 사용자에게 착취당하는 현실을 항의하듯 '바보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에서 필자는 다시 한 번 울컥했다. 현실 속 노동자들의 모습도 바보 같았지만, 요구가 수용될 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모한 싸움을 벌이는 태일과 노동자들의 모습도 일면 바보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떠오르는 말은 '우공이산'이었다. 지금의 사회가 과거에 비해 조금이라도 진보했다면, 그건 전적으로 과거의 바보들에게 우리가 빚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미에 이르러 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읊는 장면에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태일의 목소리는 당차고 굳세었지만, 22살의 태일은 두려웠을 것이다. 스스로를 내던지리라 다짐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것이라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태일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나는 기억되고 있습니까?"
음악극 <태일>의 슬로건이다. 극장을 나오며 이 글귀 앞에서 속으로 이야기했다. 기억되고 있다고, 당신이 기억되는 이유는 그저 당신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기 때문이라고. 마침 필자가 <태일>을 관람한 날은 사전투표일이었고, 필자는 투표를 마치고 연극을 관람했다. 그래서 포스터 앞에서 속으로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사회는 쉽게 바뀌지 않기에 지금 이 사회가 당신 앞에 여전히 부끄러운 사회일 수 있지만, 적어도 우리는 당신 앞에 부끄럽지 않은 시민이 되고 싶다고.
▲음악극 <태일> 공연 사진(주)아떼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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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투표일, '전태일' 포스터 앞에서 이런 다짐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