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판타지 사극 <귀궁>의 주인공은 궁에서 안경 기술자로 일하는 인간 여리(김지연 분), 궁궐 관료의 육신을 빌려 사는 이무기 강철(육성재 분)이다. 복잡한 관계로 얽힌 이들은 왕실을 위협하는 팔척귀라는 악귀에 맞서 싸우는 동료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가 배경인 이 드라마에서는 여리와 강철의 출근 시각이 너무 늦다. 이들은 해가 다 뜬 환한 아침에 출근한다. 조선왕조는 새벽 4시 12분에 종각의 종을 서른 세번 쳤다. 종각은 한양뿐 아니라 지방에도 있었다. 환한 아침에 여유롭게 출근하는 둘의 모습은 국가가 그 새벽에 백성들을 깨운 이유와 동떨어진다.
새벽 4시 12분, 종이 울리다
▲SBS <귀궁> 관련 이미지.SBS
중국 춘추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시경>은 고대인들이 얼마나 일찍부터 움직였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 제풍(齊風) 편에는 인천 맞은편인 산둥반도에 있었던 제나라의 조정 풍경이 나온다. "닭이 이미 울었다/ 조정이 이미 꽉 찼다고 하였다"라는 시구를 발견할 수 있다.
주자는 <시경> 해설서인 <시경집전>에서 '조정에 이미 꽉 찼다'를 '조정에 모인 신하들이 이미 꽉 찼다'로 풀이했다. 옛날에는 어진 후궁들이 날이 새기 전에 군주에게 '닭이 울었으니 조정에 신하들이 꽉 찼을 겁니다'라며 출근을 독려하곤 했다고 주자는 해설했다.
비슷한 장면을 <아라비안나이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기 8세기에서 13세기까지 존속한 압바스왕조의 시대상이 배경에 깔린 이 책에는 이슬람 군주인 술탄이 새벽에 어전회의를 주재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시경>에는 지금의 중국대륙 중앙에 있었던 정나라의 어느 부부가 대화하는 장면도 나온다. 시에 등장하는 부인은 첫닭이 운 직후에 "그대는 오리와 기러기를 잡아오라"고 남편에게 말한다. 첫닭이 울었으니 어서 나가서 일하라고 독려했던 것이다.
이른새벽부터 노동하는 장면은 중동이나 중국뿐 아니라 고대 한국에도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국가가 새벽 4시 12분에 종을 울린 것은 이때쯤이면 쳐도 괜찮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국가는 항상 민심 동향을 예의주시했으므로, 대중의 평균적인 기상 시각을 고려해 타종 시각을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새벽부터 신하들이 조정에 모인 왕조시대에는 군주 역시 부지런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야간 근무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해가 중천에 뜰 때쯤 돼야 신하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군주는 리더십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군주가 신의 대리인이라는 위상을 갖고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제 시각에 출근하지 못하는 군주는 그런 위상을 지켜내기 어려웠다.
성균관대 출판부가 발행한 <정조어찰첩>에는 음력으로 정조 21년 5월 5일(양력 1797.5.30.)에 45세의 정조가 67세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돼 있다. 정적 같은 신하인 심환지는 정조가 죽자마자 정조의 개혁을 원위치시켰다. 생전에 정조는 심환지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어찰을 자주 보냈다. 이 편지에서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늘그막의 근력으로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내일 비변사 회의 때는 병을 핑계대고 내일 모래 강연을 열 테니 곧바로 주자소에 출근하는 게 어떻겠소?"
심환지 그대의 나이나 체력으로는 새벽 회의 참석이 힘들 것이므로 내일 새벽으로 예정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연기해줄 테니 국영 인쇄소로 느긋하게 출근하라고 알려주는 내용이다. 연로한 신하에 대한 배려의 마음도 묻어나지만, 이른새벽부터 부지런히 나랏일을 돌보는 정조의 자신감도 배어나는 대목이다. 정적을 상대로 자신의 체력과 부지런을 과시했다고 볼 수도 있다.
정조뿐 아니라 대부분의 군주들이 그렇다 보니 신하들도 이른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풍토로 인해 자칫하면 대형 사고가 일어날 뻔했던 일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어우야담' 속 민기문 이야기
광해군의 최측근인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중종·인종·명종·선조시대를 살았던 민기문이 등장한다. 20세에 과거시험 소과에 급제하고 29세에 대과를 통과한 그는 임금 비서실인 승정원에도 근무하고 국립대학 총장인 성균관 대사성도 역임하고 차관급인 황해도관찰사도 역임했다.
그가 60대 초반 나이로 승정원에 근무할 때였다. 그는 평소처럼 말을 타고 대궐에 출근했다. <어우야담>은 "민기문이 승지로 있을 때 새벽 종소리를 듣고 대궐에 가다가 말 위에서 졸았다"고 말한다. 이른새벽에 일과를 시작하는 군주를 보좌해야 하다 보니,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도 새벽에 말 위에 올랐다가 '졸음 운전'을 하게 됐던 것이다.
말 위에서 민기문은 꿈까지 꿨다. 몇 년 전에 죽은 친구가 나타나 "우리 집에서 술과 안주를 잘 먹고 간다"는 말을 건넸다. 그 순간, 민기문의 코에 술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 때문에 깨어보니 말 위였다.
그날 민기문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친구 집에 사람을 보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알아보니, 민기문이 졸았던 그 시각에 친구 집에서는 제사가 끝났다. 아침에 말에서 졸다가 친구의 제삿날을 재차 알게 됐다는 이야기가 유명해져 <어우야담>에 수록됐던 것이다.
민기문과 심환지의 경우에는 애로 사항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옛날 사람들은 새벽 출근을 일생 동안 무난히 해냈다. 그들은 <귀궁>의 등장인물들보다 훨씬 일찍 일과를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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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