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외면하는'이라 적다 말고 주춤하고 만다. 글쟁이의 습관적 어휘선택이 이처럼 진실을 왜곡하는구나 싶어져서다. 그렇다.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외면하는 데 더는 애를 쓸 필요조차 없다. 보기 싫은 진실, 눈살이라도 찌푸릴 만한 구석들을 더는 주변에 두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자랑스러운 우리 나라, 한국 이야기다.

한국은 대단한 나라다. 전쟁과 분단으로 세계의 원조를 받는 극빈국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 GDP 순위 12위(2025년 기준)의 경제강국으로 도약한 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국민 중 모르는 이 없는 '한강의 기적', 괜히 기적이란 말이 붙은 게 아니다. 변화는 극적이었고 일견 아름답기까지 했다. 세계 곳곳에서 그 비결을 물어 한국을 찾는 건 자연스럽다. 위상의 변화는 비단 경제부문에만 그치지 않는다. 영화와 드라마, 문학과 음악, 각종 문화산업에 이르기까지 K-컬쳐는 한국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세계 문화를 선도하고 최고 수준에서 당당히 경쟁한다. 이것이 한국의 오늘이라 해도 틀리지가 않다.

그러나 어디 그것만이 전부일까.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찾아오는 서울과 수도권 메가시티의 이면에는 그를 지탱하는 산업이 자리한다. 그 산업 가운데서도 가장 위험하고 더러운 고리를 우리는 우리 중 가장 약한 이에게 맡겨두고 있는 것이다. 도시를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가. 도시가 사용하는 에너지를 공급하고, 도시에서 배출하는 쓰레기를 처리하며, 도시가 필요로 하는 제품을 제공하는 것이 모두 도시를 지탱하는 일이다. 에너지는 발전소에서, 쓰레기는 매립지에서, 필요로 하는 제품들은 지방의 공장이며 농장에서 만들어진다.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도시에서 살지 않지만 도시를 위해 기능하는 존재들이다.

기계의 나라에서 스틸컷
기계의 나라에서스틸컷JIFF

병풍으로 가려둔 민망한 진실

<기계의 나라에서>는 한국의 오늘을 직시하도록 한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일면만이 아닌, 그 아래 자리한 민망하고 추악한 자리까지를 직면하도록 한다. 병풍으로 가려둔, 곰팡이 슬고 썩은 내가 올라오는 그 자리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땅 위에 있음을 깨우치게 한다.

전주국제영화제 관할 하에 2023년 제15회 전주프로젝트 '전주랩: 영상콘텐츠프로젝트'에 선정돼 전주영화제작소상을 받은 허철녕 감독의 연출작이다(기자주-당시엔 허철녕 감독 이름으로 제출됐으나, 올해 전주영화제에선 제작자 김옥영 대표가 감독으로 올라있다). 90분을 조금 넘는 다큐멘터리로, 소위 3D산업(Dirty, Dangerous, Difficult)에 투입된 노동자, 그중에서도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촬영해 내놓은 결과물이다. 고용허가제 정책에 따라 입국한 네팔 노동자 딜립 반떠와, 수닐 딜떠 라이, 지번 커뜨리를 주인공 삼아, 먼 나라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삶을 택한 이들의 시선으로 그 삶, 나아가 세상을 비춘다. 그 세상이 우리 한국이 별 노력 없이 외면해온 우리 오늘의 단면이란 게 이 영화가 겨냥하는 바일 테다.

기계의 나라에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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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이주노동자가 쓴 시, 그대로 영화가 됐다

<기계의 나라에서>는 그 형식에서부터 눈길을 끈다. 작품의 가장 중심되는 특징은 책이 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문학의 한 갈래이자 정수라고까지 불리는 바로 그 시(詩)다.

2020년 한국에서 출간된 시집 한 권이 있다.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가 바로 그것으로, 네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마주한 처참한 노동현실과 고된 삶을 시로 써서 책으로 묶어낸 결과다. 그간 네팔을 비롯해 베트남과 태국 등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는 한국 활동가의 시선을 거쳐서만 전해져왔다. 언론이 파고들지 않는 현장을 이따금이나마 찾는 활동가들이 있어 간간이 그 사연이 전해지긴 했으나, 정작 내밀한 이주노동자의 목소리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밖에 없었다. 서로 다른 문화와 배경, 이해관계를 가진 외부인, 즉 한국의 선주민이 이주민인 당사자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게 불가능한 때문이었을 테다.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진 저작이다. 35인의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서로 다른 일터에서 느낀 고충과 삶의 모양을 저만의 감수성으로 엮어낸 작업이 독자에게 상당한 울림을 전한다. 책은 그저 한국 노동현실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저들의 존엄과 존재를 훼손하는 폭력을 짚어내고, 네팔인의 자긍심과 삶의 방식이 무너지는 현상을 기록한다. 오로지 언어로, 저들 모국의 때 묻지 않은 언어로써 한국의 기계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모습이 대체 누가 인간다운가를 묻는 듯하여 얼굴이 벌개진다.

카메라는 시를 쓰는 노동자에게 다가서 그 삶을 시각적으로 구성했다. 통상의 산업재해는 물론, 자살까지 이어지는 환경 속에서 네팔노동자는 제가 생존한 오늘을 시로써 적어낸다. 아메리칸 드림, 사우디 드림, 베트남 드림을 꿈꾸며 낯선 나라로 건너갔던 우리네 어른들처럼 꿈과 희망일 줄 알았던 현실이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단 걸 네팔이주노동자들 또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기계의 나라에서>는 다섯 명의 네팔 이주노동자를 비춘다. 딜립 반떠와, 수닐 딜떠 라이, 지번 커뜨리는 아직 한국에 있고, 러메스 사연, 어이쏘르여 쉬레스터는 네팔 현지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중 아직 한국에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중심된 줄기를 이루는데, 개별적 삶이 어떻게 사회, 객석에 가만히 앉은 관객의 삶과 닿을 수 있는지가 이 영화가 맞닥뜨린 과제처럼 읽힌다.

기계의 나라에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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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한국의 처참한 단면

영화가 포착한 이들의 삶은 기실 우리 스스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다. 애써 외면하지 않아도 들려오지 않을 뿐, 이따금씩은 그들의 존재부터 문제까지를 언론이며 책과 영화를 통하여 접할 수가 있는 때문이겠다. 네팔 이주노동자는 아니라도, 다른 나라 이주노동자들, 또 실습생이며 현장 노동자의 얼굴로써 우리는 수시로 이들의 존재를 알아챈다.

기사에서 이들은 온갖 사고로, 과로로, 괴롭힘으로, 우울증으로 죽고 다친다. 기록에 남는 탓으로 산업재해를 인정해주지 않으려 꼼수를 쓰는 업체의 몰염치도 더는 새롭지 않다. 여권을 빼앗고 임금을 체불하며 부당한 노동을 강요하는 한국인 업주의 몰상식함도 마찬가지다. 양심 위에 웃자란 털은 수시로 깎지 않으면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현실과는 괴리된 도시의 찬란한 일상은 때때로 들려오는 수면 아래 사고에도 더는 반응하지 않는 듯하다.

<기계의 나라에서>가 인상적인 건 통상의 노동영화와 다른 접근법을 채택했다는 점일 테다. 이 나라에선 멸종위기종인 시로써, 그들의 사연을 전하는 작업부터가 그러하다.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에 수록된 시어를 실제 작가이자 네팔 이주노동자들이 상황에 맞게 읊는 모습은 시집과 영화 사이에서 서로의 유효함만 끄집어낸 듯 선명한 효과를 발휘한다. 실전된 줄만 알았던 진솔한 시어들이 실재하는 현장에서 비어져 나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니 좀처럼 열릴 줄 모르던 문조차도 끼익-하고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평화롭고 안온한 네팔 사회에서 치열하기 짝이 없는 한국 사회로 건너온 이들이 제 감수성과 자긍심을 별 어려움 없이 보전하길 바라는 건 유치한 기대일 뿐이다. 하나하나 마침내 많은 것이 바스라진 자리에서 이들이 시로써 저를 지켜내길 택했단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 기록은 저를 침범하고 훼손하려는 폭력의 진상을 규명하고, 끝끝내 무너져선 안 될 자기의 자리를 확인한다. 물론 현실이란 만만치가 못하여서 한국과 한국의 노동, 한국의 사장님들은 차마 옮기기 민망할 만큼 저열할 때가 많다.

시에 더하여서 영화는 네팔 노동자의 알려지지 않은 죽음들을 눌러 새긴다. 지번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담담한 사실들, 그가 제 모국에 써보낸 실재하는 기사들은 한국인이 애 쓰지 않고 외면해온 뭉개지고 부러진 생의 기록들이다. 추락, 절단, 심장마비, 자살, 결코 원치 않았을 이주노동자의 비극적 결말들이 한두 줄 짤막한 글로 언급되는 동안 스크린 위에선 우리와 얼마 다르지 않은 딜립과 수닐, 지번의 오늘이 간신히 위태롭게 이어진다.

기계의 나라에서 전주프로젝트 전주영화제작소상 수상작
기계의 나라에서전주프로젝트 전주영화제작소상 수상작JIFF

이주노동자 너머 가축이 보이는 순간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영화의 시선이다. 세 이주노동자의 일터에서 이들의 일상을 진득하게 관찰하는 카메라는 그저 이들 개인만을 포착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딜립은 남쪽 어느 도시에서 젖소 농장의 직원으로 일한다. 이곳에서 그는 홀로 수십 마리의 소를 책임지는 일꾼인데, 시간마다 밥을 주고 똥을 치우고 젖을 짜는 모든 작업을 그 홀로 감당한다. 영화는 딜립이 어린 생명을 유달리 아낀다는 사실을 비추는데, 어느날인가 젖소 중 어린 녀석 한 마리가 그만 죽고 마는 것이다. 딜립이 그를 수레에 싣고 가 미리 파둔 구덩이에 떨구고 돌아오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찍었던가. 그 뒤로 또 아무렇지 않은 노동자의 죽음이 내래이션으로 흘러나왔던가를 나는 차마 기억하지 못한다.

영화가 딜립의 일터를 비추는 동안 그 배경처럼 등장하는 소들이 불쑥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쇠로 지어진 외양간에 갇혀 딜립이 가져다 대는 착유기로 젖을 빨리는 소들의 모양이 어딘지 '기계의 나라'에 소유된 목숨 붙은 재산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생명이 아닌 물건, 쓰다 버리고 죽으면 치워지는 그것들의 모습이 그를 돌보는 딜립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듯한 건 어째서일까.

분명한 것은 영화가 담고 있는 현실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 한국의 일면이라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죽음과 다침, 존엄의 짓밟힘이 이뤄지는 현장 위에서 한국은 오늘의 영예를 구가한다. 그 모든 부조리를 애써 외면할 필요조차 없게끔 보이지 않는 곳에 격리해두고서 오직 우리만의 화려한 번영을 구가하는 한국의 오늘이 민망하기만 하다.

영화 후반부, 네팔 이주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의 오늘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적잖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한국 사람이 서로를 기계처럼 대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단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한국의 오늘을 이룩한 이유라고 평가한다. 이를 배워야 한다는 듯 이야기하는 한 친구에게, 맞은 편에 앉은 이가 그건 결코 인간이 따라가선 안 될 길이라고 반박한다.

가만히 이들의 대화를 듣다보면, 두유노 박지성, 두유노 김연아, 두유노 비티에스 같은 질문과 그에 따른 답보다도 훨씬 더 솔직한 한국의 일면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된다. 우리는 진실로 우리의 모습을 알고 있는가. 우리의 진면목이 꼭 우리가 듣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부분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기계의 나라에서>를 보고난 뒤, 나는 평생을 살아온 내 나라와 비로소 제대로 만난 듯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전주국제영화제 JIFF 기계의나라에서 김옥영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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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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