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본래 부조리하다. 이따금 가벼운 접촉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드러누워 보험금을 더 받겠다 떼를 쓰는 이를 본다. 시비가 붙은 이에게 얼굴을 들이밀고는 쳐봐쳐봐 배짱부리는 이도 본다. 사내대사내로 붙어놓고 한두 대 맞았다고 고소를 운운하는 경우도 본다. 나는 이 모두가 한국이 질서가 서 있는 안전한 곳이기에 가능함을 안다. 한국은 법과 질서가 선 나라다. 그리하여 바깥에선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이곳에선 해낼 수가 있다. 야성을 좀 잃는대도 어떤가. 야비한 이들이 조금 득을 본대도 괜찮다. 신뢰가 서는 일이 훨씬 더 중한 때문이다.
국법이 작동하지 않은 영역이 있다. 수입수출로 먹고 살고, 그 전에 에너지를 전량 해외에 의존하며, 그보다도 국가방위를 해외 동맹국에 기대어서 유지하는 한국이다. 나라 안엔 질서가 섰대도 부조리한 세계와 동떨어져 살 수는 없는 게 현실. 화가 치밀어도 힘을 빌어오고, 굴욕적이어도 뒤따라 걸으며, 싫더라도 물건을 팔아야만 한다. 법과 질서가 없는 곳에서 역시 법과 질서를, 때로는 윤리까지 넘나들어야 하는 사람들을 나는 얼마만큼 마주했었나. 앉은 자리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다. 선 자리에선 닿지 않는 경치도 있다. 안전한 수조 안 쉬운 판단이 민망한 진짜 물밖 세상이 있다.
기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겨울의 빛스틸컷
JIFF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수상작 <겨울의 빛>은 조현서 감독의 89분짜리 장편이다. 한국사회에 실재하는 야만적 경쟁의 일면을 비춘다. 작품 가운데엔 처음부터 출발선이 다른 아이들이 등장한다. 같은 교복을 입었으나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아이들의 차이, 가까이 다가서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어쩌면 알게 될까 두려워 모른 척 거리를 두는 불편한 진실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빈(성유빈 분)은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보인다. 아마도 우리가 길을 걷다 다빈을 보았다면 그가 지탱하는 삶의 무게가 다른 아이들의 것과 상당히 다르단 걸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테다. 몇 년 전만 해도 다빈은 평범은 물론이고 다복하다고도 할 수 있는 아이였을 테다. 사랑 많은 부모와 형, 그리고 여동생 사이에서 특별히 부족함 없는 둘째였으니 말이다.
▲겨울의 빛스틸컷
JIFF
아버지는 자살, 형은 도망, 동생은 장애
몇 년 전 모든 게 바뀌었다. 나이차이가 있는 막내동생은 청각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사업에 실패한 때문일까. 아버지는 빚을 안고 자살했다. 어머니는 홀로 남은 아이들을 책임지려 분투하지만 재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갈수록 종교, 교회 목사에게 의지하는 모습이 불안한 것은 다빈이 감수성 있는 청소년인 때문일까. 귀가 나아지지 않고 수시로 두통을 호소하는 동생을 보는 일이 갈수록 힘들기만 하다. 형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게 된 뒤로 동생을 학교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은 전부 다빈의 몫이다. 엄마는 종일 일해 생활비며 병원비를 는 데만도 힘에 부치지 않던가.
다빈이라고 이렇게 살고 싶었을까. 나쁘지 않은 머리로 악착 같이 공부한 덕으로 어찌저찌 명문대 진학반에 들어갔다. 같은 반에 있는 여자친구 재은과는 좋은 관계기도 하다. 남몰래 무인모텔을 찾아 시간을 보내는 둘은 벌써 제법 깊은 사이다. 물론 모든 것이 좋을 수는 없다. 재은의 엄마가 다빈을 끔찍이도 싫어하여 같이 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단 걸 둘 모두가 알고 있다. 누구도 입 밖에 꺼내려 들지 않는 그 이유까지도.
다빈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주변 모두가 숨 막히는 풍경뿐이다. 제 잘못이 아닌 것들이 저를 칭칭 휘감아 옴짝달싹 할 수 없도록 한다. 애인을 만나는 것도, 친구를 사귀는 일도, 하나뿐인 제 동생을 아끼는 일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하물며 학업이랴.
<겨울의 빛>은 학교가 '해외 교류연수'란 명목으로 학생들을 싱가포르에 보내기로 결정하며 급변한다. 옛 수학여행 비슷한 성격의 여행을 '연수'란 이름을 붙여 해외로 보내는 학교가 요새 제법 되는 모양으로, 학생들 사이에선 적잖이 설레는 행사일 밖에 없는 일이다.
▲전주국제영화제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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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만 바라는 순간이 올지라도
문제는 다빈처럼 사정이 되지 않는 경우다. 수백 만 원에 달하는 참가비를 도저히 마련할 구석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다빈 스스로가 알고 있지만, 가뜩이나 면 안 서는 재은 앞에서 남들 다 가는 여행마저 가지 못한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학교에 영 적응하지 못하는 동생 은서를 농학교에 보내기 위해 엄마가 충청북도 청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하기까지 했으니, 다빈에겐 재은과의 여행이 추억을 쌓을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는 일이다. 이쯤이면 저 신경림 시인을 소환할 밖에 없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서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중에서
<겨울의 빛>은 다빈의 사랑만을 다루지 않는다. 가난하여 사랑하는 마음마저 죄스럽게 여겨야 하고, 가난하여 동생에게 좋은 오빠일 수만은 없으며, 가난하여 아들과 친구노릇도 제대로 하기 버거워 하는, 가난하여 제가 잘 할 수 있는 공부에서까지도 밀려나기만 해야 하는 소년의 삶을 비춘다.
영화는 끝끝내 누구의 잘못인지를 쉽게 겨냥해 탓할 수 없도록 한다. 보듬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단 걸 알리고, 분명히 존재하는 햇살일지라도 방치된 곳에는 좀처럼 닿지 않음을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는 '겨울의 빛'이라고 명명되었는데, 영화를 보면 볼수록 그 빛이 희미하고 무력하게만 여겨지는 것은 왜인가.
오늘의 사람들은 공을 두고 양 편에 열 한 명의 선수만 있다면 그것이 공정하다고 믿는다. 다빈이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을 수 있었으므로 공정한 게임 안에 든 것인가. 그 삶을 구하기 위해 평범한 빛이 아니라 기적이 필요한 듯 여겨지는 건 어째서일까. 나는 도저히 그 답을 소리 내어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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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아버지는 자살·형은 도망·동생은 장애, 소년의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