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한다. 효자조차도 간병 앞에 무너진다는 얘기다. 효자가 아닌 이야 어찌될지 빤하다. 긴 병은 자식에게 자식 된 도리마저 빼앗는다.
자식된 도리를 지키려면 둘 뿐이다. 부모가 긴 병을 얻지 않거나, 사회가 간병에 개입하거나.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후자뿐이다.
현대 복지국가는 간병을 공공의 영역으로 껴안길 선택했다. 간호와 간병을 통합한 병동을 두고서 병원이 간호 뿐 아니라 간병의 책임까지 지도록 한다. 의료를 민간에 떠넘기지 않고 공공의료제도를 확충하여 개별 효부효자는 물론이고 나와 같은 불효자마저도 인간 된 도리를 하도록 한다. 그를 돌봄을 책임지는 사회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국은 어떠한가.
▲겨우살이스틸컷
JIFF
더는 예외적 문제가 아니다, '간병' 이야기
한국에서 간병은 개인의 영역이다. 사회적 보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무조건 더 달라는 거지마인드가 아니다. 세계적 기준, 흔히 비교하길 즐기는 OECD 가입국 기준에서도 최하위권을 달린다(관련기사:
이재명과 김문수 대선후보의 공통 공약에서 알 수 있는 것 ).
그 결과는 이렇다. 가족 중 어느 하나가 아프면 집안이 흔들린다. 긴 병, 희귀병에 걸리면 간병부담으로 집안 하나가 거덜나기 십상이다. 치료비와 입원비, 약값, 간병비 부담에 빚을 내고, 그를 감당키 위해 일과 간병에 매진한다. 끝을 알 수 없는 간병의 굴을 지나며 사회적 고립과 정서적 우울을 버텨내야 한다. 그 속에서 제가 가장 사랑했던 이가 차라리 빨리 죽기를 바라게 되는 순간이 수시로 찾아든다고 적잖은 이들이 고백한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는 간병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선정돼 활동한 이정현의 데뷔작 <꽃놀이 간다>도 빚에 허덕이다 혼수상태인 엄마를 병원에서 탈출시키는 딸의 이야기를 다뤄 관심을 모았다. 간병문제를 오로지 성인인 가족만이 감당하는 건 아니다. 나이든 배우자가 간병하는 이른바 '노-노 간병'부터, 장애인 자식을 간병하는 부모들의 사례, 아직 어린 자녀들이 어른을 간병하는 '영케어러'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겨우살이스틸컷
JIFF
26회 JIFF가 이 영화에 대상을 안긴 까닭
개중엔 미성년 청소년이 간병부담을 떠안는 경우도 있다. 사회와 언론이 대개 굵직한 줄기에 주목하는 탓으로, 상대적으로 수가 많지 않고 사회적 통로가 없이 고립된 청소년 간병 이야기는 좀처럼 전해지지 않는다. 성인도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맡아 소진되고 고립되는 청소년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하는가. 대하기라도 하면 다행일 테다.
<겨우살이>는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대상 수상작이다. 모두 1510편이 출품된 이번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단의 선택을 받았다. 역대 최다인 수상작 중에서 어느 한 편을 뽑아올리는 작업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터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심사총평으로 "올해 한국단편경쟁 부문은 시대의 균열 속에서 길어 올린 사회적 질문과, 사적인 기억을 향한 섬세한 시선이 나란히 호흡한 해"라며 "그 안에는 개인의 고백과 공동체의 초상, 그리고 한국 사회를 감각적으로 포착하는 시도들이 공존했고, 우리는 이를 통해 단편영화가 여전히 가장 생생한 질문의 장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그중에서도 대상의 영예를 받은 작품, 황현지의 <겨우살이>는 무엇이 특별했을까. 영화제는 "죽음을 앞둔 이의 돌봄이라는 섬세한 주제를 조심스럽고 따뜻한 시선으로 어루만진 연출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면서 "카메라 너머 창작자의 고민과 태도가 고스란히 전해졌으며, 아직 다 풀지 못한 질문들을 관객과 함께 마주하게 하는, 단편이라는 형식을 넘어선 깊이를 지닌 작품"이라고 평했다.
▲겨우살이스틸컷
JIFF
기발하지도 파격적이지도 않으나
다른 무엇보다 오래 남는 건 '다 풀지 못한 질문'이라는 말이다. 이는 영화가 비추었을 뿐, 끌어올려 해소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일 테다. <겨우살이> 속 아이들의 삶, 고민, 결코 끝이 아닌 현실일 밖에 없는 이야기가 우리 사는 세상 가운데 이어지고 있다는 인식이다.
영화가 대단히 기발하거나 파격적인 건 아니다. 단편치고 다소 긴 40분짜리 영화는 이웃 사이인 두 여성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재희(김채영 분)와 아현(김에스더 분)으로, 아현이 재희에게 빌린 휠체어를 건네주기 위해 들린 것이다. 이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쓸 일이 없어졌다며 휠체어를 가져온 것. 재희 또한 휠체어가 당장 필요하지 않은 듯 어딘지 시큰둥한 인상이다. 일이 늦어 대충 집 밖에 내어두었다가 이따 들여놓기로 하고 헤어지는 둘 사이에서 오간 잠깐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전한다.
휠체어는 그를 써본 일 없는 이에게도 익숙한 물건이겠으나 그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휠체어라는 명칭과 그것의 용도 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를 접고, 끌고, 움직이고, 층 있는 곳을 오가고, 브레이크를 걸고 푸는 일 같은 건 써보지 않은 이는 알지 못한다. 간병을 해본 이와 하지 않은 이의 차이, 그를 <겨우살이>는 짤막한 대화를 통해 드러낸다. 어디 그뿐일까. 휠체어를 집에 가진 이, 그를 필요로 하는 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하나하나 그들을 둘러싼 상황을 알린다. 어떤 이에겐 보이는 것이 다른 이에겐 보이지 않는 건, 경험만이 비추는 시야가 있다는 뜻이리라.
▲전주국제영화제포스터JIFF
겨우살이가 기대 버틸 참나무는 어디에
<겨우살이>는 재희가 제 일터로 아현을 불러오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재희는 영상 제작회사에서 일하는 영상제작자로, 간병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이다. 가족간병을 하고 있는 중학생을 인터뷰하며 아현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것인데, 아현 또한 아픈 할아버지와 상당한 기간 동안 함께 살았고 보면 그 처지가 완전히 다르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재희 또한 과거엔 제 가족을 간병한 적이 있는 것으로, 영화는 서로 다른 세 여성 사이를 묶는 간병이란 상황과 그것이 남긴 상흔을 섬세하게 비춰낸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간병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서지 않는단 점이다. 인터뷰를 하는 학생의 이야기는 인터뷰를 하는 촬영장 안에서만 들려올 뿐, 그를 넘어 각자의 닫힌 문 안으로 카메라가 들어서는 일은 없다. 촬영장 안에선 PD가 아현에게 카메라를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고, 간단한 인터뷰가 진행되고, 또 그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재희의 귀 상태가 거듭 언급될 뿐이다. 재희의 귀에 물이 차고 고막이 손상된 상황은 영화의 주된 이야기와 별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그 비정상성과 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않는 상황이 오늘의 청소년 간병인이 처한 현실을 은근히 지목하고 있는 듯도 하다.
영화의 제목인 '겨우살이'는 말 그대로 간신히 살아간다는 표현인 동시에, 한국 숲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기생식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참나무 등 다른 나무에 기생하는 식물이라고는 하나 한 겨울을 버텨내는 강한 생명력을 높게 친 덕분일까, 사람들은 이 풀에다가 '강한 인내심'이란 꽃말을 붙이기도 하였던 터다. 간병 하는 어린 영혼들을 비추는 이 영화가 그렇게 제목을 단 이유가 어떻게든 살아남으란 응원에 있단 걸 내다볼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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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인간 도리마저 위협하는 간병의 그늘... 이 영화가 주목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