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미래의 과거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바꿔낸 사건이 일어난다. 환경파괴, 기후재앙으로 전 지구가 재앙 앞에 있던 어느 순간이었다. 제법 큰 규모의 숲이 파괴 앞에 놓여 있다. 개발회사가 숲을 사들여 나무를 밀기로 했다던가. 작업은 하루하루 진행되어 가장 깊은 숲마저도 모두 밀려나갈 위기에 놓였다. 숲 전체가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이를 막으려는 이가 있었다고 전한다. 숲에서 터를 잡고 살던 그가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개발업자들의 일을 수시로, 집요하게 방해했다. 작업차 주유구에 물을 길어다 붓는다거나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업체며 작업자들에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닌가. 하루빨리 작업을 진척시켜야 하는데, 웬 미친놈에 대비하는 게 더 주요한 업무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연이은 테러에 작업자들의 분노도 쌓여만 간다.
▲목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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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지키려는 자, 개발하려는 자
영화 <목인>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인 코리안시네마 섹션에 공식 초청된 작품이다. 1991년 생 젊은 감독 이명륜의 30분짜리 단편영화로, 판타지적 설정과 개성 있는 미감이 어우러져 독특한 감상을 안긴다. 감독은 영화의 시놉시스로 단 한 줄 '먼 미래 지구에 단 하나만 남은 숲, 그 숲을 지키며 살아가던 과거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라 적어두었는데, 한 인간이 숲을 지켜냄으로써 마침내 지구를 구한다는 게 영화의 주된 줄기가 된다.
영화는 먼 미래와, 그로부터는 과거지만 영화를 보는 현 시점으로부터는 미래인 두 시점을 오간다. 먼 미래 숲을 거니는 한 소녀(하신비 분)가 있고, 영화는 이 아이의 인도로써 과거 숲을 지켜낸 전설적 순간으로 돌입한다. 그 순간이 바로 먼 미래의 과거다.
여기엔 글머리에서 적은 것과 같이 숲에 사는 한 사내(김한 분)가 있다. 산에 대충 설치해둔 산막에서 홀로 사는 사내는 끝의 끝까지 말 한 마디 뱉지 않는다. 어찌 설치해둔 TV로 바깥 세상 소식을 접하면서도 문명과는 동떨어져 있는 사내의 사연은 관객에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사내가 살고 지키려는 숲이 지구에 마지막 남은 숲이라 했던가. 사내가 작업자들의 눈을 피해 작업을 방해하는 과정을 영화는 얼마쯤 긴박감 있게 다뤄낸다.
작업자들을 이끄는 현장 감독, 못해도 선임 작업자처럼 보이는 이(이종윤 분)가 사내 앞에 나타나며 영화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느 날인가, 이 작업자가 숲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채로 발견된다. 그를 찾은 건 숲에 사는 말 없는 사내다. 그를 그저 지나치지 못하여 사내는 작업자를 구한다. 뱀에 물린 그의 다리에서 독을 뽑아내 뱉어내고 약초를 구해다가 먹이기도 한다. 산을 잘 안다는 건 약초도 잘 아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무튼 사내는 죽을 위기의 작업자를 구해 살려낸다.
▲목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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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의 조우가 가져온 결과
작업자는 기적처럼 살아난다. 산막에서 깨어난 그는 저를 구한 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린다. 지난 시간 저들의 작업을 망친 자가 아닌가. 누구도 저를 악당이라 여기지는 않을 테다. 작업자의 세계에선 사사건건 작업을 망치는 사내가 악당이었을 것인데, 막상 눈앞에 나타난 그는 제 생각과는 전혀 딴판이지 않은가. 작업자가 이런 저런 말을 건네어 보지만, 사내는 도통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사이 우정 아닌 우정이, 이해 아닌 이해가 싹트는 건 둘 모두가 인간인 때문이 아닐까.
<목인>의 후반부는 별다를 것 없다. 아마도 관객이 생각하는 것과 얼마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 작업자는 제가 사는 세계로 귀환하고, 이제는 정체를 알게 된 사내의 본거지로 돌아와 그를 철거한다. 사내는 다른 작업자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숲에서 영영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숲의 운명 또한 이제는 정해진 것처럼 보인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졌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점을 아예 언급하지 않는 건 한 명의 평론가로서 작품을 대하는 예의가 아닐 테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영화는 수차례에 걸쳐 상당한 범위의 액션신을 배치한다. 영화 초반과 중후반, 가장 인상적인 대목에서 사내가 작업자들에게 쫓긴다거나 또 작업자들이 맨 땅을 구른다거나, 아예 직접적으로 얻어맞는 장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장면의 연기며 연출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다. 동선의 설정 또한 비현실적이다. 장르적 재미가 살지 않는 건 물론이다.
개연성 또한 아쉽다. 사내와 작업자의 만남, 그러니까 뱀에 물려 정신을 잃은 이를 발견하여 그를 구하는 장면이 그렇다. 독이 돌아 이미 의식을 잃은 이를 상대로 독을 빨고 약초를 발라 조치한다는 설정이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게 살아 돌아간 작업자는 또 어찌하여 제 동료들을 몰고 돌아와 사내를 쫓아내는 것일까. 드라마가 비켜난 자리 위를 영화가 마구 내달린다. 숲이 지켜지는 결정적 계기, 특별한 나무 한 그루가 명성을 얻기까지의 과정도 전혀 설명되지 못하여 관객을 당황하게 한다. 먼 미래 소녀의 몇 마디 말로 눙치고 넘어가기엔 영화의 가장 주된 승부수가 될 지점이 아닌가 말이다.
숲이며 나무의 이미지와 표현방식 또한 더 나아질 여지가 분명히 있었을 테다.
▲목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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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치 않은 기획과 시도, 그 도전에 박수를
그럼에도 <목인>은 매력 있는 작품이다. 여러 단점이 눈에 밟히기도 하지만, 드물고 독특한 시선이 눈길을 끄는 지점도 많다.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될 수도 있었을 미학, 특히 영상연출에 관심이 가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숲, 판타지적 설정, 신비한 나무의 존재까지가 모두 영상과 맞물려 특별함을 자아낼 수 있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의도와 현실적 한계, 아쉬움의 지점이 모두 있었으리라 여긴다.
<목인>의 촬영을 맡은 김비오 촬영감독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2024년 작 <벗어날 탈 脫>의 촬영감독으로 인상적인 장면을 여럿 찍어냈던 그가, <목인>에서도 나름의 도전과 성취, 또 실패를 해냈으리라 여겼다.
김비오 촬영감독은 "주인공이 나무 구멍에 들어가는 장면, 움막 안 장면들, 쓰러진 중년 남자를 발견하는 장면 등 기억에 남는 신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주인공이 발가벗은 몸으로 숲을 마주하고 선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프로덕션 과정에서는 촬영감독 입장에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이 포 나이트' 신(벌목업체 무리가 주인공의 움막을 공격하는 장면)과 실제 '매직아워'에 맞춰서 찍을 신들(도입부 추격전과 벌목장에서 굴삭기 주유구에 물을 넣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독님과 촬영 전날까지 함께 고민하며 준비해서 결과적으로 바라던 결과물을 얻었다"고 자평했다.
그는 이어서 "감독님과 미팅을 하고 이미지적으로 원하는 느낌이 '자연스러움'이라고 이해했다"며 "감독님과 저, 둘 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의 영화를 살펴보며 공통된 취향을 확인하기도 했고, 숲길을 따라 장소 답사를 다니는 하루 동안 화면비에서부터 촬영 콘셉트와 아이디어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설명했다.
▲전주국제영화제포스터JIFF
경청하게 하는 힘
김비오 촬영감독은 "방법적으로는 자연의 빛을 유심히 관찰하고 담으면서 최소한의 인공조명만을 사용했고, 제가 알고 있는 촬영 테크닉들을 활용하되 가급적 간단한 방식을 택해서 기술이 눈에 드러나지 않게끔 쓰려고 했다"며 "이야기가 내포하는 동화적인 면, 때로는 신화적인 아우라를 표현하기 위해서 자연의 빛과 컬러를 회화적인 이미지로 그려내는데 중점을 뒀다"고 강조했다.
김 촬영감독은 "영화가 숲과 나무, 인간과 사회를 다루는 측면에서 주제 의식이 분명하다"면서도 "이 짧은 영화엔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 또 우리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각적인 것들까지 섞여있고, 무엇보다 상투적인 계몽의 방식을 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생각과 상상의 여지를 줄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평가했다.
모두 네 차례 촬영으로 빚어낸 작품이다. 여러모로 부족한 환경이 발목을 잡았을 게 눈에 보인다. 영상도, 촬영도, 미술까지도 기대한 전부를 구현할 수는 없었을 테다. 그럼에도 <목인>은 나름의 미덕을 분명히 간직한다. 그중 제일가는 미덕이 무엇일까. 나는 영화의 마지막, 검은 화면 위에서 더욱 선명히 들려오는 나무의 박동에 있다고 본다. 박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를 대하는 관객의 태도에 있다고 본다.
요컨대 <목인>은 경청하게 한다. 마지막 남은 숲, 그곳에 선 특별한 나무, 그의 마지막 박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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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숲을 지키려는 자·개발하려는 자, 개연성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