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고들 한다. 예술가들 이야기다. 명성이 곧 돈이 되는 예술은 철저히 피라미드 형태의 생태계가 조성돼 있다. 가장 위에 선 이는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는 스타지만 그 아래 대부분은 영 그렇지가 못하다.
비슷한 또래들의 일반적 생애주기를 예술에 종사하는 이들은 영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 매진해야 하는 시기, 남들처럼 안정된 일에 매일 수도 없는 탓으로 형편이 피길 기대하기도 어렵다. 돈 없는 집안에서 예술하는 자식은 불효자란 자조가 수시로 들려오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예술하는 이들이 결혼에 이르는 경우도 다른 직종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좋은 아들노릇을 못하는 건 어찌할 수 없대도, 좋은 남편이며 아내, 좋은 아버지며 어머니 노릇까지 못한다면 면이 서지 않는 단 게 선택의 이유겠다.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앞길에 절로 한숨이 나는 걸 어찌할 수 없다.
▲기사님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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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사정 듣고 나면 남다르게 보인다
그래도 어쩌겠나. 하지 않을 게 아니라면 감당하며 나아갈 밖에. 빈센트 반 고흐조차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가. 말 그대로 꿈을 먹고 사는 직업, 언젠가는 제가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저와 제 작품을 올려두기 위하여 정진하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이기도 한 것이다.
배우의 사정 또한 통상의 다른 예술가와 얼마 다르지 않다. 근래 배우들과 자리하는 일이 잦은 탓인지, 이따금씩 그들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고는 한다. 일류 배우들이야 드라마 한 편에 수천 만 원에서 수억 원을 받는다지만, 얼굴이 얼마 알려지지 않은 대부분의 배우들은 당장 출연할 작품 하나 만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고. 그마저도 불황의 여파로 한국 영화며 드라마판이 얼어붙은 때문에 일거리가 크게 줄어들 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일까. 요즈음 배우들과 만나면 자주 듣는 이야기가 아르바이트와 관련한 것이다. 특별한 재주나 챙겨주는 지인이라도 있어 그럴듯한 일자리라도 있는 경우는 소수일 뿐, 대부분은 연기 말고는 뚜렷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 이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대체로는 비슷하다. 배달, 대리기사, 막노동 따위의 것들. 특히 남성 배우들의 삶에서 위 세 가지의 일을 나는 정말이지 수시로 접하게 되는 일이다.
▲기사님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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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기사와 술 취한 손님 사이 므흣한 기류?
<기사님>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섹션에 공식 초청된 28분짜리 단편이다. 배우로 좀 더 잘 알려진 류기산이 직접 연출한 작품으로, 크리스마스 즈음 대리를 뛰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감독 본인이 각본을 쓰고 연기까지 겸한 작품으로, 주인공부터가 제 이름을 그대로 쓴 듯 기산 기사님이다. 다분히 생활밀접한 직업이라 볼 수 있는 대리기사의 업이 그대로 한 편의 작품으로 화하는 과정이 여러모로 흥미를 자아낸다.
대리기사가 평소처럼 콜을 잡고 운전할 차에 오르며 이야기가 시작한다. 대리기사를 부른 고객은 세련된 외양의 젊은 여성, 또래처럼 보이는 기사와 칭찬 섞은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운전을 부탁한다. 차를 운전하는 동안 얼큰하게 술이 오른 듯 보이는 그녀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고개가 대리기사의 어깨에 떨어지고 기사는 어찌할 줄 모른 채 가만히 차를 몰아간다. 마침내 도착한 지하주차장에서 기사가 여자를 깨우고, 그녀는 화장이 묻은 그의 옷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손수건을 건네는 것이다. 것도 명품손수건이 아닌가. 기사는 어딘지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듯하다.
<기사님>은 노골적인 멜로영화가 아니지만 그 저변에 분명한 로맨스의 정서가 흐르고 있다. 남자는 잠깐 대리기사로 차를 몰았던 여자와의 만남을 잊지 못한다. 때는 마침 크리스마스 즈음이었고, 그녀가 취해 있기는 했지만 그에게 브래드 피트를 닮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사의 어깨에 기대어 졸았고, 마치 정표처럼 손수건을 건네주기도 했다. 그러니 대리기사가 며칠 쯤 그녀의 콜이 떨어졌던 주변을 배회하며 신경을 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젊음이고, 청춘이 아닌가.
▲기사님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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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지만 드러난다, 그런 감성
물론 그의 은근한 기대가 명확한 결실로 달성되지 않으리란 걱정 또한 상존한다. 그럴밖에 없는 것이 그와 그녀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이이고, 대리기사로 차를 몰아줬을 뿐인 아무런 사이도 아닌 관계일 뿐이다. 그는 대리기사를 뛰는 젊은이지만, 여자는 명품 손수건을 모르는 사이에 건네줄 수 있을 만큼의 재력은 갖춘 것으로 보인다. 젊은 남녀의 관계가 쉬이 진전되기 어려우리란 우려와 그러나 둘을 잇는 끈이 분명히 있기는 하다는 기대 사이에서 관객은 여자의 콜을 은근히 기다리는 듯 보이는 기산 기사의 나날을 몰래 지켜본다.
희망을 품는 건 영화 속 기산 기사만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 또한 기대와 걱정 사이에서 그를 지켜본다. 로맨스는 끝내 좌절되고, 냉혹한 현실은 기산을 남의 아파트 지하주차장보다도 더 깊은 곳으로 빠뜨리는 듯 보인다. 며칠간 품었던 기대가 민망하게도 그녀의 기억 속에선 저의 자리가 아예 없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찌 영화가 그렇게만 끝을 볼 수 있을까.
<기사님>은 단 한 마디도 배우의 삶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영화며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이를 배우, 영화, 예술, 나아가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적어도 얼마쯤은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대와 좌절, 실망과 일어섬, 우연과 필연, 만남과 동행까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여러 구석들이 그러하다. 그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감상을 일으키며 마을을 동하게 하는 것이 모두 또한 그러하다.
▲전주국제영화제포스터JIFF
드라마다운 드라마를 확인하며
유독 한국이 톱배우가 너무 많은 돈을 가져가는 구조인 탓으로, 해외 유명 제작사며 투자사가 한국에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에 부담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뜩이나 불황인 시장은 얼어붙은 영화, 드라마 현장을 더욱 꽁꽁 얼도록 했다. 벌써 몇 년 째 규격 있는 작품이 얼마 제작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이어진다. 톱배우가 아닌 대다수 배우들의 삶은 작은 일상부터 위협받는다. 제가 배우를 하는지, 배달기사나 대리기사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는 푸념을 일상적으로 마주한다. 그 모두가 연기와 작품활동, 창작의 자산이 되리라고 응원 아닌 응원을 해보지만, 어찌 그렇기만 할까.
<기사님>은 결코 만만찮은 현실 가운데서도 희망이 자리할 여지를 확인케 한다. 대리기사의 팍팍한 삶 가운데 분명한 낭만이, 꿈이, 목표가, 심지어 가끔은 기대도 자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물론 자주 어긋나고, 때때로 부러지겠지만, 언젠가는 기대치 못한 마주침과 수확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 영화의 결말에서처럼.
획기적인 이야기는 아닐 수 있겠다. 대리기사와 손님 사이 술김에 엇갈리는 의도와 마음이 흔한 무엇처럼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는 그대로 좋은 재료이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하다. 오해와 이해, 엇갈림과 맞아떨어짐 사이를 수시로 오가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 가까이 보면 낭패스럽지만 떨어져 보면 유쾌한 것이 또 인생사, 드라마이고 보면, 영화 <기사님>이야말로 너무나 드라마다운 드라마가 아닌가, 그런 생각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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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술 취한 여자 승객 기다리는 대리기사, 애타는 관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