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킹 아이스> 스틸
<브레이킹 아이스> 스틸찬란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나'는 연길에서 패키지 여행객을 대상으로 관광 가이드로 일하는 젊은 여성이다. 가족 동반 참여자가 대부분인 만원 관광버스 당일치기 일정을 소화하느라 분주한 와중에 드물게 혼자 온 본인 또래 '하오펑'이 눈에 밟힌다. 이것저것 편의를 봐주며 챙기던 중 두 사람은 말문이 트인다.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려던 참, 하오펑이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며 사색이 된다.

곤경에 처한 하오펑이 신경 쓰인 나나는 오래 알고 지낸 남자 '사람' 친구 '샤오'와 저녁 식사에 그를 함께 데리고 간다. 또래인 셋은 어색함도 잠시,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밤새 술을 마신다. 즐겁게 만취한 건 좋았지만, 하오펑은 예약해 둔 항공편을 그만 놓치고 만다. 다음 비행기를 타려면 며칠간 대기해야 한다. 막막한 처지의 하오펑을 나나와 샤오가 챙기며 셋은 함께 연길 곳곳을 쏘다니게 된다.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각자 흉중에 공허한 구석을 지닌 셋은 오랜 친구처럼 함께 어울린다. 겉으로만 보면 그저 절친이지만,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미묘한 감정이 교차하고, 평소 일상에서라면 시도하지 못할 일도 감행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우연히 불쑥 꺼낸 제안에 셋은 함께 백두산 등정을 시도한다.

고독감이 뼈와 살을 갖추다

<브레이킹 아이스>는 기묘한 조합의 영화다. 감독은 아열대의 땅, 싱가포르 출신인데 극 중 배경은 한중 국경에 맞닿은 연변 조선족 자치구의 중심도시 연길이다. 하필 배경도 온 세상이 하얗게 눈에 덮인 한겨울이라 감독의 고향과는 극과 극이라 해도 좋은 장소다.

여기에 1990년대생 가장 주목받는 중국 청춘스타 배우들이 세 주인공 역에 도전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중국 영화로 분류되지만, 조선족 자치구답게 한글 간판이 화면에 즐비하게 등장하고, 도입부는 연길 당일 투어로 진행되는 터라 한국어가 중국어보다 더 많이 들릴 정도다. 코스모 폴리탄 또는 무국적 영화라 해도 좋을 정도다.

그동안 도회지를 배경으로 작업을 선보여온 감독은 본인에게도 생소하고 낯설기 그지없는 배경을 굳이 찾으려 했다. 이유는 그가 팬데믹 시기에 경험한 극한의 고독과 소외 때문이다. 한창 차기작 작업에 골몰하던 때 발생한 전대미문의 대역병으로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봉쇄 상태에 격리된 감독은 활활 가동하지 못한 엔진이 공회전을 일으키듯 자신을 집어삼킬 위기에 놓였다고 회고한다.

본인뿐 아니라 수많은 동시대인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코로나 블루' 무저갱 같은 우울증에서 간신히 탈출한 그는 본인의 체험을 청년 세대 보편의 감정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한다. <브레이킹 아이스>의 출발점이다.

그런 작업이다 보니 감독의 예전 작업 방식과는 다른 점이 제법 많다. 감독의 이름을 알린 2013년 칸영화제 황금 카메라 수상작 <일로 일로>부터 (신작 대부분이 국내 영화제에 꾸준히 소개된 덕분에) 몇 편의 작업을 꾸준히 봐 왔지만, 안소니 첸 감독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 감독은 시나리오와 사전 준비를 참 꼼꼼히 철저하게 하는구나' 하는 인상이었다. 이미 고정된 스타일이 <일로 일로>에서 확립된 후 배경이나 소재를 달리하며 더욱 진해진다는 인상에 가까웠다. 그래서 기본적인 기대치는 늘 있지만, 파격적인 변화는 기대치가 오히려 적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 신작에선 좀 더 배우와 촬영 상황에 재량을 부여하는 모험을 감행하는 느낌이다. 기상 상황에 좌우되는 백두산 천지 탐방이 후반부의 굵직한 줄기로 작용하는 건 물론, 통제된 배경이 아니라 연길이란 색깔 있는 공간의 개성을 자연스럽게 유입하는 방식을 자연스레 취한다. 배우들의 농밀한 대화도 문자로 옮길 수 있는 내용보다 비언어적 감성으로 다가설 부분이 훨씬 맛이 진하다. 연길이란 공간적 특성이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런 배경 선정까지 감독의 작법이 일정한 변환을 시도했기에 가능한 발견인 셈이다.

변경의 땅에 모인 유랑 청춘들의 이야기

 <브레이킹 아이스> 스틸
<브레이킹 아이스> 스틸찬란

따뜻하고 정열적인 아열대의 땅, 혹은 세계 어딜 가나 비슷한 외양의 대도시를 주요 무대로 삼던 기존 작업에서 과감히 탈피해 다국적/무국적 공간의 질감이 확연한 연길을 배경으로 한 건 본 작품의 '결정적 찰나'를 확정하는 한 수다. 한국 관객에겐 다소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이 순간 닥칠 수 있지만, 중국 속의 소수민족 자치구이자 한류 콘텐츠 유입 경로이기도 한 이색적인 연길의 개성은 확연히 시선을 잡아끄는 힘을 지닌다.

연길과 백두산 일대를 무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정작 주인공 셋은 모두 이 동네 출신이 아니다. 나나의 고향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긴 해도 고향의 부모와 떨어져 가능한 먼 동네로 도망치듯 넘어와 연락을 두절하고 산다는 건 수차례 확인되는 대목이다.

하오펑은 아예 친구 결혼식 참석차 생면부지의 낯선 땅에 들른 관광객 위상으로 시작한다. 샤오 역시 토박이로 보였지만 알고 보니 고향 쓰촨에서 연길에 식당을 개업한 이모네 일을 도울 겸 흘러들어온 처지다. 다들 각자 사정으로 그들이 인식하는 범위 내에서 '세계의 끝'에 표착한 셈이라 봐도 틀릴 게 없다.

가이드로 일하는 나나, 식당 잡일을 거드는 샤오, 두 사람과 관광객인 하오펑은 동년배이긴 해도 처지는 퍽 달라 보인다. 하오펑은 상하이의 금융계에서 일하는 '화이트칼라'다. 대학 졸업자와 해외 유학파가 넘쳐서 청년 실업이 날로 누적되는 중국 현실에서 하오펑은 다른 둘과는 '계급'이 다르다고 해도 좋은 신분인 것. 하지만 그 역시 가족 배경이 아니라 권위적인 부모의 훈육과 간섭을 벗어나 독립하고자 그 방도로 열심히 공부했을 뿐이다.

어릴 적부터 노력한 덕분에 동 세대에서 선망의 대상이 될만한 신분을 획득했으나 정작 그가 바랐던 경제적 자유로 인한 독립과 해방은 요원하기만 하다. 부모와 살던 후난 지방에선 탈출했지만, 대도시 상하이에서 과로에 시달리며 심리상담에 의존한다는 게 공공연히 드러난다. 늘 쫓기듯 일에 빠져 사는 하오펑은 여전히 '독립'적인 삶과 거리가 멀다. 열패감이 그를 벼랑으로 몰아댄다.

나나는 비밀을 감춘 채로 익명성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의 몸에 새겨진 흉터처럼, 나나는 과거가 알려지는 게 끔찍하게 싫다.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과 단절된 채, 그렇다고 새 삶을 온전히 꾸리지도 못한 상태로 부유하듯 찰나를 보낼 따름이다.

굳게 마음먹고 외관상 독립적인 삶을 꾸리지만, 단단히 대못 박힌 것 같은 마음속 쐐기를 뽑아내지 않고는 미래를 기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샤오는 가장 태평하게 사는 듯 보이지만, 그 역시 변경의 땅에서 반복되는 나날에 만족할 리 없다. 낡은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달리는 것과 동경하는 나나를 지켜보는 게 유일한 낙이다.

동시대 청년 세대 보편의 정서와 도전

이 영화의 중국어 제목은 '연동(燃冬)', 영문 제목은 'The Breaking Ice'다. 시작과 함께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서 인부들이 천연 얼음을 규격에 맞춰 잘라 운반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마치 냉장고 없던 시절 석빙고에 보관할 얼음을 구하듯 펼쳐진 장면은 이후 여러 차례 (각얼음을 포함한) 얼음덩이의 출현으로 소환된다. 인물들은 호숫가에서 빙판에 올라서거나 얼음을 깨물며 견고해 흠집도 안 날 것 같은 얼음덩이를 녹이려 도전한다. 그런 파문은 셋이 함께 눈보라 휘날리는 백두산 설원을 등정하며 극점에 달한다.

세 친구는 서로를 향한 복잡미묘한 감정을 품은 채, 늘 간접적으로 보고 듣기만 했던 백두산 천지를 직접 보고자 의기투합한다. 함께 고물 트럭에 몸을 싣고 이동하는 길에는 흉악범 수배자를 잡기 위한 공안의 검문이 수시로 등장한다.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도 그런 주변 분위기는 기묘한 일체감을 인물들에게 부여하는 기능으로 활용된다. 하오펑은 서점에서 흥미롭게 봤던 백두산 지방 전설을 둘에게 들려준다. 한국 관객이라면 너무 익숙한,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 위해 마늘과 쑥을 먹으며 도전했던 일화다. 이 전설은 그저 여흥으로 그치지 않고, 이들이 등반길에 겪는 기이한 체험과 연동해 작품의 주제를 관객에게 깊게 각인하도록 만든다.

운명의 백두산 기행을 우여곡절 겪어가며 마치고, 일주일이 끝난다. 세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은 이제 추억으로 희미해질 테다.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몇 년은 사귄 것처럼 친밀해졌지만, 너무나 다른 조건과 배경은 금방 그런 소중한 순간을 희석하고 휘발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저 부유한 상하이 금융계 청년이 여행자로 훑고 지나간 1주일 관광지 추억담으로 그치는 이야기인 걸까? 변방의 소수민족 자치구에서 남은 둘은 어떻게 되는 걸까?

물론 로드무비의 백미는 길지 않은 찰나일지언정, 주인공 각자에게 닥친 낯설고 생소한 경험이 이후 그들의 삶에 던지는 잔잔한 수면 위 파문의 확인이다. 셋은 미련과 상처를 품은 채 그들이 각자의 이유와 과정으로 반쯤 도망쳐온 이 땅에서 새로운 단계를 개시한다. 그 변화는 정신적일 수도, 물리적일 수도 있다. 나나와 하오펑, 샤오가 어떤 선택을 감행하는지 구체적인 진실은 영화를 관람하면 확인 가능한 대목이지만, <브레이킹 아이스>는 그들이 각자 자기 앞에 놓인 절대로 꼼짝하지 않을 것 같은 얼음 장벽을 녹이거나 활활 사르는 방법을 기꺼이 공개해준다.

영화는 세기말 감성을 간직한 동아시아 청춘 영화 공통의 정서를 2020년대 재현한다. 중국 영화라지만, 연길의 지역적 특성, 조선족 자치구란 이국성을 소거하면 강원도 평창이나 일본 유바리로 무대를 옮겨도 크게 위화감이 없다. 어느 시대건 껍데기에 갇히고 벽에 부딛쳐 도약하지 못하는 청춘의 감정을 포착해 표출하는 다양한 사례가 등장하듯, 영화는 <브레이킹 아이스>라는 제목 그대로 돌파하는 예시 같은 작업이다.

누군가는 세계의 끝으로 숨으려 하지만, 누군가는 각자의 방법으로 초월을 꿈꾼다. 후자에 관한 공감대가 가능하다면 (모종의) 복잡한 시비 대신 흔쾌히 영화 속 그들 옆자리에 끼고 싶어질 테다. 세 사람의 미래를 몰래 응원하는 건 덤이다.

 <브레이킹 아이스> 포스터
<브레이킹 아이스> 포스터찬란

[작품정보]

브레이킹 아이스
燃冬
The Breaking Ice
2023|중국|청춘 케미스트리
2025.06.04. 개봉|100분|15세 관람가
감독 안소니 첸
출연 주동우, 류호연, 굴초소
수입 찬란
배급 (주)디스테이션
공동투자 퍼스트맨스튜디오, 소지섭

2023 76회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초청
브레이킹아이스 안소니첸감독 주동우 류호연 굴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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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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