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80세의 모습으로 천국에 도착한 해숙(김혜자)이 젊어진 남편 낙준(손석구)과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현생 초월 로맨스다. 극 중 의뭉스러운 목사 역을 맡은 류덕환 배우와 26일 강남의 카페에서 만나 종영 인터뷰를 가졌다.
류덕환이 연기한 '목사'는 회개가 필요 없는 천국에서 마냥 기다리는 게 일이다. 훗날 해숙과 낙준의 잃어버린 아들 '은호'와 동일 인물로 밝혀지며 강력한 반전을 선사했다.
구구절절한 상황을 암시하듯 둘은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깊은 정을 회차마다 나누었다. 해숙과 목사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수제비, 우렁 된장, 막걸리, 술떡, 미숫가루 등을 만들어 먹으며 티격태격했다.
"사람이 음식을 함께 먹으면 마음이 열리지 않나. 우리 드라마는 단순하게 음식으로 통합되는 게 있다. 음식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자기 이야기를 처음 시작한 거다. 점점 쓴소리도 하게 되고, 서운한 마음을 숨길 수 없어, 시청자 입장에서도 편하지 않았나 싶다"라며 즐거웠던 에피소드를 풀어냈다.
그는 2022년 단편 <불침번> 연출과 2024년 드라마 < LTNS > 특별 출연 이외에는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작년에는 전시 < NONFUNGIBLE: 대체 불가한 당신의 이야기 >로 기획자 자질도 선보였다. 천우희, 지창욱, 류승룡, 박정민이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배우가 외적인 부분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며 "예능, 유튜브, 인터뷰 말고 뭐가 있을까 고민한 끝에 단편 연출, 전시 연출을 해봤다"고 설명했다.
오랜 휴식 끝에 만난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달라진 자신을 시험하는 시험대 역할인 듯했다. 그런 의미의 연장선상이었을까. 첫 소속사의 품으로 최근 돌아와 좋아하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일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글이다.
오랜 공백기 연기 재정비
▲류덕환 배우
씨엘엔컴퍼니
-그동안 단편 연출이나 특별 출연은 했지만, 메인 캐릭터로 극을 이끈 건 <신의 퀴즈: 리부트> 이후 5년 만이다.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선 소감이 궁금하다.
"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오직 선생님을 위한 드라마다. 김혜자 선생님이 계셔서 부담이 없었다. 그래서 사실 저 꿀 빨았던 거 같다. (웃음) 좋은 배우도 많았고 책임을 짊어질 사람이 많아서 숟가락만 놓자는 마음으로 현장에 갔었다. 마지막 방송 보고 슬프고 좋았다는 아내의 소감이나, 친구 어머니들이 먼저 연락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감사했다."
-긴 공백기를 깨고 <천국보다 아름다운>으로 복귀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결혼하고 1, 2년만 쉬어보자고 결심했다. 연애할 때 워낙 둘 다 바쁘게 일하다 보니 만날 시간이 많이 없었다. 그때 내가 귀한 시간을 뺏었으니, 이제는 시간을 돌려주자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팬데믹이 터지면서 둘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 사이 카페 사장도 해봤다. 재미있었고 인생도 배웠으며 생각보다 잘 운영했다. 그러다가 전시를 기획하게 되면서 싹 정리했다. 전시 이후 좀 더 쉬자고 생각하던 때 김석윤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다. 만나자마자 대뜸 '할지 말지 정하라'고 했다. (웃음) 저는 (김혜자) 선생님이 나온다는 정보랑, 혜자와 덕환으로 표시된 한 페이지 정도의 대본만 본 게 다였지만.완성된 팀이 절 염두에 두고 불러주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선생님과 연기한다는 건 너무 큰 기회라 놓치면 바보라는 생각에 고민 없이 결정했다."
-따뜻한 마음과 굳은 신념을 지닌 목사가 이후 해숙(김혜자)의 아들 은호라는 반전 설정을 숨기면서 연기해야 했다.
"부담은 안고 시작했다는 건 맞지만 촬영할 때는 거의 없었다. 감독님이 반전이 중요한 드라마는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선생님과 두 번 작업해 봤으니 저만 믿으면 된다는 말이 큰 도움이 되었다. 미우면 미워하고 예쁘면 좋아하면 된다는 말이 와닿았다. 어차피 해숙과 목사 시퀀스는 드라마와 별개로 따로 떼 놓아도 될 만큼 다른 감도로 찍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해숙 포레스트(극 중 직접 재료를 구해 음식을 만들어 먹기 때문)'를 찍자고 했다. 선생님과 재미있게 촬영에 집중했고 그냥 흘러갔다."
-대선배 김혜자 배우와 호흡 맞추며 들었던 감정이나 배운 점도 남달랐을 것 같다.
"'이런 게 김혜자구나'를 매번 느꼈다. 저도 나름 연기를 오래 했는데 끌려가고 있어 화가 날 정도였다.(웃음) 연기 드립을 구경하는 관전자였다. 저는 연기를 열심히 하려고 매번 오버액팅을 하게 되는데 선생님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고 자연스럽게 연기하시더라. 리액션을 알아서 해주시니 고민하고 준비한 게 무의미했다. 감독님이 저를 캐스팅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믿고 편하게 연기했다."
-직접 캐스팅 이유를 물어봤던 건가.
"선생님이 실제 잊고 있던 인연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유였다. 아역 때 만난 적 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는 선배님으로서 인식하고 멀리서 바라보고 존경하면서 커왔던 게 다였다. 선생님에게 저는 먼 기억 속에 있지만 이제는 잊힌 사람인 거다. 그게 캐릭터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졌다. 잊고 지낸 아들을 기억해 내고 슬픔을 꺼내려면 현실의 선생님도 실제 잊고 있던 인연을 소환하길 바랐던 거다."
결혼, 인생 2막의 시작
▲류덕환 배우씨엘엔컴퍼니
-결혼 후 배우로서도 시야도 확장되는 터닝 포인트가 된 것 같다.
"예전에는 배우니까 관찰한답시고 지하철이나 버스 타고 다니면서 얻은 정보를 연기에 녹였다. 정보를 토대로 저 혼자 상상하고 판단을 내려버린 거다. 배우는 술도 잘 마셔야 한다는 배우병에 걸려서 술자리도 많이 했었다. 선배가 새벽에 불러도 거절을 못 하고 다 나갔다. 그때 거기서 한마디 얻는 게 영감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혼하고서는 술도 끊었다.
이제는 진짜를 배우게 되었다. 작품 이야기만 하는 사람을 만나다가, 아내 친구나 부부를 만나면서 실생활 이야기를 듣게 된 거다. 저의 에너지를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하다. 예전의 저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결혼 후에 인간이 된 거다. (웃음) 아내에게 요리해 주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줄 기대, 아내의 출장 중 느껴보는 허전함과 외로움, 혼자도 좋지만 함께 하는 소중함을 생각했다. 결혼하고서는 사람 공부, 인간을 바라보는 이해력이 포괄적으로 변했다. 나를 싫어한다면 좋아하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내려놓게 되었다. 옥죄지 않으니까 편해졌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인연'에 대해 말하는 드라마답게 '목사' 캐릭터를 만난 것도 인연인 게 아닐까.
"어릴 때부터 일찍 주인공을 하다 보니 현장 분위기를 이끌어 가야 하는 사람이란 부담에 힘들었다. 상대방의 태도를 의심하다 보니,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진 거다. 자존심도 세고 승부욕도 커서 뭐든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치열하게 살았다. 그럴수록 눈치도 많이 보고 긴장감도 컸다.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순간에도 내내 연기를 하고 있었고 집에 가면 허탈했다. 우러나온 행동이 아닌 만들어진 행동이었던 거다. <신의 퀴즈> 할 때도 칠판 가득 공식을 채우는 장면도 다 외워서 할 정도로 철저했다. 그래야 스태프도 그런 나를 보고 자극받는다는 허망한 생각을 했던 거다. 하지만 그건 다 저를 괴롭히는 일이었다. 기술적 연기, 외적인 이미지만 포장하게 되는 거였다. (이번 작품은) 연기라는 게 스트레스가 아니라, 놀면서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던 소중한 작품이다."
-무대와 매체를 넘나들고 연출까지 겸하는 배우로서 '연기'란 무엇이라 생각하나.
"예전에 신구 선생님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봤다. 그 연세에 무대에서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시더라. 반성을 많이 했다. 배우라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찾아서 보여주는 게 연기라는 생각을 했다. 톰 크루즈도 여전히 액션을 선보이니까 멋있는 거다. 그게 배우로서 가져야 기본적인 소양이다. 자신의 시간을 정확하게 아는 것, 지금 내 시간이 소중하다는 걸 알고 기록으로 남기는 게 연기라고 생각한다."
-아역부터 시작한 오랜 경력자다. 본인의 아역 시절은 어땠나.
"저의 아역은 어려웠고 무서웠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싫다. 현장에서 이름으로 불린 적 없었고 야 너 하면서, 소품 취급 당하던 시절이었다. 눈물을 흘려야 하는 장면에서 다른 친구가 뺨을 맞자, 저도 못 울면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은 아역도 엄연히 '배우'로 인정받고 다들 예뻐해 주고 인간적으로 대해주잖나. 부모님도 많이 알고 계시고 학교생활이 중요하다는 것도 아는 만큼 많이 변했다. 많은 선배님들이 바꾸어 주셨다."
-마지막 질문이다. 드라마처럼 환생한다면 배우란 직업을 또 택할 건가.
"아마 또 하지 않을까. (웃음) 어릴 때 하필이면 소극장에서 놀았을까. 그때만 생각하면 신기하다. 어머니 말로는 숫기가 너무 없어서 어른들이 귀엽다고 만지려고 하면 토할 정도였다고 한다. 고민 끝에 안양의 소극장에 보내셨고 몇 시간 후에 찾으러 오니까 신기하게 형들이랑 놀고 있다고 하더라. 그때 연기를 시켜야겠다고 결심하셨다고 들었다. 첫 연극 <벌거숭이 임금님>으로 데뷔하게 된 거다. 그때 한 마디 대사가 전부였다. '저 임금님 벌거벗었대요'라는 제 인생 첫 대사였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필연이든 우연이든 해야 하는 게 운명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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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 선생님, 5년 공백 깨고 복귀하게 해준 고마운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