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산소를 찾으러 가는 길에 차가 고장 났다. 세 여성은 낯선 시골 마을에서 차 수리를 의뢰하지만 누가 봐도 바가지요금이다. 여기에 더해 알게 모르게 위압적인 카센터 사장 때문에 불안감은 커져만 가고, 결국 차를 맡겨둔 채 외딴 모텔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영화 <내가 누워 있을 때>는 최정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신예라지만 19세 때 제작한 다큐 <당신의 날개>(2007)를 비롯 <노포동>(2013), <신탄진>(2015) 등 여러 단편 영화를 연출해 온 제법 경력 있는 영화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여성이 주인공이었고, 그 여성들은 주변의 편견과 싸우거나 고정 관념을 깨는 인물들이었다. <내가 누워있을 때>도 그 연장선에 있어 보였다.
지난 26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인근에서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더 들어볼 수 있었다.
욕망을 실현해 온 여성
▲영화 <내가 누워있을 때>를 연출한 최정문 감독.
시네마달
"개봉까지 5년이 걸렸다"는 감독의 말에서 지난했던 시간이 느껴졌다. 냉철하면서도 똑 부러져 보이는 직장인 선아(정지인)와 그의 사촌동생 지수(오우리), 이 두 사람을 태우고 운전하게 되는 지수의 친구 보미(박보람)는 각자 품고 있는 상처가 있다. 영화는 이 세 사람의 서로 다른 과거를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진행해 간다. 카센터 사장의 위압적 태도는 스릴러적으로, 세 캐릭터의 과거는 드라마 방식으로 풀어 흥미 요소를 더했다. 최정문 감독은 애도의 감정이 이 영화의 근간이라고 설명했다.
"이야기를 쓸 당시는 아니었지만 강남역 살인사건이나 여자 연예인들의 죽음이 제 마음에 크게 남아 있었다. 많이 슬펐다. 화도 많이 났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제대로 기억하는 것밖에 없을 것 같더라. 그런 애도의 마음과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제 주변 사람들 이야길 쓰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애도뿐 아니라 변하거나 떠나가거나 잊히는 것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었다. 첫 장편으로 다소 민감할 수도 있는 주제였지만, 그 애도의 감정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세 인물의 상처라는 건 비단 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면도 있으면서 동시에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함도 있었다. 상사와 연애한다는 이유로 선아는 꽃뱀이라는 눈총을 묵묵히 견디며 팀장 자리까지 올랐다. 동급생 동성 친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지수는 심한 따돌림을 당해왔다. 남자친구의 아이를 갖고 끝내 사산한 보미는 그때부터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고 있다.
흥미로운 건 선아의 태도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꿋꿋하게 견뎠던 그는 일종의 사회 계급 구조와 조직의 생리를 철저하게 내재화한 인물이다. 사촌 지수에게도 레즈비언인 걸 숨겨야 무난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고 조언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큰 태도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 영화가 어떻게 보면 선아의 성장기라고 생각한다. 선아 역의 정지인 배우는 저와 단편 작업을 하며 되게 친해졌거든.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얘길 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남자를 이용했냐 아닌가 등으로 말이다. 이 영화를 찍을 때 욕망 있는 여성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았었다. 선아는 자기 욕망과 목표에 솔직했지만 그로 인해 경주마처럼 시야가 좁아진 인물로 표현했다. 그 모습을 알게된 사촌동생 지수가 일종의 '팩트폭격'을 한 거지. 제가 생각했을 때 선아는 마냥 선한 캐릭터가 아니었으면 했다.
동시에 그의 욕망이 못되게 보이지도 않길 원했다. 관객들이 어떻게 보실지 참 궁금하다. 시나리오 쓸 때 주변에 광고회사 다니는 친구들에게 많이 물어봤거든. 현실은 더 영화 같더라. 여성으로 그만큼 경력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저도 한국을 사는 여성 감독으로 선아가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영화 제목 또한 세 사람이 그날 하루만큼은 고민을 내려놓고 편하게 잠에 들길 원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윌리엄 포크너 작가의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를 떠올리기도 했고."
▲<내가 누워있을 때> 스틸
시네마 달
최정문 감독은 이번 영화에 합류한 세 배우에게 남다른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선아의 태도와 선택이 마냥 밉지만은 않게 보였다면 배우의 덕일 것이라며 최 감독은 정지인 배우의 따뜻함과 부지런함을 강조했다. 여기에 더해 오우리의 깊은 표현력, 고 박보람의 사랑스러움이 영화의 힘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우리 배우가 맡은 지수는 직선적인 인물인데 깊이가 있어야 방방 뜨지 않을 것 같더라. 오우리 배우의 단편들을 보는데 눈이 크고 깊더라. 지수를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제안을 드렸다. 박보람 배우는 사실 연기를 처음 하다 보니 걱정하긴 했는데 제작사를 통한 미팅에서 보고 대본 리딩을 하는데 정말 보미 같더라. 실제론 좀 무심한 척하며 챙겨주는 츤데레 같은 스타일이었다. 가수로 활동할 땐 카메라를 딱 바라봐야 하는데 연기할 땐 그러지 않아도 되니 너무 재밌었다고 한 게 기억난다."
개봉(5월 28일)을 앞두고 최정문 감독은 감사하면서도 무섭다는 양가감정을 고백했다. "솔직히 개봉한다는 게 정말 감사한 일인데 5년 전의 작품이라 어떻게 보실지 무서운 마음도 든다"며 "무엇보다 보람 배우와 관련한 분들에게 너무 늦게 개봉하는 건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미술 작가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중학생 때부터 막연하게 영화감독을 꿈꿨다는 최정문 감독은 여전히 영화를 짝사랑 중이라 고백했다. 여자들의 겨드랑이 털에 대한 다큐인 <당신의 날개>부터 계산하면 무려 18년째 영화를 놓지 않고 있다.
"아르바이트도 하고 워킹 홀리데이도 다녀오면서도 영화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족들이 다행히 힘을 많이 주신다. 나이가 들며 스스로는 미안함이 든다. 너무 이기적이었나 싶기도 하고. 제가 잘할 수 있는 건 뭘까 계속 고민하고 공부 중이다. 자연스럽게 저와 닮은 사람들 이야기를 써왔는데 급하지 않게 천천히 찾고 싶다. 언젠가는 가족 이야기, 사랑이야기들을 써보고 싶다."
▲영화 <내가 누워있을 때>를 연출한 최정문 감독.시네마달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여자 연예인들 죽음에 화나, 애도의 감정이 영화 근간됐다"